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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115화 (115/140)

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15화

민들레 홀씨보다 가벼운 말투는 그가 곧바로 포기할 것처럼 들리게 했지만, 시온은 예상과 다르게 미련을 못 버렸는지 설득을 이어 갔다.

“저 정도면 나쁘지 않은 상대 아니에요? 꽤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시온은 제 날렵한 턱을 매만지며 제네비브의 의견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시온, 네 얼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가 아니라, 너 좋다는 애들을 만나면 되는 일이잖아. 그런데, 왜 굳이 나를……?”

“이제 그런 짓은 그만하고 싶어서요.”

시온은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제네비브는 그가 말한 ‘그런 짓’이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일’을 의미한다는 걸 쉽게 알아챘다.

“저를 조금 더 존중하고 싶어요.”

“아…….”

말끝을 흐리던 제네비브는 틈이 생기자마자 말을 가로챘다.

“네가 정신적으로 성장한 건 정말 기쁜 일이지만, 그 과정에 굳이 내가 있어야 할까? 내 의사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싫어. 관심 없는 사람이랑 연애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유급한 만큼 좀 조용히 살고 싶단 말이야.”

제네비브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친절하게 시온을 타일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약간의 진심을 담아 힘내라는 의미로 그의 어깨를 어색하게 토닥였다.

이미 유급한 처지라, 좋든 싫든 그녀는 당분간 입방아에 오를 예정이다. 시온과 연애하였다가 사람들이 말을 얹는 것도 싫었고, 가깝게 교류하였다가 머릿속이 시끄러워지는 것도 싫었다.

“…….”

물론, 아주 잠깐 시온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에드워드가 흑화할 여지를 없앨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긴 했다.

제네비브는 시온의 진심 없는 고백을 받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인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생각을 애써 죽였다.

‘나중에 여자 주인공에게 후회할 짓 만들지 말고 가라, 제발.’

제네비브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이런 방법은 난감하겠죠. 제 불찰입니다.”

시온은 마치 스스로가 딱하다는 듯 말했다. 그 모습은 제법 동정심을 유발했지만, 제네비브는 그저 이 이상한 대화가 끝났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고백은 아쉐트한테 하고.’

제네비브는 그가 들을 수 없는 덕담을 건네며 인제 그만 이 불편한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실은, 제게 당신이 필요해요.”

하지만, 시온은 아직 말을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제네비브가 뒤를 돌려는 걸 보자마자 다급하게 붙잡는 걸 보면 말이다.

제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걸 숨길 생각조차 안 한 채 당당하게 고백하는 작전은 진작 버린 건지, 시온은 아까보다 제법 비굴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는 없던 진심이 우러나왔다.

그리고, 원작 속 남자 주인공의 이런 모습은 제네비브에게 이상한 기시감을 안겨다 주었다.

“네가 나를 얼마나 알았다고?”

제네비브는 그 기시감을 떨쳐 내며 물었다.

남자 주인공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까지, 그녀는 아직 그와 알고 지낸 시간이나 함께 보낸 일들이 없었다.

“중요한 정보는 전부 알고 있습니다.”

“…….”

“우선 당신의 입이 매우 무겁다는 점에서 이 일과 맞는 사람 같고―.”

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한 발 더 다가왔다. 그의 바람기를 소문내지 않았던 그때를 말하는 걸까.

“유급을 결심할 정도로 가문에 대한 소유욕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네비브는 슬그머니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은 어느새 복작거리는 다이닝 홀 입구에서 멀어져, 어둡고 그림자 진 곳으로 옮겨 갔다.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제네비브 달링, 저도 당신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어요. 무탈하게 학교를 졸업하고, 가문을 물려받아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쓸데없는 짓은 안 하겠다고 약속드리죠.”

제네비브는 시온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 어딘가 익숙한 대사였다.

“제가 그리 좋은 첫인상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

“세텐에서 그랬던 건,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런 거였습니다.”

“…….”

이건 자신이 들어야 할 말이 아니었다. 아쉐트가 들어야 하는 말이다. 제네비브는 이 순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더욱 긴밀한 관계가 되는 장면. 여자 주인공이 그의 불행한 과거사를 들으며 공감을 해 주는 장면이었다.

이는 기차를 탈 때마다 챙겨 읽던 모든 통속 소설에서 약속이라도 하듯 나오는 장면이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감정적으로 깊은 사이가 되는, 흔한 에피소드.

‘맞아. 시온과 아쉐트는…… 계약 연애가 시작이었지.’

순간, 잊고 있었던 소설 속 장면이 떠올랐다.

아쉐트와 감정적으로 깊어진 시온이 아쉐트를 붙잡기 위해 먼저 이런 식으로 계약 연애를 권유한다. 시온은 아쉐트에게 안전한 학교생활을 보장하고, 아쉐트는 그와 칼리지에서 연애한다는 게 계약 내용이었다.

‘근데, 왜 아쉐트가 시온과 연애를 하는 게 그를 돕는 거였더라?’

무엇보다 이런 대화는 아직 너무 일렀다. 원작에서는 중반부가 되어서야 나오는 장면이었다.

“제가 전에 블렛 황실을 조심하라고 했었죠.”

제네비브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시온이 먼저 운을 띄웠다.

“헤이븐 가문과 황실은 사이가 안 좋습니다.”

“……그런 얘기는 들은 적 없는데.”

“그야 그렇겠죠. 황실은 제 가문이 아예 언급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손을 보고 있기도 하고. ……음, 헤이븐 가문이 황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 더 맞겠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연회에서 당신이 헤이븐 가문과 블렛 가문의 접점을 몰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분명 그랬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제네비브는 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문이 황실과 혈연관계라는 걸 나한테 막 알려 줘도 되는 거야?”

제네비브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비밀스러운 가문이라고 하기엔 헤이븐 가문의 이름이나 명성은 제국에서 유명했다.

“황실에서 언급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사람들에게 언급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니까요.”

시온이 말했다.

“헤이븐 가문은 황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지만, 그걸 황실이 잘 못 믿는 눈치더군요.”

“…….”

“그래도 황실이 마음만 먹는다면야 가문 하나쯤 없애는 건 일도 아니죠. 덕분에 헤이븐 가문은 정계에서 한 발 떨어져야 했습니다. 더구나 망나니라는 소문까지 돌아야 그쪽에서 조금 안심했죠.”

그래야 황제감이 아니라는 소문이 도니까. 시온이 구태여 그 이유를 말하지 않더라도 제네비브는 그냥 알 수 있었다.

“참고로 제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알려졌고, 조부님은 도박 중독으로 이름을 떨치셨죠.”

시온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남자가 지도자감이 아닌 사람이 되기 위해선 그 기준이 많이 어렵더군요. 그 관대함이 양쪽에게 갔으면 좋았을 테지만…….”

시온의 말을 들으며 제네비브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세텐에서 굴렀던 게 아본리아에 소문이 났어야 했습니다.”

“…….”

“저번 학기 동안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제 이야기가 퍼지기를 기대했습니다. 세텐이 아본리아와 워낙 멀어야 말이죠. 그 소문이 사교 시즌 동안에도 이어지고, 그렇게 소문이 저를 알아서 헤픈 남자로 만들어 주니까.”

“…….”

“그래야 사교 시즌 동안 소문처럼 행동하고, 칼리지에서 조용히 보낼 수 있으니까요. 물론, 기대한 것과 다르게 아주 조용하게 흘러가긴 했지만.”

시온은 책봉식 연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주 가볍게 제네비브를 나무랐다.

“그러니, 카르디르 사람인 당신과 연애를 하면 황위에 관심이 없다는 게 대충 보이겠죠.”

그 말을 들으며 제네비브는 잊고 있던 설정이 떠올랐다. 황위에 관심이 없다는 걸 보이기 위해 시온이 선택한 건 평민인 아쉐트와 연애를 하는 거였다.

어쩌면 에드워드와 시온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골은 더 깊을지도 모른다. 그저 아쉐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문제가 혼합되어 그 문제가 아쉐트로 드러난 것일 수도 있다.

“……미안. 역시 안 되겠어.”

제네비브는 가까워진 시온을 밀어내며 말했다.

“소문을 내지 않았던 건 정말 미안해. 네 계획이 그런 건 줄 몰랐어.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고, 나는 역시 관심 없는 사람이랑 사귀고 싶지 않아.”

마음을 모르는 척하면서까지 사귈 이유를 모르겠다.

제네비브는 시온을 보았다. 감정적인 설득이 부족한 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제네비브는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나한테 별로 득이 되는 것도 없잖아? 너한테도 득이 될 게 없지.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선택을 정말 후회할 수도 있어. 너도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해관계가 잘 맞는 사람을 찾길 바랄게.”

제네비브는 어색한 손길로 시온을 토닥였다. 두 사람 뒤에 에드워드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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