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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106화 (106/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06화

홀릴 듯한 외모 때문일까. 시온의 얼굴은 가만히 있어도 상대를 유혹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그의 말이나 행동에서 자신을 꼬드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타입인가?’

저 얼굴만 보고, 여자들이 알아서 꼬이는 거고?

하지만 그렇다고 단정 짓기엔 처음 마이언에서 시온을 만난 날, 그는 그녀에게 과할 정도로 미소를 많이 지었다.

지금 이걸 유혹 전략이라고 하기엔 시온은 바람둥이가 즐겨 하는 화법을 제네비브에겐 일절 하지 않았다.

‘나에겐 실체가 밝혀져서 그런 거겠지.’

이미 가벼운 태도를 보였으니, 제게 시간을 투자해 봤자 손해라고 판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텐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예정인가요?”

그녀는 이 영양가 없는 대화에 집중하지 않기로 했다. 제네비브는 시온이 어디까지 하려는지 가늠하듯 물었다.

“……그래야겠죠? 누구 덕분에.”

시온이 원망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제네비브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당사자가 제 험담을 내라고 종용하는 이 상황이 웃기기만 했다. 누군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제네비브 때문에 시온이 어쩔 수 없이 문란한 생활을 이어 가게 되었다고 생각할 테다.

‘본인의 치부를 밝히지 않은’ 것을 탓하는 모습이 짜증 날 법도 했지만 시온이 진심 없는 가벼운 질책처럼 말해서 그런가, 아니면 대화에 집중하지 않기로 해서 그런가, 이상하게도 기분은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저로선 정말 이해가 안 되지만, 정 소문이 퍼지길 원하면 학기 초에 얘기하고 다닐게요. 그러면 되죠?”

제네비브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화법으로 말했다.

“아뇨, 그 소문은 미리 퍼져야 했어요. 지금은 늦었습니다.”

‘그때 소문이 퍼지나 지금 소문이 퍼지나, 여자를 만나는 건 비슷할 텐데…….’

원작에 따르면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만나서야 과거를 후회하는 게 핵심이었다. 유치하게 ‘소문이 퍼지는 시기가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제가 왜 이러는지 궁금한가 봅니다.”

제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시온이 기민하게 물었다.

“별로…… 안 궁금해요.”

“동급생한테 너무 무심하군요. 섭섭합니다.”

“아직 학기는 시작도 안 했어요, 헤이븐 군.”

제네비브는 서운한 표정을 꾸며 내는 시온을 무시하며 스텝을 밟았다. 그러자 시온은 자연스럽게 제네비브를 서포트 했다.

황실과 혈연관계라는 말은 거짓이 아닌지, 그의 춤 실력은 뛰어났다. 시온은 기름을 바른 것처럼 미끄러운 바닥을 유유히 가로지르며 제네비브를 이끌어 갔다.

보아하니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왜 내 뒷담을 까고 다니지 않았냐’를 질책하기 위함인 듯하고, 할 말은 끝난 듯 보이니, 이젠 남은 시간을 조용히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본리아에서 첫 춤은 보통 약혼자와 춘다는 걸 아시나 모르겠습니다.”

이젠 한결 조용히 춤을 출 수 있겠구나 싶던 차에 시온이 다시 말을 걸었다.

‘여자를 유혹할 때 하는 말인가?’

제네비브는 경계심을 잔뜩 세우며 그를 보았다.

“아니면, 서로 관심이 있는 미혼 귀족들이 춤을 추죠.”

“저는 헤이븐 군에게 관심이 전혀 없어요.”

제네비브는 사전에 그를 차단했다.

“원래는 제 사촌과 추려고 했거든요.”

제네비브는 연회장 끄트머리에 있을 오웬을 생각하며 말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군요.”

“네? 누가…….”

“저기, 황태자 전하도 그렇고.”

시온의 보라색 눈이 제네비브 머리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갑자기 왜 에드워드가 언급되는지 모르겠다는 듯 시온을 보자, 그는 제네비브가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자리를 옮겼다. 덕분에 제네비브는 오른편에 있는 에드워드를 곁눈질할 수 있었다.

“…….”

한순간에 지나갔지만, 의자에 앉아 연회장을 보던 에드워드는 왜인지 조금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둘이 많이 친한가 봐요? 마이언 아카데미에서도 친밀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냥 친구예요.”

“황태자 전하께선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말이죠.”

“……헤이븐 군은 황태자 전하께 관심이 지대한 모양입니다.”

자꾸 제게서 무언가를 캐내려는 하는 듯한 어조에 제네비브가 말했다.

자연스럽게 언급되는 에드워드,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 누가 보더라도 에드워드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의 태도였다.

“그렇게 보이나요.”

순간, 시온이 목소리를 낮췄다. 계속 뜬구름을 잡으며 일관된 헛소리를 하던 그가 일순간 낮은 목소리로 말하니 곧바로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시온은 제네비브를 잡아 한 바퀴를 돌며 그녀와 거리를 가까이했다.

“…….”

보라색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차가운 눈빛을 띠는 그를 보며 제네비브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달링 양께서 괜찮은 사람인 것 같으니, 이야기해 드리죠.”

“…….”

“아본리아 황족과 가까이하지 마세요.”

시온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황족이 된 이상 그가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아주시기를.”

“…….”

제네비브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시온은 깔끔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몸을 원위치시켰다.

“……그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입니다. 더 덧붙이자면…… 환경은 사람을 쉽게 바꾸니까요.”

시온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어 갔다.

“주변 사람이 끼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죠. 그런 환경에 있는 사람의 눈엔 안 띄는 게 좋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시작이 조금 안 좋긴 합니다만―.”

“…….”

왜일까. 이상하게도 경고하는 시온에게선 아무런 적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뭐랄까― 조금 더 근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 같았다.

“솔직히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헤이븐 군이 황태자 전하를 오래 알았으면 모르겠지만, 알지도 못하는 그를 폄하하는 이유도 모르겠고요.”

하지만, 적대심이 안 느껴진다고 해도 그가 한 말이 악담이란 사실은 변함없었다.

“오늘 연회, 그리고 오전의 책봉식,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시온은 자기를 변호하거나 저가 한 말에 설명을 보충하는 대신, 또 다른 주제를 끌고 왔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지극히 평범한 연회였다. 황실이 주최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이한 것도 없었다.

“그건…… 다음에 말해야 할 것 같군요.”

시온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음악이 끝나자 미련 없이 제네비브를 놓았다. 춤의 시작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무릎을 살짝 굽힌 뒤, 멀어졌다.

“다음에 만날 땐 부디, 우리가 더 편한 관계가 되었길 바랍니다.”

시온이 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와 같은 가벼운 어투였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럴 것 같진 않지만. 제네비브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네비브는 걸음을 옮기며 방금 시온이 한 말을 생각했다. 리스톨에 올 때마다 수수께끼만 얻어 가는 기분이다. 왠지 모르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화였다.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말하는 게, 숙부님과 대화할 때의 느낌이었지.’

한 달 전, 황궁 정원에서 블라이스 백작과 나눴던 대화 분위기와 매우 흡사했다.

‘물론, 그때가 좀 더 ‘대화’하는 느낌이긴 했지만.’

적어도 대화 주제가 지금처럼 중구난방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연회가 이상하다거나, 에드워드를 피해야 한다거나, 했던 말을 떠올리며 제네비브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연회는 평범했다.

나이가 많은 각 가문의 수장은 춤을 추는 대신 자식을 감시했다. 한껏 아름답게 치장한 여자들은 풍성한 치마폭을 정리하며 남자들이 먼저 춤을 권유하기를 기다렸고, 남자들은 부모님의 등에 밀려 여자들에게 춤 신청을 했다.

또 한편에는 같은 파벌에 속한 이들과 대화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파의 간을 보려는 듯 가면을 쓴 채 날카로운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블라이스 백작, 또 제임스 카터가 있었다. 연회에 참여를 하나 안 하나, 라는 토론의 주제였던 친구의 안색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지만 전처럼 선뜻 다가가긴 어려웠다.

“…….”

그때, 파벌 구분 없이 섞이는 광경을 보며 제네비브는 미미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위화감의 출처는 과연 뭘까. 아리송한 기분에 제네비브는 답답함을 느끼며 답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한참 생각하던 찰나, 조금 전엔 눈에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하나둘 잡히기 시작했다.

제임스, 파벌, 줄어든 중앙 귀족의 수.

책봉식에서 느꼈던 위화감…….

제네비브는 같은 단어를 반복하며 질문의 답을 찾아내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제 뒤로 다른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달링 양.”

답이 보이려고 한 순간, 누군가 사고의 흐름을 방해했다. 머릿속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잡히려고 했건만, 그 방해에 단서는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제네비브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에드워드가 보였다. 생각을 방해한 이가 원망스러울 법도 했지만, 상대를 확인하니 존재하던 화마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저의 첫 춤 상대가 되어 주겠습니까?”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물었다. 능숙하게 뱉은 질문과 다르게, 그는 조금 긴장한 것 같았다.

“네. 그럼요.”

제네비브는 말꼬리를 조금 길게 늘어트리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제네비브가 그의 손을 맞잡고 걸어가자 주변이 웅성거렸다. 황태자의 첫 춤 상대. 황태자가 먼저 춤을 신청한 사람.

“저 소녀는 헤이븐 가문의 영식과 황태자 전하, 두 사람 모두와 춤을 추나 보군요.”

“제네비브 달링이잖아요. 그…… 콜린스 애한테 총을 쐈다는.”

“폐하께서 직접 인사까지 하셨죠.”

“황실과 인연이 있기라도 한 건가요?”

그녀와 에드워드의 관계를 추측하는 무수한 말소리가 들렸다.

“저한테 집중해요.”

제네비브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는 게 티가 났는지, 에드워드가 말했다.

“신경 안 쓰여?”

그의 부탁대로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보단 선배가 어떻게 들을지 더 신경 쓰여요.”

“…….”

갑자기 훅 들어오는 말에 제네비브는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나는 괜찮아. 없는 일을 얘기한 것도 아닌데.”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헤이븐과는 무슨 얘기를 했어요?”

잠시 뜸을 들이던 에드워드가 물었다.

“……별 얘기 안 했어.”

제네비브는 망설였다. 시온이 너를 피하라고 했고, 네가 위험하다고 말했다, 를 어떻게 알려 줄 수 있나. 얼버무리는 게 좋은 답변이 아님을 알곤 있지만, 원작에서 사이가 안 좋아서 그 사달이 났는데 그걸 앞당길 순 없었다.

“헤이븐 군이 이번에 우리 학교에 교환 학생으로 온다는데, 학교생활과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었나 봐. 몇 년 다닌 다녀 본 선배로서 궁금증을 해소시켜 줬지.”

제네비브는 최대한 함축적으로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니까.’

이어 제네비브는 생각했다.

‘……칭찬을 하는 게 좋으려나.’

짧은 생각을 마친 그녀는 이내 말을 덧붙였다.

“성실한 애 같더라고!”

제네비브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했다. 원작에서 에드워드는 시온이 바람둥이라 싫어했으니, 좋은 인상을 심어 줘서 나쁠 건 없을 거다.

“아, 그런가요.”

하지만 제네비브가 제가 한 대답에 만족하던 것과 다르게, 에드워드는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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