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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98화 (98/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98화

청혼을 거절한 제네비브는 테오도르와 또다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와 시시덕거릴 여유가 없었다. 이는 빨리 정해야 하는 ‘가정교사 고르기’ 때문도 아니었고, 청혼으로 마음이 심란해져서도 아니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에드워드다.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제네비브는 서류를 보며 중얼거렸다.

가정 교사가 아본리아 출신이라는 것만 보고 에드워드가 생각나는 건 대체 어째서인가. 제네비브는 베개를 퍽퍽 때렸다.

이렇듯 제네비브의 뇌는 에드워드가 생각날 만한 일이 아닌데도 어딘가 고장이 났는지 그와 접점을 찾아내 그를 떠올리기 바빴다.

차라리 자신이 에드워드를 좋아하는 거라면 이해가 됐지만, 그저 에드워드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이러고 있다는 게 자괴감이 들었다.

세인트 존 칼리지를 다닐 적 제게 호감을 느꼈던 남학생들을 몇 번 봤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온종일 그들을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다.

에드워드가 일상 속에서 자꾸 나타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원작 속 주인공이 자신을 좋아한다는데, 어떻게 생각 안 할 사람이 있을까.

‘이건 좋아하는 게 아니야. 의식하는 거지.’

지나칠 정도로 많이 의식하는 거다. 왜냐면, 에드워드는 주연 중 한 명이니까. 머릿속에 에드워드가 등장할 때면 제네비브는 이런 말들로 상상을 죽였다.

나아질 기미가 없는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제네비브는 테오도르를 고의로 피한 게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더 오래 계시지, 아쉽군요.”

“다음도 있으니 아쉬워 마시기를. 늘 반겨 줘서 고맙소.”

우드빌 대공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정리되면 사람을 불러 편지를 보내겠네. 잘 들어가게나.”

달링 후작과 짧은 덕담을 주고받은 우드빌 대공은 제네비브에게도 ‘잘 지내라’와 같은 말을 건넸다. 아들이 청혼했다는 걸 눈치챈 건지, 아니면 테오도르가 직접 말한 건지는 모르지만, 우드빌 대공은 제네비브와 눈이 마주칠 때면 아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동맹이 늘 그렇듯, 우드빌 가문은 별 탈 없이 녹서스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언제든 대공령으로 오라는 초대를 기억하며 제네비브는 서서히 작아지는 마차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애들이랑 우드빌 영지에서 사냥하자는 얘기도 했었지.’

마이언에서 친구들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 와 보자니 이루어지지 못할 약속이었다. 어수선한 아본리아의 분위기, 실패한 청혼과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게 된 자신까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인원을 모으랴.

‘가장 고생한 사람은 에드워드고…….’

안 좋은 습관이 다시 등장했다.

제네비브는 두 뺨을 찰싹 때리며 정신을 붙들었다. 눈에서 멀어졌으니, 점차 머리에서도 사라지리라. 싹틀 이유가 없는 감정을 굳이 부풀릴 필요도 없었고, 한동안 못 볼 사람을 향한 감정을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 또한 없었다.

—제네비브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다.

가정 교사를 간신히 고르고, 교사에게 보낼 편지 서두를 고르던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끝이 안 보일 것 같았던 냉전은 조금씩 녹고 있었다. 예전처럼 살가운 대화는 아직 일렀지만, 그래도 제네비브가 부모님과 공적인 대화(주로 가정 교사와 관련된 것이었다)를 나눈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었다.

달링 부부는 제네비브와 함께하는 식탁에서만큼은 평범한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여보, 왕실에서 온 편지라도 식사 뒤에 보면 안 되나요?”

달링 후작부인은 테이블에서 편지를 읽는 남편을 가볍게 나무랐다. 하지만, 달링 후작은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네비브는 곁눈질로 편지를 구경했다. 편지 겉면에는 카르디르 왕실 인장이 황금빛으로 요란하게 찍혀 있었다.

왕실로부터 편지를 자주 받은 탓에 달링 가문은 그게 중요하다는 걸 종종 잊는 유별난 구석이 있었지만, 그녀의 부친은 평소와 다르게 처음 왕실의 편지를 받은 소귀족인 양 진지하게 읽어 갔다.

“오, 아서. 대체 왕실에서 뭐라고 보낸 거죠?”

굳어 가는 달링 후작을 보며 달링 후작부인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본리아 황자가 우리 영지를 방문하겠다고 했소.”

달링 후작의 말을 들은 제네비브는 순간 포크질을 멈췄다. 아본리아의 황자라고 하면 이제 에드워드뿐이었다.

‘에드워드가 카르디르에 온다.’

제네비브는 안 믿긴다는 듯이 달링 후작을 바라보았다. 이해를 못 한 건 달링 후작부인도 피차일반이었는지, 그녀는 남편이 들고 있던 편지를 가져가 읽었다.

“……무슨 이유로 온대요?”

제네비브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아본리아 제국이 아닌 카르디르 왕실에서 보낸 공지이니만큼 추측하기도 어려웠다.

“며칠 뒤에 아본리아 사절단이 카르디르로 오는데, 방문 목록에 에드워드 황자가 추가되었구나……. 여기를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말씀하신 것 같단다.”

달링 후작부인이 못마땅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

이렇게 갑작스럽게 재회할 줄이야.

적어도 몇 년은 못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훌쩍 앞으로 다가온 만남에 제네비브는 사뭇 긴장이 되었다.

* * *

달링 저택은 우드빌 가문이 오기 전처럼,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강박적으로 저택을 청소했다. 커튼을 세탁하거나 분명 멀쩡했던 카펫을 새로 다시 까는 등,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 이유 중엔 이웃 나라의 유력한 후계자— 에드워드가 방문한다는 것도 있지만, 카르디르 왕실에서 사람이 온다는 영향 역시 컸다. 게다가 알려 준 날짜도 급박하여, 달링 저택의 식솔들은 이틀 안에 대청소를 끝내야 했다. 제네비브는 달라지는 달링 저택의 내부를 보며 에드워드가 이곳을 좋게 여기기를 바랐다.

그리고 예정대로 아본리아 사절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왕궁에 퍼지기 무겁게 에드워드는 녹서스를 찾아왔다.

정문에 도착한 제네비브는 부모님의 뒤쪽에 섰다. 이른 새벽부터 느지막한 오후까지 단장한 수고가 무색하게 달려오느라 몇 시간 동안 손질한 머리가 헝클어졌다. 제네비브는 머리를 넘기며 숨을 정돈했다.

저 멀리서 고급진 마차가 달링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마차는 달링 후작 부부 앞에 섰다. 이어서 마차 문이 미끄러지듯이 열렸다.

“…….”

시선을 아래로 낮춘 탓에 제네비브는 내린 사람이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유로운 듯 느린 걸음걸이는 듣기만 해도 그 주인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본리아 제국 황자님께 인사드립니다.”

제네비브는 부모님을 따라 카르디르식 인사로 그를 맞이했다. 무릎은 굽혀, 시선은 아래로.

제대로 인사했을까? 알 수 없었다. 당장 에드워드가 왔다는 걸 생각하니 주책맞게도 긴장이 되었다.

에드워드를 향한 감정이 영원히 미제여도 괜찮다고, 무수히 세뇌를 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에드워드가 눈앞에 있다는 생각을 하자 제네비브는 당장 확인하고 싶어졌다.

‘얼굴을 보면 바로 알 것 같은데.’

상대를 못 보는 인사법이 지금보다 답답했던 적도 없었다. 에드워드를 곧 볼 수 있을 거라는 바람과 달리, 제네비브는 한동안 황자의 신발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달링 저택 안으로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다. 에드워드가 내린 거대한 마차에선 에드워드의 비서관처럼 보이는 남자와 그의 호위병, 그리고 예외적으로 동행한 카르디르 왕실 사람까지.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링 후작.”

에드워드의 목소리였다.

그는 평소와 같이 담담한 목소리로 사전에 고지되었던 방문 이유를 다시금 알렸다. 황실에서 시간을 허투루 보낸 건 아니었는지,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더 깊이감이 생긴 것 같았다.

‘황실 적응은 잘하고 있나? 고생시키면 어떡하지…… 옷은 잘 입히는 것 같은데.’

굴러 들어온 돌이라 견제하는 사람도 많을 텐데. 든든한 힘이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블라이스 가문이랑 제법 친해지지 않았나? 블라이스 가문 정도면 초반 입지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이지. 괴롭히는 사람은 없겠지?

제네비브는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시야를 빠르게 지나간 옷자락을 포함해 에드워드의 앞으로를 열심히 분석했다.

하지만 수많은 걱정과 염려는 금방 사라졌다. 아마 그는 적응을 잘할 거다. 제네비브는 생각했다. 그는 에드워드니까. 그게 그녀의 이유였다.

‘이래서는…….’

제네비브는 복도에 우뚝 섰다. 달링 후작 부부와 에드워드, 그리고 제네비브를 따라가던 궁인들은 갑자기 멈춰 선 그녀의 뒤에 멈춰 섰다.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미소를 머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처럼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이러면 마치, 내가 얠 좋아하는 것 같잖아.’

제네비브는 속으로 작게 불평했다.

목에 무언가 걸리는 것 같다. 무언가 불안하게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마침 같은 칼리지 출신이니, 식사 전까지 둘이 대화를 나누는 건 어떤가요?”

형식적인 대화가 끝나고, 달링 후작부인은 형식적인 예의 바른 소리를 했다.

대륙에 있는 그 누구도 황자와 자식의 친목을 나무라진 않을 테지만, 달링 후작부인은 달랐다. 제네비브는 모친이 마지막 문장을 어렵게 꺼냈음을 쉽게 알아챘다.

에드워드는 구태여 거절하지 않았고, 이는 제네비브도 똑같았다.

“…….”

“…….”

옛 문화인 샤프롱을 흉내 내는 감시자들과 함께 제네비브와 에드워드는 응접실에 들어갔다.

‘키가 더 커진 것 같은데.’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힐끔 바라보았다.

황실에서 예법 수업이라도 받았는지 이따금 움츠러들던 에드워드의 어깨는 널찍하게 펴져 있었다. 다시 손을 본 머리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의 장점을 살렸고, 당연하게도 에드워드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제네비브는 새삼스럽게 에드워드가 잘생겼다는 걸 체감했다. 덥수룩한 머리나 옷같이 방해하는 요소를 전부 빼고, 어울리는 옷까지 입혀놓으니 몰랐던 부분마저 보이는 것 같았다.

“선배, 그동안 잘 지내셨…….”

“부디 말을 편히 해 주시길 바랍니다.”

에드워드의 얼굴을 감상하던 제네비브는 재빨리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저와 에드워드를 보는 왕의 사람이 하나도 아닌 둘이다. 작위가 없는 외국 귀족에게 존대를 하는 모습까지 보여 줄 이유 없었다.

“장시간 마차에 있어 몸이 갑갑하군. 달링 양께서 잠시 안내해 줄 수 있나?”

제네비브가 열심히 보낸 신호가 닿은 걸까, 에드워드는 왜 제네비브가 선을 그었는지 깨달은 듯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써 권위 있는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에드워드의 어조가 웃기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제네비브는 보이지 않게 잠시 웃음을 지었다.

“안 될 이유가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에드워드를 만나고 그와 대화를 나누니 반가웠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제네비브는 줄곧 궁금했던 것마저 까먹었다.

그녀는 에드워드를 데리고 달링 후작저 밖으로 갔다.

“밖으로 나가도 되나요?”

제네비브의 뒤를 쫓아가던 에드워드가 전과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 될 것도 없지. 여기선 네가 뭘 원하든 다 될 거야.”

제네비브는 여상하게 말했다. 고원 지대에 위치한 달링 후작성은 어디를 봐도 녹서스를 한눈에 담아 볼 수 있었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따라 늙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멈췄다.

해 질 녘의 녹서스는 쓸데없이 로맨틱했다. 노을이 지는 방향으로 풍요롭고 드넓은 밀밭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작물끼리 부딪치는 소리는 올해도 풍작이라 알렸다. 좋은 신호였다.

분홍색 하늘과 새가 지저귀는 소리, 그리고 바로 보이는 에드워드. 그림과도 같은 이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녹서스는 초대 달링 후작, 그러니까 녹서스 달링 후작이 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땅이야.”

어색해진 제네비브가 소리를 채웠다.

다섯 살이었을 때 읽은 가문 역사서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왜 이런 얘기를 지껄이는 건지. 제네비브는 곧바로 후회했지만, 뻔뻔한 미소를 지었다.

“할 말이 있어요.”

조용히 평야를 바라보던 에드워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뭔데?”

제네비브는 물었다. 조금 서늘한 여름 바람이 불었다.

“세인트 존 칼리지를 다시 다닐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노을빛을 받아 빛나는 연갈색 눈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에드워드는 제법 긴장한 모습이었고, 제네비브는 기민하게 질문의 본질을 파악했다.

“……설마.”

“…….”

제네비브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두 눈을 살짝 크게 뜨고, 질문하지 않은 답을 에드워드가 알아서 답해 주기를 바라듯 쳐다보자, 그는 그게 맞다는 것처럼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네.”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아? 학교를 다시…….”

제네비브는 안 믿긴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무나 좋은 일이, 감사한 일이 한꺼번에 생기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제네비브는 순간적으로 에드워드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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