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12화
제임스가 자신을 못 본 체했다는 것에 제네비브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머리는 이내 뒤죽박죽 변했다. 오만 가지 잡생각이 들었다. 제임스답지 않은 행동에 제네비브의 기분은 심해까지 처박혔다.
“…….”
제네비브는 그를 붙잡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그를 따라가 친한 척을 하지 않을 양심은 존재했다. 왜 제임스가 자신을 피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이 그에게 한 일은 있었다. 무시당해서 온 황당함보다는 올 게 온 기분이었다.
“…….”
앞으로 멀어졌으면 더 멀어지지, 전처럼 가까워질 수는 없을 거다. 복도에 선 제네비브는 깊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바라던 것처럼 정리가 되지 않았다.
제네비브는 다시금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제임스는 오웬과 블랑카와 대화하고 있었다. 이전과 같은 친근함은 흐려졌지만, 그래도 세 사람 사이에선 조금 전 저와 제임스 사이에 있던 거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을까.
그녀가 아는 제임스는 어린애들처럼 유치하게 선택을 강요할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그가 그렇게 이야기하더라도 오웬과 블랑카가 그 말을 고분고분 따를 정도로 분별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과연, 수습할 수 있는 관계인가. 제네비브는 조금 착잡한 심정으로 벽에 기대었다.
“으음! 근데, 나는 잘 모르겠어. 달링은…… 안쓰럽긴 한데, 본인이 자초한 거라고 생각해.”
제임스와의 관계를 곱씹던 제네비브의 신경을 거스르게 만든 건 레일라의 음성이었다.
“…….”
어설픈 선동을 들으며 제네비브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나쁜데,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으로부터 제 뒷담 아닌 뒷담을 듣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사람에게까지 감정 소모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레일라 그레이스. 다시 한번 말해 줄래?”
레일라에게 붙잡혀 뒷말을 듣던 상대가 어색하게 제네비브에게 인사했다.
“네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아, 내 의견.”
레일라가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렸다. 제네비브는 속으로 인내를 외웠다.
“말 좀 조심했으면 좋겠어.”
간신히 평정심을 찾은 제네비브가 말했다.
“제네비브, 나는 왜 네가 기분 나빠 하는지 모르겠어. 이해를 못 하겠는걸. 왜 시험 중간에 에드워드 전하와 크루즈 파티를 갔던 거야?”
“…….”
그를 살리고 싶어서 갔다. 하지만 결국 가서 낸 성과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내세울 것도 없다.
“정말 그렇게 될 줄 몰랐어? 평민이랑 어울리다 보니, 생각도 짧아진 거 아니니? 아, 농담이야.”
“…….”
레일라가 즐겁게 말했다.
“아무리 지금 지위가 올라갔다고 해도 출신은 못 속이지. 제네비브, 에드워드 전하는 와인 맛 구분은 할 줄 아셔?”
레일라가 손 사이로 잔을 굴리며 말했다.
성인식을 치른 지 얼마 안 지난 듯 그녀는 어설픈 와인 지식을 뽐냈다. 대신전에 와인을 납품하는 게 그레이스 가문이라며 한껏 콧대를 높이기도 했다.
“레일라 그레이스. 정말 하나만 알고 다른 건 모르는구나.”
제네비브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레이스 와인은 귀부 와인이라고, 썩은 포도로 만들어진 거야. 네가 너희 가문이 만들어 낸 귀부 와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알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레이스 백작의 안목은 후대까지 전해지지 못한 것 같네.”
제네비브는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동시에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회했다. 레일라가 하는 말이 헛소리임을 알면서도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한 바람에 머리를 짚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제 욕을 하든 말든 상관없었지만, 에드워드를 까 내리는 데서 정신을 놓았다. 대응할 가치도 없는 걸 대응하여 이런 사달을 만들어 낸 것 같았다. 저답지 않게 흥분했다.
한편, 제네비브의 말을 들은 레일라의 얼굴은 한없이 붉어졌다.
‘바람을 쐬어야겠어.’
제네비브는 무거운 머리를 짚고는 야외 복도로 갔다. 여름이 끝나 간다는 걸 알려 주듯 귀뚜라미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깊게 숨을 내쉬며 머릿속을 정리하던 제네비브를 방해한 건 해리슨이었다.
“……왜 네가 여기에 있어?”
제네비브는 말투가 날카롭게 튀어 나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했다. 마지막으로 해리슨과 말을 섞었을 때 인상이 좋지만은 않았으니, 조금 전 레일라에게 했던 것처럼 반응해선 안 되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그나저나 제복을 입는 해리슨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제네비브의 눈치를 보며 다가온 그는 제복과 어울리지 않는 두툼한 봉투를 들고 있었다.
“연회장에 선물 두는 테이블이 있어.”
제네비브는 봉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오웬이 아니라, 네 거야.”
다소 거만하게 말한 해리슨은 이내 자신의 어투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은 양 헛기침을 했다.
“내가…… 제임스나 오웬처럼 너와 친한 건 아니지만.”
제네비브는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 누구와 멀어진 것 같아서 레일라한테 한바탕 쏟아 내고 온 길이었는데.
“그래도 네가 있어서 자극이 됐어. 이런 식으로 수석 졸업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해리슨이 바람 빠진 웃음을 냈다.
“졸업 시험 못 본 건 유감이야.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마지막 날 시험지는 못 구했을 거 같아서. 마지막 날에 본 과목이랑 보충 시험에서 나온 시험지야.”
해리슨이 안에 든 내용물을 설명하며 말했다.
제네비브는 떨떠름하게 그가 건넨 봉투를 받았다. 솔직히 말해, 그로부터 이런 선물을 받을 줄 꿈에도 몰랐다. 이런 걸 주고받을 정도로 그와 친한 사이였나?
“세인트 존 칼리지를 한 번 더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족보 찾느라 힘 빼지 말라고. 도움 됐으면 좋겠네.”
제네비브는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고마워.”
“어…… 그리고, 그레이스가 하는 말은 너무 귀담아듣지 마. 이상한 소리인 거 다들 알고 있으니까.”
“그래, 그건 말이라도 고마워.”
“열심히 해. 응원한다.”
족보를 주는 것 외로는 할 말이 없었던 건지, 해리슨은 그 말을 끝으로 테라스를 나갔다.
제네비브는 연회장으로 돌아가는 대신, 창을 통해 흘러나오는 빛을 받으며 해리슨이 준 시험지를 읽었다. 역시나 만점을 받은 시험지였다. 해리슨은 이미 써 놓은 답에 제 답을 보충하듯 작게 메모까지 해 두었다.
“…….”
안 좋았던 기분이 의외의 사람으로 인해 나아질 줄 누가 알았을까.
제네비브는 블라이스 타운하우스 뒷문 계단에 앉았다. 돌계단의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정원사가 아름답게 가꾼 정원은 늦여름 장미가 활짝 폈다.
[샐리 교수는 <세계 지리와 역사>라는 책을 좋아함]
친하지 않은 동급생이 쓴 메모를 읽으며 제네비브는 작게 웃었다.
문득. 칼리지를 다닐 적 해리슨에게 물어봐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아 불만을 털어놓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좀 알려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사람 중엔 그녀도 있었다.
제네비브가 등지고 있던 연회장 창문은 곧 어두워졌다. 제네비브는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기울이곤 하늘을 구경했다.
볼 게 없는 흐린 하늘에 불쑥 오웬이 들어왔다.
“다들 갔어.”
오웬이 말했다. 환하게 빛을 내리쬐던 연회장은 그사이 조금 어두워졌다. 시끌벅적한 건물이 조금 조용해진 것 같기도 하다.
“블랑카가 편지하겠대.”
오웬이 말했다. 그 내용을 대략 알아챈 제네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들락날락해서 이제 슬슬 눈치 보이는 거, 알아?”
제네비브가 농담했다.
“너는 언제나 환영이지. 어머니가 이제 나보다 너를 더 좋아해.”
오웬이 그녀 옆에 앉았다. 넓었던 계단은 사람이 하나 추가되었다고 곧바로 비좁아졌다.
“뭐, 그래도 아마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야.”
제네비브는 오웬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제임스는…… 걱정하지 마. 좀 예민할 때잖아. 걔도 생각이 많아, 지금.”
“…….”
제네비브의 예민함의 근원지를 기민하게 알아챈 듯 오웬이 말했다.
“하지만 오웬, 네가 몰라서 그래. 복도에서 제임스와 만났는데 걔가 날 그냥 지나쳤어.”
제네비브가 말했다. 제임스와 제대로 대화한 것도 벌써 두 달 전 이야기였다.
“그럴 수도 있는데…… 그냥 조금 착잡해.”
제네비브는 무릎에 머리를 묻으며 말했다. 아까처럼 무시하는 게 아니라, 말로 털어놓든 원망하든 했으면 좋겠는데.
“마시고 털어 내.”
오웬이 와인이 가득 담긴 잔을 건넸다. 제네비브가 거절하려고 하자, 그는 협박이랍시고 “스읍.” 소리를 냈다.
“어허. 어른이 건네는 건 마시는 게 예의란다, 동생아.”
“고작 일주일 빨리 태어났다고 뻗대기는…….”
제네비브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레일라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귀부 와인이야?”
“응. 어머니가 고른 와인이야. 걔가 좀…… 너랑 잘 안 맞는 건 알았는데, 오늘 그렇게 할 줄 몰랐네. 참고로 말하는 거지만 가문 손님이고, 나도 도우려고 했다.”
오웬이 짧게 변명했다.
“구차한 변명이네.”
“참 나…… 그래, 좀 구차했다.”
두 사람은 마주 본 채 웃었다.
“네 유급을 위하여.”
오웬이 제 잔을 들어 보였다.
“내 유급을 위하여.”
제네비브 역시 잔을 들어 올렸다.
쨍— 유리끼리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 마신 와인의 맛은 진하고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