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03화
하지만 그를 믿겠다고 말한 사람치고 달링 후작부인은 불신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마치 제국 내 불안한 에드워드의 입지를 진작 꿰뚫어 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건, 필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일 테다.
에드워드는 달링 후작부인이 저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훌륭하게 잡아채 들려주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비록 의도한 것과 달리, 목소리에서 자신감은 떨어졌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제 소리를 들은 에드워드는 속으로 자책했다. 하다못해 들리는 것만큼이라도 신뢰를 줘야 했지만, 달링 후작부인은 그 알량한 의도조차 간파한 것 같았다.
“……제가 아닌, 제국에서 황실이 지니는 힘을 신뢰해 주시길 바랍니다. 부인.”
그 실수 하나로 마음이 바뀔까 싶어, 에드워드는 일견 절박하게 보일 정도로 말을 덧붙였다.
지금까지 ‘에드워드’는 그리 큰 믿음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에드워드 블렛’은 달랐다. 차가운 현실이었지만, 에드워드가 앞으로 차근차근 개선해야 하는 과제기도 했다.
에드워드는 말을 마친 직후, 달링 후작부인을 빠르게 관찰했다.
황실이 주는 인상이 확실히 다른지,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하는 중이라는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옅은 호선을 그린 입매를 보자니 블라이스 백작이 연상되기도 했고, 제네비브의 부드러운 미소가 누구로부터 물려받았는지 알게 되었다.
누군가로부터 숱하기 봐 온 익숙한 미소를 보며, 에드워드는 그게 안도감에서 파생되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뇨, 전하를 믿겠습니다.”
그리고, 달링 후작부인은 의외의 말을 건넸다.
“잠시나마 전하를 불신하여 죄송합니다. 그런 상황을 겪었기 때문에…… 말 몇 마디를 듣는 걸론 쉽게 안심되지 않네요.”
“…….”
“나이를 먹고, 자식을 키우다 보니,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걱정이 전부 사라졌다고는 못 하겠으나…… 칼리지에 전하가 계시다면 마음을 조금이나마 놓을 수 있겠지요.”
달링 후작부인이 전보다 부드러워진 어투로 말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에드워드가 답했다.
“말씀이라도 감사해요. 이른 아침부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실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어요. 부디 녹서스에서 남은 시간을 편하게 보내시기를.”
“아, 아닙니다. 대화 나눠서 즐거웠습니다.”
에드워드는 예의 바른 컷시를 하는 달링 후작부인을 보며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히는 실수를 범했다.
* * *
제네비브가 부모님의 허락이 떨어졌다는 걸 알게 된 건 에드워드와 달링 후작 부인의 대화가 끝나고 몇 시간 뒤였다.
고민은 아침에 마저 이어 가면 된다는 생각과 다르게 제네비브는 침대 위를 한참 뒤척이다가 겨우 잠에 들었다. 하루를 늦게 마무리하는 사람이 대부분 그렇듯, 오늘 제네비브의 하루는 늦게 시작됐다.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잠에서 허덕이던 그녀를 깨운 건 다른 것도 아닌, 한 손에 쥔 채 잠들었던 편지 봉투였다.
“……맞다. 설득.”
잠결에 편지를 살짝 구기던 제네비브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제 잠들기 직전까지 생각한 덕분에 의식의 흐름은 어렵지 않게 원위치를 찾아갔다. 제네비브는 차라리 자각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호감을 애써 무시하며 당장 급한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제네비브가 내린 결론은 당장 부모님의 심리를 파악하는 거다.
도출한 결론으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찬성으로 마음을 기울인 것 같으면 그 선택을 빨리하게끔, 반대가 되어 가는 것 같다면 선택을 미루게 하여 자신이 설득할 시간을 벌 수 있게끔 만든다.
‘어떤 식으로 설득을 하지? 어제는 내 무능함을 호소했으니까, 오늘은 칼리지에서 내가 얼마나 유능할지 얘기해야 하나.’
하녀의 시중을 받는 와중에도 제네비브의 머리는 빠르게 계획을 세웠다.
제네비브는 부모님을 찾아가려고 했지만, 그들이 먼저 딱 맞춰 제네비브를 불렀다. 그녀는 주머니 안에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시종의 뒤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어제와 같은 집무실이었다. 제네비브는 시종이 문을 두들겨 제가 왔음을 알리고,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문이 열리는 모습을 보았다.
낮의 집무실은 밤과 다른 느낌으로 화려했다. 어제와 다르게 단아한 오후 실내 드레스를 입은 달링 후작부인은 또 어제와 마찬가지로 달링 후작과 함께 같은 소파에 앉았다. 제네비브 역시 전날 밤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
제네비브의 예리하면서도 무딘 직감은 부모님이 결론을 내렸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두 분이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까진 알아내지 못했다.
‘만약에 반대하면 설득은 할 수 있으려나…….’
두 사람을 무조건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없었다. 블라이스 저택에서 나누던 답답한 대화가 재현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니 제네비브는 우선 두고 보며, 두 사람이 어떤 결정을 지었는지 기다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한차례 ‘잘 주무셨어요?’와 같은, 무의미한 대화를 주고받은 제네비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체하며 두 사람을 보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제네비브는 답을 알고 있음에도 예의상 물었다.
“어제 너와 얘기를 나누고, 생각을 좀 해 봤다.”
달링 후작이 말했다.
설마하니 곧바로 본론이 나올 줄 몰랐다. 제네비브는 침착하게 “네.”라고 대답하곤 두 사람이 내린 선택을 기다렸다. ‘가면 안 된다’라는 대답이 나오면 무조건 반대하기로 마음먹은 채.
“……너를 보내기로 했단다.”
“아빠, 저는 칼리지를 정말 가고 싶…… 네? 아니, 가도 된다고요?”
마음속 깊은 곳에선 그들이 저를 보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당장 반박하려던 제네비브는 조금 늦게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래.”
만약 이런 상황이 온다면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곧바로 실감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제네비브는 모친의 말을 듣자마자 그 즉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긴장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당최 언제부터 했는지 모를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얼굴은 손쓸 새도 없이 안도의 미소로 번졌다.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다. 못했던 졸업을 마저 끝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드워드를 도울 수 있어.’
그의 곁에 남을 수 있다. 만약 원작의 거대한 파도가 다른 방향에서 밀려왔을 때, 그를 도울 수 있다.
“정말 고마워요. 두 분 모두…….”
제네비브는 부모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달링 부부에게 감사를 전한 제네비브는 허공을 보며 이시스 여신에게도 짧은 감사 기도를 올렸다.
“대신, 조건 몇 가지가 있단다.”
하지만, 부모님은 아직 할 말이 끝나지 않으신 듯했다. 무조건적인 허락이 떨어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제네비브는 할 말을 기다렸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 즉시 카르디르로 돌아와야 한다.”
“네.”
제네비브는 반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웬만해선 주말 외출은 삼가하거라.”
“네 아버지 말은, 수도에 발을 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란다.”
달링 후작부인은 요점만 말하는 남편의 말을 보강했다.
“알았어요.”
“되도록 칼리지에서 보내거나, 블라이스 영지 정도는 괜찮겠구나.”
“어차피 저는 주말 외출도 잘 안 하는 편인 거 아시잖아요. 걱정 마세요.”
칼리지 학생들이 밥 먹듯이 가는 빌젠가마저 제네비브는 방문한 적이 극히 드물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하는 얘기지…… 크게는 이 정도 있겠구나. 해 줄 수 있겠니?”
“그럼요.”
제네비브는 즉시 대답했다.
“많이 번거로울 테고, 왜 이러나 싶은 것도 있을 게야. 이 아비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제네비브 네가 잘 이해해서 고맙고 기특하구나.”
달링 후작은 제네비브의 손등을 토닥였다.
“아, 괜찮아요. 저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걸요…….”
제네비브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이제 칼리지에 편지를 보내 볼까?”
“아……! 그건 이미 써 놓았어요.”
제네비브는 주머니에서 어제 쓴 편지를 허둥지둥 꺼냈다.
밤새 손에 쥐고 있던 탓에 봉투는 누구에게 보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다시 쓰는 게 좋겠다는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제네비브는 세인트 존 칼리지에 보낼 편지를 작성했다.
새로운 편지지 뒷면에 세인트 존 칼리지 주소를 쓰고, 녹색 밀랍에 달링 가문의 인장까지 찍은 제네비브는 그제야 제 어깨를 짓누르던 국가시험에 대한 압박감에서 해방되었다.
이 기쁜 소식을 에드워드에게 전하고, 그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에드워드는 언제 오지?’
하지만,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쉬이 만나지 못했다. 별관 응접실에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제네비브는 2층에서 내려온 하녀에게 그의 행방을 물어야만 했다.
“2층 응접실에서 같이 오신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어요.”
하녀가 말했다. 그녀는 진지한 얘기 같았다며, 세 사람이 공용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제네비브는 결국 본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진지한 대화가 오가는 상황이라면 제아무리 자신의 집이더라도 상대가 직접 권하지 않는 이상, 건물 안에서 기다리는 건 모양새가 이상했다.
“…….”
그리고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기다리며 반강제적으로 자신이 이 시간을 얼마나 설레며 기다렸는지 깨달았다. 기다리는 건 지루하지 않았다. 에드워드를 곧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떨림이 더 컸으니.
이건 대충 ‘유급의 기쁨’이나 ‘고마움’ 정도로 얼버무릴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지금 제 모습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깨달은 제네비브는 이마를 짚었다. 감정을 죽여야 하는 상황인데, 에드워드의 얼굴을 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이 너무나 한탄스러웠다.
이 마음을 빨리 접을수록 미래의 자신이 고생을 덜 하는데.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게 이토록 복잡한 일인지 몰랐다.
‘만약 소설의 전개대로 흘러가게 된다면 에드워드도 얼마나 부담스럽겠어.’
그러다가 관계가 멀어지기라도 하면 여러 방면으로 낭패였다.
“감정 같은 건 빨리 없애고, 그럴 때까지 티 내지 말자.”
제네비브는 작게 중얼거렸다.
친한 선후배, 아니, 이제는 동급생 관계로. 적당히 친근한 선을 유지하고, 원작 여자 주인공이 나타나면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선을 유지하면 된다.
방에서 ‘마음 접는 건 쉽다’를 10초에 대여섯 번 반복하던 제네비브에게 헬렌이 다가와 에드워드가 떠날 채비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애초에 사절단이 하루를 타지에서 머문다는 것 자체가 예외적인 일이었지만, 그가 금방 떠난다는 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이미 마차는 바쁘게 짐을 옮겨 싣는 중이었다. 달링 후작과 후작부인은 왕실 대리인과 에드워드의 동행인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조금 주워들었지만 대부분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
마차 앞에 가만히 선 에드워드는 저와 함께 온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고 있었다.
“녹서스에서 보낸 밤은 어떠셨나요?”
얼마나 몰두하고 있었는지,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말을 걸고 나서야 그녀가 주변에 있음을 알아챘다.
“……아. 제네비브 선, 제네비브 양.”
그로선 갑작스럽게 다가온 것인지, 에드워드는 당황하며 제네비브의 호칭을 수정했다. 어제부터 몇 번이고 들었던 호칭이지만,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밤바람이 적당히 시원하고 공기가 맑아서 좋았어요.”
에드워드는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크기로 나긋하게 말했다.
“자연이 주는 부채라니까. 대신, 겨울에는 엄청 추워.”
“겨울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리스톨은 염분 때문에 공기에서 짠맛이 나서…… 창문을 오래 열어 두면 텁텁하더라고요. 제가 조금 예민한 편이기도 하지만.”
리스톨 공기를 회상하기라도 했는지, 에드워드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근데 선배, 그 제안은 어떻게 되었어요?”
에드워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부모님이 허락했어!”
제네비브는 마치 기다려 왔던 질문이 나왔다는 듯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드워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주변에 있으니 최대한 고상하게 말하려 했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편지 이미 한 시 정도에 해서 걱정 안 해도 되고, 혹시 몰라서 아본리아 방문할 때 세인트 존 칼리지에 사람을 보내려고 해.”
제네비브는 자랑스럽게 자신이 세운 계획을 말했다.
“어제도 말한 거지만…… 정말 고마워.”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선배가 잘해서 가능했던 거죠.”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한껏 공을 돌렸다.
“네가 한 말이지만, 너무 공손한 거 알지?”
제네비브는 또 멍청하게 두근거리려는 걸 느끼며 분위기를 풀었다.
“알죠.”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슬슬 마차에 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따라 에드워드도 마차에 몸을 실었다.
“내가 잘했어도 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그러니까, 고마워.”
제네비브는 마차를 탄 에드워드에게 말했다. 그는 민망한 듯 귓가가 붉어졌다.
“우리, 곧 만나요.”
마차가 이제 떠나려는 듯하자, 에드워드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감정을 죽이겠다고 한 다짐이 무색하게, 에드워드를 마주하니 기분이 위험할 정도로 좋아졌다.
* * *
아본리아 황자는 그가 한 말을 지켰다. 책봉식 초대장은 에드워드가 녹서스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링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블렛 황실 인장이 찍힌 초대장을 본 달링 후작 부부는 제네비브가 예상한 것과 다르게 제법 성숙하게 행동했다.
일정을 확인한 두 사람은 언제 떠난다는 말을 제외하면 언급을 최대한 삼갔다. 제네비브는 식사 때마다 걱정과 불평을 말하던 때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적당한 거절 사유가 없었던 달링 가문은 아본리아로 가야만 했다.
“책봉식 기간에만 머무는 게다.”
달링 후작은 다시금 기간을 상기시켰다.
국가적 비극으로 인해 침체된 분위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황실은 유례없는 규모로 책봉식을 기획했다. 무려 일주일이나 지속되는 축제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제네비브는 자신이 그야말로 연회를 원 없이 참석할 것을 알았다.
‘아본리아에 지내는 동안, 내 얘기 좀 사그라졌으면 좋겠다.’
제네비브는 블라이스 백작저로 향하는 마차의 규칙적인 진동을 느끼며 생각했다.
‘약혼하고, 파혼하고, 입학하고, 제적되고…….’
그중 파혼과 제적만 하더라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텐데. 더 나아가 소문의 주인공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니, 사교 시즌 내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카르디르 연회에 참석하며 졸업하지 못한 것에 대한 동정의 눈빛과 사람을 향해 총질했다는 소문에 오르내릴 바엔 아본리아에서 ‘황태자 구하기’에 힘을 쓴 사람이 되는 게 나았다.
‘만약 내가 한 일이 전부 밝혀졌다면…….’
카르디르나 아본리아나 거기서 거기일 테다. 에드워드의 어려운 배려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 몰랐다.
달링 가문은 아본리아에 오면 언제나 그렇듯 친척인 블라이스 가문의 타운하우스에서 머물렀다.
“와, 제네비브. 너 정말 나한테 오라버니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이 너그러운 몸은 선배도 괜찮단다.”
유급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오웬은 실없는 소리를 한없이 진지하게 했다.
“아, 좀. 미련 좀 버려.”
오웬은 제네비브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나서야 오빠 타령을 그만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대해 주는 오웬을 보자니 마음이 놓였다.
“그래, 그래~ 갑자기 호칭을 바꾸면 부끄러울 수도 있지. 이따 블랑카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오웬은 자연스럽게 외출을 권유했고, 거절할 생각이 없었던 제네비브는 당연히 응했다.
하지만 달링 후작부인과 블라이스 백작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제네비브가 오웬과 외출하겠다고 말하자, 그들은 썩 내키지 않은 것 같았다.
여섯 시 이전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제네비브와 오웬은 타운하우스를 나올 수 있었다.
“블랑카!”
“진저!”
제네비브는 블랑카를 끌어안았다.
한 달 만에 만나는 그녀는 많이 변했다. 블랑카는 학기 동안 쇄골 아래까지 자란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잘라, 단발이 돼 있었다.
“머리 잘랐네?”
“어때? 어울려?”
블랑카가 자랑스럽게 머리카락을 넘겨 보았다. 빛을 받아 유독 붉게 보이는 머리는 그녀와 잘 어울렸다.
세 사람은 커피 하우스까지 가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었다.
블랑카는 여름 내내 아본리아에 머무를 것 같다고 말하며, 당분간 호텔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투덜거렸다(오웬은 그 말을 들으며 “남들이 들으면 욕한다.”라고 블랑카를 나무랐다).
블랑카는 제네비브와 오웬과 마찬가지로 황태자 책봉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직접 초대 받은 게 아니라 몇 다리를 걸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블랑카는 에드워드에게 개인적으로 초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오, 그럼 우리는 다 가는 거네?”
오웬이 말했다. 여기서 ‘우리’란 이곳에 있는 세 사람뿐만 아니라 제임스까지 포함했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테이블에선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제임스는 잘 있어?”
제네비브는 잠시 망설이다, 껄끄러운 주제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