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17화
‘제 제안을 받아들여 주시면, 책봉식 연회 때 말하려고 했던 걸 알려 드리죠.’
에드워드의 반응에 의문을 채 품기도 전에 제네비브는 곧바로 시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연회장에서 이상했던 부분을 의미하는 거겠지.
혹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물론 전에는 분명 아무런 조건 없이 알려 주겠다는 걸, 이제는 제안을 수락해야지만 알 수 있다는 게 억울하긴 했으나 그래도 손에 쥔 선택지를 늘려서 손해 볼 건 없었다.
무엇보다 제네비브 스스로가 거의 알아낼 뻔하기도 했던 거니, 그 자리에서 승낙하지 않은 것 또한 좋은 결정이었다.
‘아무튼, 시온이랑 한 얘기는 못 들은 것 같네.’
그랬다면 무슨 얘기를 했다는 질문이 아닌, 혹시 시온을 좋아하냐는 등의 질문이 나왔을 테니까.
“책봉식 연회에서 잠깐 시온이랑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 나눈 얘기가 아직 안 끝나서 마저 이야기하려고 했어.”
제네비브는 절반 정도의 사실만 알렸다.
그녀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에드워드가 궁금해할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전부 알려 줄 수 없는 노릇이다. 시온은 연회장에서 황족 모독을 했다. 쓸데없이 싸움을 부추기는 일은 불필요했다.
“그런가요.”
아니나 다를까, 에드워드가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자세히 알려 줬어야 했나? 합리적인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에드워드에겐 부족한 건 같았다.
“응! 나도 별건 없었어.”
일순 모든 걸 그대로 말할까, 고민하던 제네비브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무엇을 얘기하든 앞으로 에드워드와 시온의 관계에 좋을 것 같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얼핏 수긍한 것처럼 보였지만, 미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쉽게 안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제네비브와 같이 들어가는 건 어렵겠죠.”
다이닝 홀 입구 부근에 서성거리던 에드워드가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이 많이 가라앉았다곤 해도, 눈이 많은 칼리지에선 당분간 함께 있는 걸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너 먼저 들어가. 나는 아까 먹어서 소화 좀 시키고 들어갈게.”
“제네비브가 먼저…….”
“괜찮다니까. 너, 저녁 안 먹어서 배고플 거 아니야.”
제네비브는 그 말을 끝으로 에드워드를 다이닝 홀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한순간에 저와 떨어지자, 에드워드는 당황한 것 같았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들어간 이후의 다이닝 홀 안의 상황을 못 봤지만, 가끔 어떤 건 보지 않더라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법이다.
필시 다이닝 홀 안 공기는 에드워드가 등장하며 순식간에 바뀔 거고, 모두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을 쓸 거다.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식사를 이어 가며, 속으로는 부디 그가 제 주변에 앉기를 바라겠지.
‘에드워드는 남자 주인공이니까.’
비록 서브 남자 주인공이더라도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을 만났다.
“…….”
에드워드는 당장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쉐트에게 미친 듯한 끌림을 느끼지 못했고, 그가 말한 대로 길을 잃은 신입생을 도운 것 외의 감정이나 관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직 원작 초반이니까. 사건이 더 전개될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아쉐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어.’
제네비브는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혹시나 모른다는 기분에 취해 해이해져, 에드워드도 죽고 세인트 존 칼리지도 불타면 제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진다.
밝은 태양 같은 아쉐트가 학교생활에 점점 지쳐 가며 어두워지는 게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일어난 일>의 핵심 볼거리였다.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던 소녀가 소설의 흑막인 서브 남주를 죽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건을 겪었던가. 따돌림을 받는 아쉐트를 보며, 에드워드와 시온은 그녀에게 각각 동질감과 연민을 느꼈다.
“문제는 내가 상세하게 기억하는 에피소드가 얼마 없다는 거지…….”
제네비브는 수많은 학생 사이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아쉐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느덧 에드워드가 들어가 자리를 잡고, 시간이 더 흐른 뒤 제네비브는 다이닝 홀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표 제출하고 온 거예요?”
제네비브가 자리에 앉자, 아비게일이 물었다.
“다행히도. 아직 교수님이 확인을 안 한 거 같아.”
“오, 다행이네요. 저번에 캐서린이 기간을 놓쳐서 엄청 고생했잖아요. 아, 그리고 디저트 푸딩이 거의 떨어지려고 해서 미리 챙겼어요! 커스터드 푸딩, 맞죠?”
아비게일이 제네비브 쪽으로 푸딩을 건넸다. 이는 선물 내지 뇌물 같은 거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비게일은 이내 폴로 클럽에 대해 갖고 있던 불안감을 제네비브에게 털어놓았다.
“저는 제가 주장감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저번 대회에 그렇게 실수를 많이 했는데…… 왜 다들 저를 추천했는지 이해가 잘 안 돼요.”
“네가 고민을 하고, 걱정이 많은 건 당연한 거야. 그런데도 그 자리를 네가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오히려 아비게일, 네가 가장 주장으로 적합한 거지.”
제 대답으로 힘을 얻었는지, 아비게일은 안심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제네비브는 소설 전개를 바꿀 힌트를 얻었다.
‘아쉐트한테도 이런 친구가 있으면 되지 않을까?’
의지할 수 있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말이다.
괴롭힘 당하지 않는다면 성격이 삽시에 어두워지지 않을 테고, 에드워드도 아쉐트에게 극단적인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의 흑화도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제네비브는 커스터드 푸딩을 떠먹으며 아쉐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 친구를 만들지 못했는지, 테이블 구석 자리에서 라자냐를 먹고 있었다.
‘……친구 역할은 내가 해야겠지.’
콧대 높은 명문가 귀족들이 몰락 귀족과 친분을 쌓을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러니, 누군가 시작을 해야 한다.
‘결국 이렇게 여자 주인공과 친분이 생기는구나.’
제네비브는 과거, 원작 속 등장인물들과 엮이지 않겠노라 다짐하던 그때의 자신이 지금 제 모습을 보면 어떤 기분일지 생각했다.
‘근데, 정말 이걸로 충분할까?’
고작 자신이 아쉐트의 친구가 되는 걸로 에드워드의 흑화를 막을 수 있을까?
과연 그걸로 에드워드가 아쉐트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계기를 없앨 수 있을까?
그렇게 에드워드는 아쉐트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소설 내내 진행될 감정의 골을 처음부터 차단할 수 있을까?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와 아쉐트의 첫 만남을 방해해, 원작 전개를 바꿨지만 아예 없애진 못했다. 아쉐트는 다시 길을 잃었고, 에드워드는 원작에서 정해 준 대로 그녀의 길 안내를 도왔다.
‘어쩌면, 안 바뀔 수도…….’
갑자기 든 생각에 제네비브는 얕은 우울감을 느꼈다. 결국, 에드워드는 자기 파괴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건가? 도울 방법이 정말 없을까?
제네비브는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는 에드워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드워드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자신에게 들어오는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아니야. 바뀔 수 있어.’
이제 에드워드는 원작과 다른 인물이다.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의 매끈한 이마를 보았다. 눈썹 위엔 아무런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를 보는 어느 누구도 에드워드가 이마를 다쳤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깨끗했다. 가장 확실하던 특징을 제 손으로 고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하나둘 고쳐 나가면 된다.
* * *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등교 준비를 마친 제네비브는 행정실에서 준 서류를 읽었다.
지난 3학년의 모든 성적은 폐기되었고, 3학년 내내 받았던 가산점 역시 전부 사라졌다. 일 년 동안 쌓아 놓은 가산점이 전부 사라진 건 퍽 아쉬운 일이었다. 제네비브는 입맛을 다시며 가방 안에 서류를 집어넣었다.
언젠가 에드워드가 말한 대로 학교 건물로 향하는 복도는 이 시간대엔 사람이 없었다. 세인트 존 칼리지답지 않은 맑은 가을 하늘은 오늘도 이어졌다.
칼리지에 다니는 동안 이런 가을을 처음 겪는 제네비브는 시원한 가을 공기를 들이마셨다.
‘쌀쌀하기는 하네.’
제네비브는 벌써 장갑을 꺼내야 하는 건 아닌가, 살짝 고민했다.
그때, 복도 중간에서 에드워드와 마주쳤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오도카니 서 있던 그는 제네비브가 다가오자 그녀와 발을 맞추며 걸었다.
“오늘은 뭐 할 거예요?”
에드워드가 물었다.
“오늘은 폴로 클럽 홍보를 어떻게 하는지 봐주려고.”
“다시 폴로 클럽 활동해요?”
에드워드의 목소리에서 기대감이 살짝 묻어났다.
“그건 아니야. 어느 학교였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잘하는 학생을 계속 유급시키는 방법으로 파인트리 대회 우승을 많이 시켰나 봐. 그래서 재학 기간이 3년 지난 학생은 출전이 안 된대. 세상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니까?”
물론 우리 학교는 아니야. 제네비브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클럽은 나갔어. 에인젤은 아직 학교에 있으니 말은 가끔 타겠지만…….”
제네비브가 말했다. 설명을 들으면서도 에드워드는 여전히 아쉬운지, 연갈색 눈에서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에드워드, 너는 클럽 활동 계속할 거야?”
아마도 계속하겠지.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제네비브는 예의상 물었다.
“아뇨.”
“……어? 왜?”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너무나 다른 답이 나왔다. 제네비브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펜싱을 안 한다고? 어째서?”
펜싱 하면 에드워드고, 에드워드 하면 펜싱이었다. 제네비브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제가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에드워드가 다소 진지한 어조로 제네비브에게 물었다. 제 말 한마디면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처럼.
“어…… 하고 말고에서 중요한 건 내 의견이 아니라, 네 의견이지.”
제네비브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이야. 에드워드, 네가 계속한다면 좋지만 네가 싫다면 내가 강제할 권한은 없다고 생각해. 너도 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제네비브가 말했다.
“그래도 제가 제네비브의 생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에드워드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
담백하게 불리는 제 이름에 제네비브는 온몸이 간지러웠다. 역시, 에드워드에게 이름이 불리는 건 적응이 안 된다. 제네비브는 빨리 에드워드와 자신이 갈라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제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에드워드는 다른 길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네비브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자,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눈망울로 제네비브와 눈을 맞췄다.
알고 보니 아예 같은 수업을 듣는 건지,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와 함께 1교시 수업이 진행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너도 <정치와 역사>, 들어?”
“네. 재미있어 보이더라고요.”
에드워드가 교실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신설된 강의에 교수가 브라이언 교수여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모두가 저와 에드워드에게 집중했을 거다.
제네비브는 적당한 자리에 앉아 교재를 꺼냈다. 에드워드는 그녀의 대각선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가 수업 듣는 건 처음 보네.’
제네비브는 수업 들을 준비를 하는 에드워드를 보며 생각했다. (정확히 기억나는 건 없지만) 소설은 아쉐트의 불행한 학교 서사에 맞춰졌고, 때문에 에드워드가 수업 듣는 모습은 묘사된 적 없었다.
브라이언 교수가 들어오며 수업이 시작되었다. 간단한 과목 소개를 마친 그는 그 즉시 수업에 들어갔다.
제네비브는 브라이언 교수도 참 한결같다는 생각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에드워드 역시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항시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그는 지금도 같은 자세로 수업 내용을 전부 받아 적었다.
편하게 앉아 수업을 듣는 저와 비교되었다. 제네비브는 잠시 자세를 바르게 바꿀까 고민했지만, 어차피 집중하면 다시 무너질 자세임을 알았기에 턱을 괴며 수업에 집중했다.
“커스틴 군. 수업에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수업이 진행되던 중, 브라이언 교수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밤색 머리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자칫 본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제네비브는 안심했다.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되던 수업은 드디어 끝이 보였다.
‘겹치는 수업은 이거 하나뿐이려나.’
공책을 정리하며 내심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인기 수업 몇 개를 제외하면 제네비브는 대부분 아무도 관심을 안 두는 과목 위주로 수업을 골랐다.
하지만 아쉬움이 무색하게, 제네비브는 에드워드와 온종일 같은 수업을 들었다. 계속해서 겹치는 동선에 제네비브는 에드워드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제 얼굴에 뭔가 묻었나요?”
“너, 이 수업도 들어?”
“……전부터 듣고 싶었던 수업이었어요.”
에드워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자잘한 우연이 반복되면 이는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 고의다.
“수업에 늦겠어요. 어서 들어가요.”
“…….”
그리고 제네비브는 에드워드가 일부러 저와 시간표를 맞췄다는 걸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