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02화
한참 전에 이루어졌어야 할 대화가 이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딸아이가 한 선택이면 뭐든 지지를 보내겠다는 달링 후작 부부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며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니 제네비브는 자신의 의사를 통보하는 게 아닌, 기나긴 대화와 설득으로 그들의 지원을 얻어 내야 했다.
“……이야기가 길어지겠구나.”
달링 후작부인이 말했다.
“앉으렴.”
제네비브는 모친의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창문 주변을 서성거리며 바깥을 보던 달링 후작은 느린 발걸음으로 제 부인 곁으로 다가갔다.
달링 후작부인 옆에 앉은 그는 줄곧 손안에서 굴리던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대화를 시작하자는 신호였다.
손님이 올 때마다 ‘아무 문제도 없음’을 보이기 위해 나누었던 대화를 제외하면, 세 사람은 카르디르로 온 뒤로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가졌다.
제네비브는 부모님을 똑바로 직시했다.
“왜 굳이 칼리지를 가겠다는 게냐?”
달링 후작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혼자서 잘할 자신이 없어요.”
제네비브는 대답했다. ‘에드워드가 원작처럼 죽는 걸 막고 싶다’ 따위의 이유보다 훨씬 설득력을 가졌다.
자신감 없는 딸의 대답을 들은 달링 후작 부부는 반박했다.
모친은 “너라면 잘할 수 있다.”라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부친은 “그래서 가정 교사를 붙여 주기로 했잖니.”와 같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상기시켰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근데 저라면 잘할 수 있다는 얘기, 거짓말이잖아요.”
“오, 그건 결코 거짓말이 아니야! 제네비브, 나와 네 아버지는 너를 정말로 믿고 있단다.”
제 진심을 의심 받은 게 억울하다는 듯, 달링 후작부인은 옅은 화까지 냈다.
“두 분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제가…… 그게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래요.”
이건 단순한 자신감 부족이 아니었다. 그동안 수많은 기출 문제를 풀며, 제네비브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이 길과 맞지 않다는 걸 알았다.
제한 시간까지 무시하며 끝까지 풀어 본 문제들도 막상 확인하면 자신은 정답과 거리가 먼 답변을 내놓았다.
“그건 안 해 보고는 모르는 일이란다.”
“통계만 봐도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걸 알잖아요.”
만약 국가시험의 승산이 높았다면 카르디르 귀족은 포가츠 아카데미에 거금을 쥐여 주면서까지 성적 조작을 부탁하지 않았을 거다. 폐교하여 갈 학교를 잃은 사람들은 자신을 받아 줄 학교를 찾는 대신, 국가시험을 준비했을 거다.
“만약에 제가 계속 떨어지고, 친척들이 달링 가문을 차지하려고 하면…….”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럴 리는 없다.”
달링 후작이 강하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잖아요. 경우의 수를 생각해 주세요. 현실적으로, 만약에 가문이 대리인을 통해 운영된다면…… 그러니까, 사촌 브랜든 같은 사람이 운영한다면 그분이 제가 국가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지원해 주겠어요?”
부친의 부재나 자신이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건 최악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그 여파로 그렇게 에드워드의 흑화를 못 막게 된다면.
다음 여름에 세인트 존 칼리지가 소실되었다는 것과 아본리아 제국이 황태자를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제네비브는 두 사람을 설득하지 못한 이 날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다.
“칼리지를 더 다니고 싶어요. 아니, 저는 더 다녀야 해요.”
칼리지를 가야만 에드워드를 곁에서 도울 수 있었다. 소설과 다른 결말은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위험한 일에 관여도 안 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떠날게요. 저한테 찰스 비슷한 일이 생기면, 아니…… 다른 사람이 제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일을 당하게 되면…… 자퇴할게요.”
제네비브는 진지하게 말했다.
어차피 소설 초반부는 위험한 내용이 없었다. 초반의 굴곡은 여자 주인공이 받게 되고, 위험한 사건은 에드워드의 눈이 돌아가면서 일어나니까.
‘그런 일은 없도록 주의해야지.’
에드워드가 죽게 만들 수 없다. 옆에서 어떻게든 노력을 하면 에드워드는 소설과는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 테다.
“리스톨 방문도 안 하고, 학교에만 있을게요. 틈틈이 편지도 하고, 이상한 일에서 멀어지고…….”
제네비브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당장 부모님께 약속할 수 있는 게 너무나 빈약했다. 고작 이런 걸로 두 사람의 마음이 놓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정말 가고 싶은 거니?”
달링 후작부인이 씁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숨을 깊게 내쉰 그녀는, 달링 후작과 미묘한 눈빛을 교환했다.
“네…….”
너무나 사소하고 작은 다짐과 약속을 나열하던 제네비브가 대답했다.
‘……통한 건가?’
‘안 된다’라는 답은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은 어쨌든 고려해 보겠다는 의미였다.
좋은 신호였다. 근심 가득한 얼굴만 보면 안 될 것 같았지만, 희망은 가져도 되었다.
“상의를 조금 해 보마.”
달링 후작이 어렵게 말했다. 제네비브는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그가 달링 후작부인을 설득해 줄 것 같아서.
“늦었으니, 들어가서 좀 자렴.”
달링 후작부인이 말했다. 제네비브는 모친이 바라는 대로 집무실을 나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제네비브는 세인트 존 칼리지로 보낼 편지를 작성했다.
간단히 다시 한번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는 말과 이번엔 유급 제안을 승낙하겠다는 의사를 작성한 제네비브는 편지를 밀봉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제네비브는 밀봉한 편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에드워드의 감정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여자 주인공으로 인해 그가 돌아 버리는 일에 대해선 걱정을 덜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 감정이 영원불변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씁쓸하기도 한편 조금 편하기도 했다. 마음을 자각한 것도 고작 오늘 있었던 일이니, 이 정도 감정이야 알아서 추스르면 되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거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 때도 아니지.’
제네비브는 객관적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그렇게 대단한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여름 동안 어떻게 에드워드와 마음이 통한다 하더라도, 에드워드가 여자 주인공과 만나면 원작의 흐름대로 그녀에게 호감을 느낄 확률이 높았다. 이런 감정은 빨리 죽일수록 이득이었다.
“난 그냥 옆에서…… 관리만 잘해 주면 되겠지.”
그게 자신이 할 일이었다.
* * *
모두와 함께 가졌던 저녁 식사와 다르게, 아침은 개별로 먹었다.
에드워드는 이젠 제법 익숙해진 극진한 시중을 받으며 자신이 카르디르를 오며 한 일이 얼마나 없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평민으로 살았을 때 느꼈던 무능함과는 결이 다른 무능함이었다.
스스로 간단히 할 수 있는—가령 지금처럼 옷을 입는—일마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고, 외교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렸다.
애초에 자신이 사절단에 합류한 이유가 아본리아의 새로운 후계자를 소개하기 위함이니,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해낸 것일지도 모른다.
‘……고마워. 정말로.’
하지만, 에드워드는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 지위 덕분에 에드워드는 제네비브를 도울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제네비브는 기뻐했다.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침을 끝마친 에드워드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별관 응접실을 돌아다녔다.
‘머레이 백작이나 카르디르 대리인은 지금 즈음이면 달링 후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겠지.’
에드워드는 자신이 합류될 수 없는 회의를 잠깐 생각하다가, 어제 만난 제네비브와 한 대화를 곱씹었다.
‘조금 마른 것 같던데.’
에드워드가 제 손과 잠깐 닿았던 허리 감각을 생각하며 그녀가 그동안 못 먹은 게 아닌가 걱정하던 사이, 달링 후작부인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달링 후작부인은 마치 에드워드가 이곳에 있을 걸 예상한 듯 매끄러운 인사를 건넸다.
“잠자리는 편하셨습니까.”
달링 후작부인이 물었다. 아본리아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리, 경계심은 누그러진 것 같았다.
“후작부인께서 많이 신경 써 준 덕분에 편했습니다.”
에드워드의 대답 이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간간이 창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를 제외하면, 둘 중 어느 소리도 안 들렸다.
먼저 입을 연건 달링 후작부인이었다.
“……제 여식이 세인트 존 칼리지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네.”
설득이 된 건가? 제네비브는 알고 있을까? 에드워드는 들떠지는 자신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래서, 전하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달링 후작부인이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미로서 하는 부탁이기도 합니다.”
“…….”
“부디, 제 딸이 위험한 일에 휩쓸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달링 후작부인이 말했다.
“그 애는 제 세상의 전부예요. 기실 안 갔으면 좋겠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잖습니까. 제국에서 황태자의 직위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지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전하를 믿고, 제 아이를 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