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11화
녹서스에서 보내는 7월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따라온 호위가 제 사람이었던 덕분에 제네비브의 수상쩍은 외출은 달링 부부의 귀까지 닿지 못했다.
제네비브는 저택에 머무르며 리스톨에서 얻은 단서들을 조합하거나 새로운 단서를 찾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래도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올해 사교 활동을 전부 멈추기로 결심한 이상, 지금 제네비브에게는 남는 게 곧 시간이었다.
“성인식도 치르지 않는다고요?”
당연히 ‘사교 활동 중단’에는 제 성인식도 포함되었다. 오래전부터 계획하던 성인식은 한순간에 없던 일이 되었다.
“네, 초대장은 보내지 않기로 했어요.”
제네비브는 맞은편에 앉은 각 가문의 영애들을 보며 말했다.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귀족들과 가끔 티타임을 보내는 걸 제외하면 제네비브는 어떠한 외출도 하지 않았다.
“달링 가문에서 올해 연회를 단 한 번도 주최하지 않는다니! 정말 아쉬워요.”
어느 한 명이 말하자, 다른 손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움을 표출했다.
“가족끼리 조촐하게 하기로 했습니다.”
제네비브는 저를 설득하려는 그들을 보며 재빨리 말했다. 설득되기 쉬운 그들의 역할은 제네비브의 마음을 돌리는 게 아닌, 이 소문을 남들에게 알리는 거였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사람이 많은 곳은 아직도 조금 꺼려지네요……. 황태자께서 돕지 않으셨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제네비브는 표정을 살짝 어둡게 지으며 동정심을 자극했다. 정녕 무서웠다면 책봉식은커녕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테다. 하지만, 듣는 이들로선 재미있으니 별달리 첨언하진 않았다.
‘내일이면 소문이 돌겠지.’
어떤 식으로 부풀진 몰라도 지금 이곳에 온 이들은 제네비브가 바라던 대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녀가 한 말을 뿌릴 것이다.
* * *
제네비브는 새 학기를 준비하며 틈틈이 밀포드를 조사했다.
“아본리아가 아니라서 그런가?”
제네비브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나라가 다르니, 확실히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다. 제네비브는 블랑카가 (예정보다 빨리) 보낸 보아르네 가문 남매들의 졸업 앨범에서 밀포드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 이사회 사람들이 나열된 장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칼리지 이사회가 아니라…….’
그렇다고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칼리지 졸업 앨범 어디에도 밀포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제네비브는 그가 파인트리 서클 이사회에 소속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편이 더 설득력 있지.”
제네비브는 졸업 앨범을 보며 중얼거렸다.
학교 이사회는 주로 모교 졸업생을 선호한다. 그리고 장학생이 아닌 이상, 평민은 학비를 감당하지 못했다.
‘평민 장학생이 세인트 존 칼리지를 졸업한 경우는 없었으니까…….’
이조차 어렵게 찾은 정보였다. 그러니, 당시의 밀포드가 세인트 존 칼리지 이사회에 속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파인트리 서클 이사회는 다르다. 파인트리 서클 이사회는 굳이 소속 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카르디르 국왕이 그 증거였다. 포가츠 아카데미 출신이었던 그는 왕세자였을 적에 파인트리 서클 이사회에 소속된 적이 있었다.
파인트리 서클 이사회의 사람이 대회 승자에게 브로치를 달아 준다. 그리고, 밀포드가 에드워드에게 브로치를 달아 줬다.
이치에 맞았다. 서클 이사회는 졸업 앨범에 언급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찾을 곳이 있지.’
제네비브는 품에 안고 있던 칼리지 졸업 앨범을 내려놓았다.
윌리엄 밀포드에게 몇 걸음 가까워진 것 같았다. 세인트 존 칼리지에 가면 찾아야 할 게 있었다.
계획하던 것과 또 다른 점이 있다면 제네비브가 예정보다 이르게 아본리아로 향했다는 거였다.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닌, 오웬 블라이스의 성인식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생일 축하해.”
오웬에게 축하의 말을 전달한 후, 제네비브는 연회장 안을 보았다. 연회장은 저녁에 시작할 성인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이 먼 나라까지 와 줘서 감동했습니다, 고모님.”
제네비브는 극적인 어조로 모친에게 인사하는 오웬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껏 꾸며진 내부를 구경했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타운하우스의 연회장은 빈말로도 넓은 편이 아니었다.
크고 화려한 연회를 기조로 삼는 황실과 아예 반대 방향으로 가겠다는 듯, 블라이스 가문은 오히려 연회 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사적으로 진행되는 연회는 안타깝게 죽은 지인들을 기리며 간단하게 치르겠다는 의사를 담았다.
‘간단히…… 까지는 모르겠지만.’
제네비브는 조화롭게 꾸며진 연회장을 보며 생각했다. 사실 말만 ‘간단히’지, 있을 건 전부 존재했다.
‘뭐, 그래도 연회장 크기는 작으니까.’
귀족의 시점에선 조촐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몇 시간 뒤에 시작할 연회에 하인들은 마지막 점검을 하면서도 신기한 듯 연회장을 둘러보며 진로를 방해하는 제네비브를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 뒤늦게 자신이 방해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제네비브는 급히 연회장을 벗어났다.
“솔직히 안 올 줄 알았어. 네 성인식 준비로도 바쁠 텐데, 그래도 와 줘서 좋네~”
그런 그녀를 뒤따라오던 오웬이 말했다.
“못 들었어? 나, 성인식 안 하기로 했는데.”
“아니, 왜?”
오웬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귀족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든 이에게 성인식은 단 한 번뿐인 큰 기념일이었다.
“……해이해질 것 같아서.”
제네비브는 대답했다. 녹서스에서는 무섭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내숭을 부렸지만, 실은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성인식을 치른 뒤 칼리지로 가게 되면 마음이 붕 뜰 것 같았다.
“해이해질 것 같다고 성인식을 안 치르는 사람은 아마 네가 처음일 거다. 사제도 안 불렀어?”
오웬이 안 믿긴다는 듯 말했다.
“내가 아본리아 사람도 아니고, 사제를 왜 불러.”
제네비브가 대답했다.
황실을 뒷배로 삼아 종교의 힘이 강한 아본리아와 다르게 카르디르는 종교가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보여 주기식이라도 사제는 불필요했다.
“아…… 카르디르는 필요 없지, 참. 그럼, 축하도 받을 생각 없어?”
“뭐래. 생일인데 받기는 해야지.”
제네비브는 눈을 굴렸다.
계단을 오른 제네비브는 소란스러운 1층을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지나면 사람들로 가득 차겠지.
“……학교 애들 많이 올 텐데, 괜찮아?”
오웬이 물었다.
“응……. 뭐, 나쁠 건 없겠지.”
제네비브는 다소 자신감 없이 말했다.
오웬과 블랑카, 그리고 제임스 같은 친구들에겐 유급했다는 소식을 전해도 긴장되지 않았지만, 다른 칼리지 친구들을 볼 생각을 하니 새삼 긴장이 되었다.
오웬의 성인식은 미리 예고된 대로 가까운 가족과 친한 지인들로만 이루어졌다.
절반은 블라이스 가문의 손님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오웬의 손님이었다. 하여 전자와 후자 모두 제네비브에게도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본다.”
“잘 지냈어?”
오웬에게 축하를 전하던 칼리지 친구들은 제네비브에게도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걱정한 것과 다르게 누구도 제네비브를 보자마자 유급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제네비브, 유급했다는 얘기는 들었어. 너무 아쉽겠다.”
……레일라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도 졸업은 할 수 있으니까, 난 괜찮아.”
“애써 괜찮은 척할 필요 없어. 네가 얼마나 공부했는지 아는데…… 일 년만 더 열심히 해.”
레일라가 즐겁다는 듯 제네비브의 어깨를 토닥였다.
“…….”
그녀가 왜 이렇게 불편한지 모르겠다. 괜찮다는 제 말을 무시하며 함부로 동정하는 게 이상했다. 제네비브는 레일라가 만졌던 어깨를 가볍게 쓸어 냈다.
“쟤는 또 왜 저래?”
블랑카가 레일라를 보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한 사람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제네비브는 좋은 부분만 보려고 노력하며 오웬의 성인식을 구경했다.
성인식은 휴고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정석이었던 에드워드의 의식과 다르게, 오웬은 그보다 훨씬 간소화된 의식을 치렀다. 사제를 따라 짧은 기도문을 읊은 오웬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첫 와인을 마셨다.
이어지는 연회는 평소와 같은 활기를 띠었다. 약혼자가 없는 오웬은 춤을 추는 대신, 친구들과 밀린 근황을 이야기하는 걸로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제네비브는 같은 클럽 활동을 했던 친구들 위주로 어울렸다.
틀에 박힌 연회가 아닌,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뭐랄까…… 약간 졸업 파티 같지 않아?”
메이블이 말했다. 그 수가 적은 보호자들과 규정 없는 연회는, 먼저 졸업한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기숙사 졸업 연회였다.
“못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라도 해 보네. 딱 이때만 가 보고 싶다.”
“내가 잘 보고 얘기해 줄게.”
제네비브는 작게 농담했다.
캐럴과 메이블은 제네비브가 먼저 유급 얘기를 꺼낸 뒤에서야 한두 마디씩 얹었다.
“그래도 대단한데. 나라면 못할 것 같아.”
캐럴이 말했다.
“너에겐 애초에 유급 제안이 안 오지. 그래도 재시험 안 준 건 이상하긴 하다.”
메이블이 캐럴을 지적했다.
“재시험 포기한 애들도 많다니까. 그래서 아마 거의 처음으로 졸업생이 반토막 났을걸? 졸업은 나도 못 했고.”
메이블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폴로 3학년 중에선 나만 졸업했어.”
캐럴이 말했다.
열 명이 넘었던 3학년 부원 중에 졸업한 사람이 한 명뿐이라니. 한순간에 낮아진 졸업 비율에 제네비브는 혀를 깨물었다.
유급이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던 이유는 졸업을 못 한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거였다. 포기한 사람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흔할 정도로 많을 줄 몰랐다.
짧은 대화에서 무거운 죄책감을 느낀 제네비브는 연회장을 나와 복도에 섰다.
기분이 괜찮아지려고 할 때면 그때의 일이 다시금 생각나거나 사건이 끼친 영향이 새롭게 나타났다. 아마 평생 짊고 갈 감정이겠지. 제네비브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복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네비브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머리를 돌리자, 얼마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 제임스가 있었다.
“……제임스?”
평생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할 사람이었다.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나머지, 제네비브는 그와 평범한 대화를 하는 방법을 까먹었다.
“제임스, 그…… 저번에 카터 저택에서.”
먼저 제네비브는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
제임스는 마치 그녀를 못 본 사람처럼 무시하고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