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13화
9월. 가을의 시작이자, 한때는 수확의 달이라고 불리던 날이었다.
“여기가 소설의 배경…….”
제네비브는 칼리지의 높은 고성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공포감이나 잡아먹힐 듯한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위로 맑은 가을 하늘이 펼쳐졌다.
“다행이네.”
입학한 뒤로 매번 내리던 가을장마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날씨마저 원작 분위기를 따라 음울했다면, 제네비브는 결코 원작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쌀쌀하지만 맑은 푸른색 하늘은 마치 제네비브에게 새로운 시작과 끝없는 가능성을 열어 두라고 얘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 주인공을 찾자.’
이젠 ‘주인공 찾기’도 저 혼자만의 전통이 된 것 같았다. 짧게 심호흡한 제네비브는 칼리지 안으로 들어갔다.
학기 첫날이 그러하듯, 교실은 차분함이 감돌았고 기숙사 복도는 흥분이 역력했다.
교수들은 일 년간 이용할 교실을 마지막으로 정리했다. 그다음 날부터 입을 빳빳한 새 교복과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정리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여름 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과 근황을 나누며 건물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다.
제네비브는 들뜬 분위기를 느끼며 기숙사 복도를 걸었다.
“황태자 전하의 옆방은 누구일까?”
“황족은 방이 아니라, 층 하나를 전부 쓸걸.”
“책봉식 때 우리 가문 전원이 대신전에 초대 받았어.”
그중 학생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화 주제는— 당연하게도 에드워드였다. 일주일 내내 연회를 한 보람이 있었다.
학생 대다수가 이야기하는 건 크루즈 사고나 콜린스 가문의 재판이 아니었다. 그들은 에드워드의 책봉식을 중점으로 저들이 참석한 화려한 연회를 언급했다. 비극은 무척이나 쉽게 잊힌 것 같았다.
제네비브는 새삼 기분이 오묘해졌다.
신분제 사회이니만큼 권력이 절대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에드워드를 향한 태도가 이만큼이나 달라질 줄 몰랐다.
에드워드 블렛은 기본적으로 모두의 호감을 샀다. 그와 친해지기 싫은 사람은 이제 존재할 수 없었다.
‘또 이러네.’
제네비브는 제 뺨을 약하게 때렸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마음을 접어, 에드워드와 여자 주인공의 연애 사업을 돕겠다는 호기로운 계획은 끝내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에 대한 감정은 빨리 포기할수록 편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도저히 마음을 접지 못하겠다.
그동안 제네비브는 일부러 밀포드의 조사나 친구 관계 같은 여러 문제로 신경을 분산시키고, 의도적으로 에드워드를 잊고 지냈다. 하지만 이따금 그를 생각할 때마다 제네비브는 배가 엉키고 가슴이 간질거렸다.
마음을 접지 않았다가 에드워드가 천천히 여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걸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고 싶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제 진정한 사랑을 찾을 때, 제네비브는 여자 주인공을 보며 질투 같은 못난 감정이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경모와 애정이 담긴 눈으로 여자 주인공을 바라보는 에드워드. 여자 주인공을 볼 때마다 환하게 웃는 에드워드. 여자 주인공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려 몸을 숙이는 에드워드.
하지만 그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몸이 멀어진다고 사라질 감정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제가 여자 주인공을 만나는 게 아닐까.
‘여주를 만나면 마음 정리가 가능하긴 할지…….’
원작에 따르면 그토록 사랑스럽다는 여자 주인공이니, 눈으로 확인하면 정리가 될지도 모른다.
“제네비브 선배, 그러면 이제 선배를 어떻게 불러야 해요?”
그때, 상념을 끊듯 아비게일 리트먼이 친근하게 물었다. 아비게일은 선배라는 호칭이 입에 익어 버렸다며 가볍게 이야기했다.
“아비게일, 너만 괜찮으면 그냥 이름으로만 불러 줘.”
제네비브는 대답하며 휴게실 안을 보았다.
친구들과 자주 앉았던 벽난로 앞 소파는 다른 1학년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제네비브는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일단 선배라고 부를래요.”
“네가 좋을 대…….”
그러다, 말끝을 흐렸다.
기숙사 휴게실 건너편에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제네비브는 세인트 존 칼리지에 있는 시온 헤이븐을 보며 원작이 정말 시작되었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하아…….”
제네비브는 시온이 로맨스 판타지 속 남자 주인공다운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제게 다가오는 걸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잘생긴 얼굴은 휴게실 모두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제네비브는 전처럼 그에게 휩쓸리지 않고자 노력했다.
“정말 유급하셨네요.”
시온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거짓말이라도 한 줄 알았나요?”
“……음, 솔직히 조금 의심했어요.”
시온은 여상하게 말했다.
새로운 시작을 할 생각이 아예 없다는 제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시온은 옆에 있던 아비게일에게 관심을 보였다. 결국, 제네비브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지지 않으니까 스스로 나서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시온은 당시 그녀에게 소문이 퍼지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그 모습을 본 제네비브는 여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시온, 여기는 아비게일 리트먼. 3학년이야. 그리고…….”
“시온 헤이븐, 2학년입니다. 우드 칼리지 교환 학생이에요.”
시온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제네비브는 진심으로 여자 주인공의 남자 취향이 궁금해졌다.
아비게일은 벌써 시온의 매력에 빠졌는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앞으로 후회할 텐데. 제네비브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눈웃음을 짓는 시온을 보며 생각했다.
‘……분홍색?’
찰나, 창가에 기대어 정신을 시온에게서 떨어트린 제네비브의 시야 끄트머리에 익숙한 색이 들어왔다. 아직 녹색이 남은 기숙사 정원에 세인트 존 칼리지와 어울리지 않는 분홍빛이 확실하게 스쳤다.
제네비브는 창가에 얼굴을 붙였다. 그녀의 눈은 재빨리 익숙한 색을 찾아갔다. 매번 입학할 때마다 병적으로 분홍 머리를 찾아 댄 덕분에 제네비브의 몸은 알아서 움직였다.
“당신께 말할 게 있는―.”
“헤이븐 군, 미안하지만 잠깐 가 봐야겠어요.”
제가 본 게 착각이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제네비브는 제게 말을 걸려는 시온을 밀쳐 내곤 휴게실을 나왔다.
마치 향기에 이끌려 따라가는 나비처럼, 제네비브는 무아지경으로 휴게실에서 스치듯 본 분홍 머리를 찾아갔다.
황급히 모퉁이를 돌아설 때, 제네비브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곧장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제네비브는 앓는 소리를 냈다.
“꺄악! 미안해요……! 다치진 않았어요?”
그때, 달콤한 미성이 들렸다.
제네비브는 고개를 올렸다. 그토록 찾던 여자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을 본 순간, 든 제네비브의 감정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토록 애타게 찾던 사람을 마침내 본 제네비브를 지배한 건 공포와 기쁨이었다.
아무런 반전도 없이 소설이 시작되었다는, 소설의 전개대로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과 지난 세월 동안 찾던 사람을 드디어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해방감이 뒤섞여 전신을 울렸다.
여자 주인공이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서라는 뜻 같았다.
“……나는 괜찮은데, 너는 안 다쳤어?”
제네비브는 여자 주인공이 건넨 손을 잡으며 물었다. 작은 손은 부드러웠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존재를 모르는 척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고마워. 난 제네비브 달링이라고 해. 네 이름은 뭐야?”
제네비브는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쉐트. 아쉐트 뮐리아예요.”
“만나서 반가워. 못 보던 얼굴인데, 신입생이니?”
아쉐트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소설에서 그렇게 찬양한 이유가 있는 외모였다.
어렸을 적 먹은 솜사탕 같은 달콤한 분홍색 머리카락 몇 가닥은 그녀와 부딪혀 얼굴 앞으로 떨어졌다. 지저분하게 헝클어진 앞머리는 그마저도 의도한 것처럼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금색 눈동자는 봄날 아침 햇살처럼 밝고, 매혹적이었다. 밝게 빛나는 순수한 눈은 지성과 호기심으로 가득했고, 저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든 그녀를 본다면 뒤를 돌아보고도 남을 테다.
“아쉐트…….”
마이언식 이름과 뒤렝식 성씨가 괴랄하게 혼합된 이름이었지만, 소설의 주인공이라서 그런가. 그 이름조차 특별한 것 같았다.
아쉐트 뮐리아를 보며 제네비브는 그동안 자신이 개학할 때마다 그녀를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었음을 알았다. 이런 외모의 여학생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소문이 났을 테니까.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제가 길을 잃은 것 같은데…… 기숙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서요…….”
그때, 아쉐트가 금빛 눈동자를 애처롭게 깜빡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