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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109화 (109/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09화

블랑카보다 이 일에 적합한 사람도 없었다.

제네비브가 라몬 황제의 군부 시절에 대해 잘 아냐는 편지를 보내기 무섭게, 블랑카가 그다음 날 곧바로 찾아왔다.

“블랑카? 너는 왜 온 거야?”

“따뜻한 환영에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구나.”

블랑카가 이를 콱 깨물며 말했다. 그 와중에도 뭉개지지 않는 발음이 대단했다.

“내가 불렀어.”

제네비브는 자연스럽게 오웬을 무시하곤 블랑카와 함께 타운하우스를 나왔다.

아는 게 많으며, 중간에 발을 빼지 않을 사람. 오웬만큼. 아니, 오웬보다 발이 더 넓은 가까운 친구.

“호텔에서 말해 주려는 거야?”

제네비브가 마차에 몸을 실으며 물었다.

“농담도. 네가 날 높게 평가해 주는 건 고맙지만! 아무리 나라도 다 아는 건 아니거든.”

“바로 알려 주려는 줄 알았는데.”

“진저, 나는 무세이온 도서관이 아니야. 정확히는 네가 궁금해하는 걸 알고 있는 누군가를 알고 있는 거지.”

블랑카는 이상한 말로 제네비브가 갖고 있던 작은 착각을 없앴다.

마차에 모두가 탄 걸 확인한 마부가 말을 몰았다. 허리에서부터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건 왜 알고 싶어 하는 거야? 설마, 황실에 입성하려고…….”

“블랑카, 제발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 줘.”

제네비브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농담을 농담으로 들을 수 있던 예전이 새삼 그리웠다.

“아, 하긴. 이제는 좀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었지……. 어쨌든, 좋은 얘기 들으려고 나한테 부탁한 건 아닌 듯하고.”

예리한 질문에 제네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밀포드가 엮인 이상, 좋은 얘기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왜 라몬 황제의 약점을 알고 싶은 거야?”

블랑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블라이스 가문이 아무리 황실과 적대적이어도 그 적대감이 타국 귀족인 제네비브까지 닿지는 못한다. 제 나라의 정치가 아니니 ‘이건 좀 별로네’ 정도의 옅은 감상이야 내릴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지도자의 약점을 캐고 다닐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

“…….”

제네비브는 깊게 고민했다.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나을까, 아니면 대충 얼버무릴까.

“……이상한 사람을 봐서.”

제네비브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블랑카에게 비밀로 하기에는 그동안 그녀가 해 준 게 많았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제네비브의 말에 블랑카가 회색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입꼬리를 씰룩거리기까지 했다.

블랑카는 호기심이 곧 추진력인 사람이었다. 말해 줘서 크게 나쁠 건 없었다.

“나, 블랑카야. 기자는 입이 무거워야 하는 법이지.”

얼마나 궁금한 건지, 블랑카는 졸업한 칼리지 클럽 활동까지 들먹였다. 그녀는 흥분한 듯 작게 주먹을 쥐며 제네비브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알겠어.”

제네비브는 애타게 제 말을 기다리는 블랑카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윌리엄 밀포드라고 들어 본 적 있어?”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제네비브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낮아졌다. 그리고 블랑카는 그 이름을 처음 들었던 오웬이 그랬듯 모르겠다는 반응을 내보였다.

“으음…… 윌리엄은 아본리아나 카르디르식 이름 아니야? 성씨도 신기하네. 밀포드(Milford)……? 수풀 근처 물레방아라니. 처음 들어 봐.”

“나도 그랬어. 작위는 안 받은 것 같은데, 아무튼 그 사람이 에드워드 후견인이야.”

“……후견인? 에디에게 후견인이 있었어?”

블랑카가 안 믿긴다는 듯 물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평민이었던 시절, 에드워드는 빈말로도 그를 돌봐 주는 보호자가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응. 근데, 조금 이상한 사람 같아서 알아보려고.”

“그게 라몬 황제의 뒷조사와 무슨 관계인데?”

“선대 황제와 밀포드가 같은 부대 출신이었어. 밀포드는 아무리 찾아봐도 정보가 없어서…… 그 주변 유명인을 파 보면 뭔가 나올까 싶었지.”

“중앙 귀족이 아니면 찾아볼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인 편이긴 하지.”

블랑카가 그녀의 말에 작게 동의했다.

“내가 마이언에 돌아오고 나서 계속 도서관 갔던 것도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던 거야.”

“용케 찾았구나.”

“학교에서 찾은 건 아니고, 졸업 시험 주말에 황궁에 묶였을 때 우연히 발견했어.”

제네비브는 미리 챙겨 온 종이를 블랑카에게 건넸다.

“진저. 설마, 황실 책을 찢은 거야……?”

블랑카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따로 산 거야.”

<아본리아군: 완전한 역사>라는 유명한 제목을 듣고 나서야 블랑카가 안심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블랑카는 책에 그려진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고심하는 듯 인상을 쓰던 그녀가 이내 “아!”라는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나 이 사람, 마이언에서 본 것 같은데?”

블랑카가 젊은 시절 밀포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이언 출신이라는 거야?”

“아니, 마이언 아카데미에서 봤어. 솔잎 브로치를 시상했을 때! 에디에게 브로치를 달아 준 사람 같은데? 너는 그때 없어서 못 봤겠다.”

블랑카는 밀포드의 특징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음산한 사람. 짧은 묘사를 들은 제네비브는 같은 사람을 설명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쩐지, 조금 이상하더라. 뭐라고 해야지…… 눈이 막―.”

“시체 같았지?”

“맞아! 완전 죽은 사람 같았다니까.”

블랑카가 이해되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밀포드가 세인트 존 칼리지 대표로 솔잎 브로치를 줬다고?”

제네비브는 다시 중요한 점을 짚어 물었다.

“그럼, 이사회 사람인가?”

브로치 시상은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소속 학교의 교장이나 이사회 사람이 담당했다. 후자의 경우 소속 일원이 자주 바뀌었고, 이에 특별히 관심을 주는 학생도 적었다.

“그런데, 왜 오웬한텐 안 물어봐? 황실 치부 들추는 거라면 그쪽이 더 신나선 알려 줄 것 같은데.”

블랑카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게…….”

제네비브는 오웬이 밀포드에 관해 캐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이야기를 얘기했다.

“걔도 참, 이런 데선 머리가 이상하게 굴러간다니까. 대충 직위 하나 던져 주면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어갈 걸 왜 그렇게 경고했대? 더 알고 싶어지게.”

“블랑카, 너도 위험해질 수 있어.”

걔가 그렇게 진지한 건 처음 봤다니까. 제네비브는 가볍게 생각하는 블랑카에게 말했다.

“오, 달링. 그래도 나를 함부로 건들겠어?”

블랑카는 약간의 자신감과 함께 말했다. 그녀는 도리어 재미있다며, 이런 일은 처음부터 오웬이 아니라 자신을 불렀어야 했다며 섭섭함을 가볍게 표출했다.

“그래도 빨리 찾는 건 오웬한테 묻는 게 편하긴 하겠다. 협박하면 안 되나?”

“……블랑카.”

제네비브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알잖아, 한번 해 본 말이었어.”

블랑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달리는 마차에 탄 제네비브는 블랑카와 타운 하우스로 돌아가면 찾아야 할 걸 정리했다. 세인트 존 칼리지, 더 깊게는 파인트리 서클까지 연관이 있을 걸로 추정되는 사람이니 양지의 세인트 존 칼리지를 우선 파 보기로 했다.

확실히 혼자보다는 둘이 좋았다. 속도가 붙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해결될 줄 몰랐다. 진작 물어볼 걸 그랬다.

“집으로 돌아가면 언니랑 오빠들 졸업 앨범 보내 줄게. 아, 이제 도착하려나 봐.”

블랑카가 느려지는 마차를 보며 말했다.

“……네가 아는 사람이 정말 여기에 산다고?”

제네비브는 마차 밖을 보며 물었다.

멀리서도 그랬는데, 내려서 본 광경은 더욱 처참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리스톨 외곽의 낙후된 마을이었다.

제네비브는 장소가 지나치게 평화롭고 조용하면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무너져 가는 건물들이 즐비했지만, 인적이라고는 없었다.

“…….”

마치 모두에게 버려진 곳 같았다. 거리엔 구걸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 때문일까, 더 황량하게 느껴졌다. 가뭄이라도 왔는지 땅은 쩍쩍 갈라졌으며 그 흔한 잡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 황제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기에 제네비브는 이보다는 더 사람이 살 것 같은 곳에 도착할 줄 알았다.

「성공한 사람들은 전부 좋은 얘기만 하겠지. 번듯한 작위까지 있을 거고. 죽은 황제를 욕해 봤자 떨어지는 건 없으니까. 근데, 너는 좋은 얘기를 들으려는 게 아니잖아?」

두 사람 뒤를 보좌하던 달링 가문 호위를 곁눈질한 블랑카가 공용어로 말했다.

「그치.」

「그렇담 충성심을 보답 받은 사람보단 배신당한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야지. 원망이라도 들어야 소득이 있을 거 아니야.」

맞는 말이었다. 제네비브는 동의의 의미로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다.

「50년 전, 군인들이 머무르던 마을이래. 제국이 지원하다가 끊어서 이젠 부랑자 거리도 못 되지만. 우리가 만날 사람은 타일러 에이브러햄이라는 사람이야. 선대 황제와 같은 1부대 동기라고 했어.」

블랑카가 쓰러질 듯한 집 앞에 우뚝 멈춰 서고는 문을 두들겼다.

“에이브러햄 씨, 안에 에이브러햄 씨 있나요?”

건물은 노크할 때마다 무너질 것 같았다.

“……대낮부터 이리 귀하신 나리들이 이런 곳까진 어찌 오셨나.”

문을 열고 나온 건 노인이었다. 등이 굽은 에이브러햄이라는 노인은 적대적인 목소리로 제네비브와 블랑카를 보았다.

“물어볼 게 있어 찾아왔―.”

“말할 것 없소.”

노인은 문을 닫아 버렸다. 문전 박대를 당한 제네비브와 블랑카는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제네비브였다.

쿵쿵!

제네비브는 문을 한참 두들겼다. 가벼운 고통이 반복되자 손허리뼈가 부어올랐다. 제네비브가 아픈 손뼈를 문지르는 사이에, 문이 다시금 열렸다.

“잠 한숨 편히 못 자게 하는구먼. ……쯧. 그래, 볼 것 없는 노인은 왜 찾아오셨소.”

그가 투명스럽게 물었다.

“이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요.”

블랑카가 대신 대답했다. 그녀는 찢긴 종이를 노인에게 건넸다.

“이 작은 걸 어찌 읽으라는 겐지……. 이자가 누구인지 알려 주면, 조용히 돌아갈 텐가?”

노인은 종이와의 거리를 좁혔다 넓히기를 반복했다. 시력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윌리엄 밀포드에 대해 알고 싶어요.”

그래도 이름을 듣는다면 기억하지 않을까. 제네비브가 말했다.

“…….”

종이와의 거리를 조정하던 노인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밀포드.”

노인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 이름을, 내가 어떻게 잊을까.”

그러곤 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은 악마야.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친 악마……. 그 한 놈 때문에 부대 하나가 무너졌으니까.”

그의 눈에 짙은 슬픔이 스쳤다.

“……대화가 길어지겠군.”

에이브러햄 노인이 들어오라는 듯, 몸을 틀어 통로를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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