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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105화 (105/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05화

황태자 책봉식 연회는 그날 저녁에 열렸다.

길목마다 보이는 사람들은 새 황태자의 등장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제네비브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민심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다. 귀족의 지지가 부족할지라도 국민의 지지가 있으니, 크게 엇나가지만 않으면 에드워드는 황실에 잘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부분을 내가 도와줘야 하는 거고.’

원작대로 흘러가면 전부 부질없는 짓이지만. 제네비브는 스스로 다시 다짐하며 하녀들의 손길을 받았다.

새벽부터 책봉식을 준비했음에도 부족하다는 듯, 그녀는 타운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책봉식 연회를 위한 준비를 했다.

“……조금 편하게 가면 안 되겠지?”

욕조에 들어간 제네비브가 물었다.

“아가씨도 참, 농담도 잘하세요.”

“이건 아본리아 건국제보다 훨씬 중요하고 큰 행사예요!”

“맞아요. 아가씨께서 가장 빛나야 한다고요. 제니, 거기 향유 좀 가져와 줘.”

주인의 질문 하나에 하녀들은 성을 내며 그녀가 완벽해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모든 주목이 황태자에게 쏠리는 책봉식과 다르게, 연회는 누구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20분 만에 끝난 책봉식과 달리, 연회는 밤새 이어지니 그곳에서 제네비브가 제일 눈에 띄어야 한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게다가, 잘만 하면 황실과 연이 생길지도 몰라요.”

하녀 중 하나가 여상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어? ……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대화의 흐름이 황태자에게 직접 초대 받은 이야기로 흘러가려고 하자, 제네비브는 재빨리 대화를 끊었다.

조금 민망해졌다. 하녀들에겐 기분 전환이 되는 가벼운 망상이겠지만, 제네비브에겐 나름 정곡이 찔리는 이야기였기에.

마이언 아카데미에서 받은 관리보다 훨씬 길고 지루한 과정이 이어졌다. 하녀들은 그녀의 몸에 귀한 향유를 아낌없이 붓고,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꼬아 대며 얼굴에 분칠을 했다.

제네비브가 카르디르에서 가져온 녹색 연회용 드레스를 입고, 블라이스 백작부인이 빌려준 다이아몬드 티아라와 귀걸이까지 걸치니 하녀들은 저들이 만들어 낸 작품에 감탄하며 각자 칭찬을 했다.

원래도 아름답지만 꾸미니 훨씬 빛난다는 둥, 대륙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라는 둥, 입바른 칭찬 굴레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제네비브는 탈출하듯 1층으로 내려갔다.

가장 오래 걸린 사람이 자신이었던 건지, 이미 준비를 끝낸 가족들이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제네비브가 사과했다.

“많이 안 기다렸단다.”

블라이스 백작부인이 말했다.

한참 제네비브를 보던 그녀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티아라가 꼭 너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구나.”

“아니에요. 그래도 숙모님께 더 잘 어울리는걸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오웬이 능글맞은 미소로 한마디 하려고 했으나, 블라이스 백작부인이 노련하게 부채로 그의 손등을 때리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래도 잘 보였으면 좋겠네.’

제네비브는 창문에 비친 제 음영을 보며 생각했다. 격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닌,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민 건 오랜만이었다.

“이번 건 진짜 아팠어요.”

“진정으로 다쳤다면 황궁에 의사는 널렸으니, 걱정 말고 마차에나 타렴.”

“황실 의사는 저를 죽이지 않을까요?”

티격태격하는 블라이스 모자의 대화를 들으며, 제네비브는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수도 중심에 있는 황궁까지 빠르게 도착했다.

제네비브는 인파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강대한 제국의 시작점이라고 봐도 무방한 황제궁은 조금 둘러보기만 해도 그 구조가 복잡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호위병이 없었으면 길을 잃었을 거야.”

—라고, 연회 중간에 만난 블랑카가 말했다.

다행히 손님이 실수로 들어갈 법한 곳은 호위병이 가로막고 있어, 작정하는 게 아닌 이상 길을 들어서는 건 불가능했다.

연회는 제국의 명성과 행사의 색채에 걸맞게 화려했다. 자칫하면 미끄러질 정도로 관리가 잘된 대리석 바닥이나 연회장 구석구석을 비추는 거대한 샹들리에까지. 벽엔 한눈에 봐도 복잡한 태피스트리와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가 걸렸다.

연회장 중심은 당연히 황족이 장식했다. 푹신해 보이는 붉은색 벨벳 소파에 앉은 황제 부부와 에드워드는 귀족들로부터 인사를 받고 있었다. 에드워드를 어떻게 생각하건, 귀족들은 최대한의 예를 다해 새로운 황태자에게 본인과 가문을 소개했다.

인사는 끝이 안 보였다. 어느덧 블라이스 가문의 인사가 끝나고, 블랑카와 그녀의 아본리아 친척들이 인사를 마친 다음, 달링 가문의 차례가 되었다.

인사를 위해 황족이 있는 곳까지 가려니 긴장이 되었다. 제네비브는 부모님의 뒤를 따라 에드워드를 향해 천천히 발을 뻗었다.

계속해서 엇비슷한 인사를 들은 에드워드의 눈에선 깊은 피로감이 읽혔다. 하지만,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

그런 그와 눈을 마주쳤을 때, 제네비브는 미약하지만 그의 표정이 밝아진 걸 보았다.

제네비브는 자신이 에드워드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데 너무 기뻐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무리 반가워도 지금은 황족 앞이고, 모든 귀족이 주시하고 있었다.

미리 언질 받은 대로 달링 가문은 가장 기본적인 제국식 인사를 했다.

“카르디르 왕국 아서 달링과 레베카 달링의 딸 제네비브 달링이 제국의 태양과 달, 그리고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이시스 여신의 무한한 축복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달링 후작 부부의 인사 뒤로 제네비브가 말을 끝맺었다.

“여신의 은혜가 언제나 함께하기를.”

이반 황제가 말했다. 세 사람은 감개무량하다는 듯 허리를 굽혔다.

“제국이 네게 큰 빚을 지었네.”

이제 정해진 대로 물러나려던 달링 가문은 황제의 한마디에 걸음을 멈췄다.

“부디, 즐거운 연회가 되길 바라오.”

그는 공공연하게 제네비브를 추켜세웠다. 예상하지 못한 인사에 제네비브는 조금 부담스럽다는 생각과 함께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연회는 귀족들의 인사가 전부 끝나고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제 황태자가 된 에드워드는 모두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와 말 몇 마디 나누고 싶었으나, 마이언 때의 기시감을 느끼며 후퇴했다. 또한 큰 사건을 겪은 에드워드의 주변에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 자신이 있으면 어렵게 사그라트린 소문에 불을 지피는 꼴이었다.

“아……!”

후퇴하듯 정신없이 앞을 안 보고 걸어간 탓일까, 제네비브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신발 굽에서 느껴지는 말캉한 감각과 눈앞에 있다 못해 너무 가까워서 그게 무엇인지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는 검은색 시야, 그리고 이마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감각에 제네비브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죄, 죄송해요. 괜찮…….”

하지만, 제네비브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음료를 흘린 것 말고는 괜찮네요.”

“…….”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시온 헤이븐이었기 때문에.

분명 흰색이었을 안쪽 상의가 붉은색으로 얼룩졌다.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그가 음료를 대충 닦아 냈다.

“음, 오랜만입니다. 제네비브.”

이어 시온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연회 성격에 맞춰 고른 고급 제복을 입은 그는 여전히 잘생겼다. 원작이 곧 시작되려고 해서 그런 건가, 아니면 남자 주인공이어서 그런 건가.

그가 잘생겨진 이유를 추론하던 제네비브는 곧 그게 쓸모없는 생각임을 깨달았다. 창백한 피부와 시커먼 머리카락을 가진 그가 이런 화사한 연회장에 있으니 어딘가 이질감이 들었다.

‘확실히 피폐 소설의 남자 주인공은 생김새도 장르에 맞춰 피폐하네.’

제네비브는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짧은 감상평을 내렸다.

“그새 저를 까먹은 건가요?”

제네비브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며 저를 ‘잊었다’라고 생각했는지, 시온이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소설의 주인공인데, 어떻게 그를 잊을 수가 있을까.

“까먹을 리가 있나요. 마이언에서 본 이후로 처음이죠?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조정 경기장에서 다른 여자랑 키스하고 있었지……. 제네비브는 말을 삼켰다. 설령 그녀가 원작을 읽지 않았더라도 시온은 꽤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선사했다.

얼굴에서 당시를 회상한 게 드러났는지, 시온은 굳어 가는 제네비브를 보며 호쾌한 웃음을 보였다. 연회장을 가득 채우는 선율 때문일까, 그 웃음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음악처럼 들렸다.

“괜찮으면 저와 한 곡 추시겠어요?”

그가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시종의 쟁반 위에 잔을 올려놓으며 손을 내밀었다.

“제복이 더러운 나를 다른 사람이 상대해 주긴 하려나…….”

제네비브가 선뜻 답하지 않자, 시온이 불쌍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말했다.

자신이 이런 상황을 초래한 건 사실이었기에 제네비브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그의 춤 신청을 받아들였다.

“연회는 어떻게 온 거죠?”

“음, 우리 가문이 황실과 혈연관계라?”

시온이 제네비브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말했다.

“책에선 안 나오던데…….”

“책이 모든 걸 알려 주진 않으니까요. 졸업생으로서 앞으로 당신 모교를 다닐 후배에게 해 줄 만한 덕담은 없나요?”

시온이 말했다.

“……졸업 시험은 빠지지 말고 보자?”

제네비브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덕분에 유급할 수 있어 불행이 만든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당시엔 아쉬웠던 건 사실이었다.

“되게 뼈 있는 말이네요. 경험담 같은데.”

시온이 말했다.

어차피 학기가 시작되면 알게 될 거, 제네비브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맞아요. 마지막 날 하루 놓쳤더니, 졸업은 꿈도 못 꾸게 되었어요. 엄밀히 말하자면 저는 이제 헤이븐 군 선배가 아니라, 동급생이죠.”

“그럼 말 놓을래요?”

“…….”

“아, 미안해요. 농담이었어요.”

제네비브가 대답 없이 째려보자, 시온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생각난 건데. 당신에게 서운한 게 있어요.”

시온이 그다지 서운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뭔데요?”

뜬끔 없는 원망을 들으며 제네비브는 그의 리드를 따라 스텝을 밟곤 물었다.

“소문이요. 그때 보신 거, 소문 내 줄 거라고 믿었는데…….”

시온이 눈초리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소문 내는 데 취미가 없다고 말했을 텐데요. 그리고, 그런 소문은 안 도는 게 낫지 않아요? 새롭게 시작할 수 있잖아요.”

감사가 아닌 원망을 듣게 된 제네비브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아뇨, 덕분에 칼리지 생활이 번거롭게 되었습니다.”

“…….”

시온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헤이븐 가문 아들이 바람둥이고, 이제 곧 칼리지로 오니, 어떻게 한 번 해 보라는 소문을 냈어야 했나요?”

제네비브는 살짝 비꼬듯이 물었다.

“그래 줬다면 좋았죠.”

시온은 간결하고 당당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미친…….’

그를 보자니 소설에서 에드워드가 여자 주인공이 시온과 거리를 두길 바랐던 게 이해가 됐다.

원래 이렇게 가벼운 사람이었던가? 자신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또 다시 알리기가 귀찮은 건가? 가볍다는 소문이 한 번 돈 뒤에 와서, 미리 치정극을 피하고 싶은 건가?

원작 속 자세한 디테일은 진작 까먹은 제네비브는 입을 떡 벌렸다.

“하아…….”

“입에 벌레 들어가겠습니다.”

시온이 가볍게 말했다.

제네비브는 시온을 획 올려다봤다. 이미 실체를 알고 있어서 그런가, 그는 그러한 소문이 나길 바라는 사람치고는 개수작을 부리는 것 같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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