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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114화 (114/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14화

“……물론이지.”

제네비브는 어렵게 답했다.

“나를 따라오면 돼. 기숙사까지 멀지 않아.”

“고마워요! 아,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모르네요. 이름이…….”

제네비브는 그제야 제 소개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제네비브야. 제네비브 달링.”

목소리 끝이 떨렸다. 다행히 아쉐트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제네비브 달링! 정말 당신과 어울리는 근사한 이름이에요.”

아쉐트가 여자 주인공다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제네비브 선배라고 불러도 될까요? 선배…… 맞으시죠?”

아쉐트가 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재차 물었다.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제네비브가 아쉐트를 만난 건 십 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아쉐트 뮐리아는 원작에서 묘사한 그대로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아쉐트는 딱히 특별한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자잘한 행동들이 그 평범함조차 특별하게 만들었다. 눈썹을 살짝 올리며 제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이나, 벚꽃색 머리카락에 맞춰 발그레한 볼 같은 게 말이다.

누구든 그녀에게 마음이 빼앗길 거다.

에드워드도 그렇겠지.

제네비브의 머리는 잠깐 스친 생각을 능숙하게 잡아냈다. 옅은 질투였다. 제네비브는 자연스럽게 대해야 한다는 사실마저 까먹고 유치한 감정을 느낀 자신을 비웃었다.

“……응, 맞아. 3학년이야. 근데,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거야?”

다시 현실로 돌아온 제네비브는 애써 평범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다른 애들이 알려 준 길로 왔는데…… 제가 이상한 길로 들어선 것 같아요.”

아쉐트가 손가락으로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꼬아 대며 말했다.

누가 보더라도 일부러 그녀에게 틀린 길을 알려 준 거다. 남을 탓하는 대신, 가볍게 본인 책임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자니 왜 원작 속에서 에드워드가 아쉐트에게 동질감을 느꼈는지 알 것 같다.

‘……그래, 소설에서 아쉐트는 따돌림을 받았지.’

벌써부터 소설 전개가 시작하려 시동을 걸고 있다. 지금이야 길을 잘못 알려 준 정도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장학생 신분이 해를 가져올 거다. 에드워드가 당했던 것처럼.

“그래도, 여기까지 잘 왔네.”

제네비브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제네비브 선배가 아니었다면 계속 헤맸을 거예요! 실은, 못 찾겠어서 저쪽으로 가려고 했지 뭐예요? 눈앞에 기숙사를 두고 그게 무슨 멍청한 짓이람…….”

아쉐트는 기숙사 후원 쪽을 가리키며 ‘저어쪽’이라고 말을 길게 늘였다. 후원 너머로 보이는 학교 신전을 기숙사 건물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저건 기숙사 건물이 아니라, 학교 신전이야.”

만약 아쉐트가 그쪽으로 갔더라면 길을 잃었을 게 분명했다.

“칼리지는 길이 복잡하진 않은데 이상하게 헷갈리거든. 큰일 날 뻔했네.”

앞으로 아쉐트를 중심으로 여러 일이 많이 일어날 예정이지만……. 제네비브는 구태여 뒷말을 잇지 않았다.

조금 더 걷고서야 두 사람은 기숙사에 도착했다.

“여기가 바로 기숙사 입구야. 뒷문도 있는데, 복도 끝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나와.”

“아! 정말 고마워요.”

아쉐트는 제가 왜 이 쉬운 길을 헤맸는지를 이상하게 여겼다.

“신입생들은 보통 학교 투어를 받는데, 너는 못 받았어?”

제네비브는 의아하게 물었다. 이제는 4년 전 일이라 기억이 흐릿하지만, 분명 칼리지는 신입생들에게 학교 안내를 진행했었다.

“입학식이 끝나면 투어를 하거든.”

제네비브가 이어 설명했다. 하지만, 아쉐트는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다.

“으음…… 제가 놓쳤나 봐요!”

이내 표정이 어딘지 조금 어두워지는 것으로 보아, 아쉐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맑은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뿐, 제네비브에게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아쉐트는 그저 안내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여자 기숙사 층으로 올라갔다.

제네비브는 2층으로 올라가는 아쉐트를 보았다. 기분이 조금 오묘했다. 아쉐트의 사랑스러움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녀와 대화할 때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뭐랄까…… 내가 아쉐트와 대화해선 안 되는 느낌?’

에드워드와 시온을 처음 봤을 때도 이런 기분이 들었던가?

물론 남자 주인공을 만난 것 역시 충격적인 경험이었지만, 분명 그땐 이런 이상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에드워드를 대했을 땐 그가 원작 속 서브 남주라는 걸 몰랐을 때였고, 시온을 상대할 땐 소설 속 원수들이 서로 헐뜯지 않을까 걱정하느라 느끼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둘을 만난 건 소설이 시작되기 전이고, 지금은 원작이 시작된 시점이라 그런 건가.’

제네비브는 저 나름대로 가설을 세워 보았다.

“원작 시점…….”

이젠 정말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었다는 선고가 내려진 것 같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냐에 따라 제네비브 달링은 전처럼 이름 없이 지나가는 엑스트라로 살아갈 수도 있고, 소설 전개에 개입하는 조연이 될 수도 있다.

그때, 신전 종이 울렸다. 학생들이 하나둘 요란스럽게 기숙사를 나갔다.

“일단, 수업은 정해야지.”

제네비브는 종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세인트 존 칼리지의 첫날 수업은 오후 반나절 안에 끝났다.

실은 수업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미리 만들어 둔 시간표에 맞춰, 듣고 싶은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나 조교수를 찾아가 이름을 등록하는 게 오늘 일의 전부였다.

제네비브를 본 교수들은 반갑다는 듯 인사를 했고, 제네비브 역시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며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았다.

‘확실히 기분이 오묘하긴 해.’

제네비브는 잘 짜인 1학기 시간표를 보며 생각했다.

이미 졸업해야 했을 자신이 칼리지를 학생 신분으로 다니고 있어서 그런가……. 후배들이 더 이상 ‘후배’가 아닌 ‘동급생’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도 뒤처진 기분이었다. 그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꽂히는 기분이다.

‘……에드워드는 만날 줄 알았는데.’

오가며 한 번쯤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에드워드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라는 생각으로 방학을 보냈던 게 무색하게, 막상 에드워드와 같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자 그가 보고 싶어졌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과연 세인트 존 칼리지에 온 게 맞는지 의문을 품은 채 다이닝 홀 안으로 들어섰다.

다이닝 홀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아직까진 학년 첫날이라는 긴장과 설렘이 공기에 녹아 있었다. 이 분위기가 점차 학교와 감화되고, 소설 전개가 흘러갈수록 자취를 감출 거라는 걸 아는 제네비브는 지금 느끼는 이 옅은 의기소침함도 한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학기 첫날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듯 다이닝 홀은 평소와 다른 구조를 띠었다. 4인용 마호가니 식탁이 어지러이 배치되었던 전과 다르게, 연회장처럼 긴 테이블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갓 구운 빵 냄새와 석쇠 위에 구운 고기 냄새가 그녀를 반겼다. 긴 뷔페 테이블이 한쪽 벽을 따라 펼쳐졌고,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부터 싱싱한 샐러드, 따뜻한 수프와 달콤한 디저트가 즐비했다.

다이닝 홀 맨 앞에는 기숙사 교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제네비브는 자연스럽게 가장 오른쪽에 배치된 테이블 중간 지점에 앉았다.

식당 안으로는 눈에 익은 2, 3학년생들과 처음 보는 신입생들이 들어왔다. 폴로 클럽 소속인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제네비브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비게일, 뭘 들고 있는 거야?”

제네비브는 저녁 식사와 어울리지 않는 서류를 가지고 온 아비게일을 보며 물었다.

“내일부터 모집할 클럽 부원 신청서예요. 옆에서 캐롤라인 선배가 하는 걸 보기는 했는데, 이게 제대로 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선배, 도와줄 수 있어요?’

어느덧 폴로 클럽 주장이 된 아비게일이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 이제 폴로 클럽도 아닌데, 괜찮겠어?”

파인트리 서클 규정에는 3년 이상 재학한 학생들의 출전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존재했기에, 제네비브는 이름뿐인 폴로 클럽을 탈퇴했다.

“네! 전 솔직히 선배가 계속 뛰었으면 좋겠어요. 파인트리 규정이 진짜 말도 안 되는 거죠.”

아비게일의 말에 옆에 있던 다른 폴로 부원들이 크게 동조했다.

“주장님이 괜찮다면야, 한번 봐줄게.”

제네비브의 흔쾌한 허락에 아비게일이 화색을 띠었다. 제 쓸모를 확인한 제네비브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저녁은 걱정과 다르게 무난하게 흘러갔다.

제네비브와 폴로 클럽 여학생들은 새로 바뀐 코치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제네비브의 애매한 호칭을 정리하려고 했다(2학년의 알렉산드리아는 조심스럽게 ‘언니’라는 호칭을 제시했다). 그리고 교수들의 연설이 시작되며, 그들은 분위기에 따라 말소리를 죽였다.

후배. 아니, 이제는 동급생인 그들과 대화를 나누던 제네비브는 일순 자신이 시간표를 담당 교수에게 제출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나마 너그러운 헤일리 교수였던 덕분에, 제네비브는 다급하게 다이닝 홀을 빠져나갔다.

헤일리 교수의 사무실 책상 위엔 아직 처리가 안 된 다른 학생들의 시간표가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었다. 제네비브는 안심하며 제 시간표를 그 사이에 넣었다.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이닝 홀로 돌아가려는 그녀를 붙잡은 건 내심 기대했던 사람이 아닌, 시온이었다.

“우리, 오전에 하다 만 이야기가 있었죠.”

시온이 대뜸 말했다. 작게 들어오는 빛을 받은 보라색 눈이 매섭게 빛났다.

“……오전에?”

제네비브는 인상을 쓰며 대체 시온이 언제를 말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제네비브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자신이 아쉐트를 보고 그냥 가 버린 게 생각났다.

제네비브가 대답하자, 시온은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저와 연애해요.”

“…….”

그리고 제네비브는 가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이면 머리가 안 돌아간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런 표정까지 지을 정도예요? 제가?”

시온이 제 얼굴을 매만지며 상처를 받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뭐 어떤 표정을 지었기에…… 제네비브는 제 변호를 하려고 했지만, 곧장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휘둘려선 안 된다.

“아니, 넌 나를 안 좋아하잖아.”

정신 나간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런 대사는 내가 아니라, 가서 아쉐트한테나 하라고. 저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시온은 제네비브가 말을 정정할 틈도 없이 입을 열었다.

“저를 헌신짝처럼 대하는 여자는 처음이어서 호기심을 가지다가 호감을 느꼈다고 하면…….”

“안 믿어.”

“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시온이 기대도 안 했다는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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