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20화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털어놓을 곳이 있으면,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편하잖아.”
제네비브는 격려하듯이 에드워드의 등을 쳤다.
“친구끼리 코치 뒷담도 하고 그러는 거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좋아지려고 했던 기분은 ‘친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급격히 차분해졌다.
‘……친구.’
이처럼 동등한 관계가 되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역시나,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었다. 입안이 썼다.
에드워드는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을 용케 비워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게?”
제네비브가 그런 에드워드를 보며 물었다.
그를 따라 일어난 제네비브는 무릎에 덮고 있었던 외투를 주섬주섬 정리했다.
“여기, 외투 잘 썼어.”
외투를 받은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와 함께 언덕을 내려갔다.
“저로 지탱해요.”
제네비브가 다소 가파른 언덕을 힘겨워하는 걸 본 에드워드는 손을 내밀었다.
제네비브가 어색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그의 손바닥 위로 부드러운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에드워드는 손에 힘을 많이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손이 차요. 많이 추웠어요?”
에드워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시원했는데? 근데, 내 몸이 빨리 차가워지는 편이긴 해.”
“손이 얼음인 줄 알았어요.”
“그건 너무 갔다! 얼음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제네비브가 에드워드가 붙잡지 않은 손을 뺨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에드워드의 주장에 힘을 더 실어 줄 뿐이었다. 손이 뺨에 닿기 무섭게 제네비브는 곧바로 떼어 냈다.
“차갑긴 하네…….”
에드워드는 옅은 패배감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제네비브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언덕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에드워드는 제네비브를 보며 생각했다.
차가웠던 손은 점차 따뜻해졌다. 얼음장 같았던 손이 온기를 되찾았을 때, 둘은 언덕 아래까지 내려갔다.
이제 손을 계속 잡고 있을 이유는 없었지만, 먼저 손을 떼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너무 힘을 줘서 그런가 하는 걱정에 에드워드는 손에 힘을 풀어 봤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계속 그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 아래로 누구 것인지 모를 맥박이 느껴졌다. 맥박은 심장만큼 요란스럽지 않아 다행이었다. 손에 땀이 나면 어떡하지. 뒤늦은 걱정이 들었다.
사심을 섞어 본인이 먼저 건넨 제안이긴 했으나, 이렇게 오래 잡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에드워드는 차마 제네비브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만약 얼굴을 보면 그 순간 제 얼굴이 얼마나 우습게 변할지 에드워드는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좋은 이 순간이 계속되길 바라면서도 지나치게 좋기 때문에 빨리 끝나길 바라는 상반된 감정이 들었다.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제네비브가 손을 떨어트리고 나서야 에드워드는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저녁 식사 때 보자.”
제네비브는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복도를 빠져나갔다.
역시, 제멋대로 행동해서 불편한 건가. 복도에 가만히 선 채로 에드워드는 후회했다.
점점 복도 끝으로 멀어지는 제네비브의 발소리를 듣던 에드워드는 쫓아가서 사과해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사이 발소리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에드워드는 데클렌 총장의 집무실을 목적지로 설정했다.
몇 시간 전에도 걸었던 복도였다. 보통 학생들이 총장을 찾아갈 이유는 없었기에, 복도는 온전히 에드워드의 차지였다.
에드워드는 노을이 들어오는 복도와 복도를 장식하는 거대한 석상들을 구경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별다른 언질 없이 하는 방문이었다. 내로라하는 가문의 학생들도 이런 무례를 저지를 순 없었다.
마음대로 방문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에드워드는 널리고 널린 ‘귀족 학생’이 아니었다. 황태자로서 약간의 직권 남용은 괜찮을 거다. 아마도.
에드워드는 총장 집무실 입구 양쪽을 장식하는 성자의 석상을 보며 문을 두들겼다.
하지만 들리지 않았는지, 돌아오는 답이 없다. 대신, 문은 손가락 한 마디 크기 정도로 조금 열려 있었다.
“…….”
집무실 안쪽에서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메이슨, 메이슨.”
데클렌 총장이 상당히 한심하다는 어조로 메이슨 알렌의 이름을 불렀다.
“대체 자네, 정신머리를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건가? 왜 굳이 퇴학당한 학생까지 언급하고, 에드워드 전하께 안 좋은 기억을 상기시킨 게지?”
조곤조곤하게 타이르는 말투는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 그게…….”
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알렌 코치는 데클렌 총장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미 데클렌 총장의 귀까지 이야기가 흘러간 모양이다. 자신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세상이 알아서 제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
에드워드는 지금 이 상황을 좋아해도 되는지 의아했다. 그는 문을 또 두들기는 대신, 집무실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었다.
“입조심해도 모자랄 판에…… 대체 무슨 정신이었느냐고.”
데클렌 총장이 어렵게 평정심을 유지하며 물었다.
“정직 처분을 내리겠네.”
냉정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네……? 정직이요?! 하지만, 총장님……!”
하지만 알렌 코치는 그마저도 억울한 모양이다. 애써 화를 억누르며 정중하게 말하고 있다는 게 문 너머까지도 느껴졌다.
“그럼, 애들 훈련은 어떻게 합니까. 대회도 있고…….”
“내년 일을 자네가 지금 걱정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군. 거기다, 펜싱 클럽에 코치가 자네만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맞는 말이었다. 에드워드는 그저 알렌 코치가 발굴했기에 그가 담당했을 뿐, 세인트 존 칼리지의 펜싱 클럽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틀린 말 하나 없는 지적에 알렌 코치는 데클렌 총장을 더 설득하는 대신, 자신이 화났다는 걸 온몸으로 표출하기를 선택한 모양이다.
소파에서 일어난 알렌 코치가 쿵쿵거리며 문에 다가갔다. 에드워드는 문이 열리기 전, 순발력 좋게 석상 뒤로 몸을 숨겼다. 이어 문이 열리고, 집무실 안에 있던 빛이 어두컴컴한 복도로 새어 나왔다.
밖으로 나온 알렌 코치는 구시렁거리며 제 신세가 얼마나 비참한지에 대해 중얼거렸다. 그가 한 짓에 비하면 정직 처분은 너그러운 처사였지만, 아직 알렌 코치는 모르는 듯싶었다.
그가 사라졌다는 걸 확인한 에드워드는 그제야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에드워드 학생……?”
예상치 못한 손님을 마주한 데클렌 총장이 낮은 자세로 그를 맞이했다.
“방금 알렌 코치가 지나가던데, 무슨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에드워드는 모르는 척 순진하게 물었다.
“클럽 홍보 시간 때 있었던 일을 들었습니다. 관련해서 내릴 처분을 전했죠.”
목을 가다듬은 데클렌 총장은 곧바로 말했다.
에드워드가 조금 전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알 턱이 없는 데클렌 총장은 그에게 정직 처분을 내린 자신이 조금 자랑스러웠는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정직 처분을 내렸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총장님께서 모르는 부분도 있군요.”
그 말에 데클렌 총장은 ‘그게 무슨 뜻이냐’라는 눈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모른다니…… 무엇을?”
데클렌 총장이 기분 나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렌 코치님이, 그러니까, 메이슨 알렌이 저번 학기에 제게 재미있는 제안을 하더군요.”
에드워드는 나긋나긋하게 설명했다.
이후,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데클렌 총장은 크게 분노했다. 설령 분노하지 않았더라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분노했다는 티를 내야 했다.
지금 존재하는 건 오로지 에드워드의 주장뿐이었지만, 어쨌든 황태자가 한 말이니 무언가의 성과를 보여야 했다.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고 싶네요. 연관이 없는 사람들을 자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래야죠.”
“또, 앞으로 이런 일이 없게끔 칼리지가 신경을 쓰길 바랍니다.”
“…….”
“원래 이런 일은 처음부터 없어야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질책하는 듯한 말투에 데클렌 총장은 에드워드의 말에 동의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에드워드가 데클렌 총장에게 원하는 처분을 알려 주는 동안, 제네비브 역시 제가 할 일을 진행했다.
이제 고작 하루가 지났다는 게 안 믿어진다.
“…….”
에드워드가 잡아 준 손을 멍하니 보던 제네비브는 곧 헤일리 교수가 말했던 클럽 활동과 교환 학생 투어 같은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칼리지에 오면 찾기로 한 책이 있었다. 제네비브는 자연스럽게 도서관 A구역을 향해 걸어갔다.
학생들이 많이 찾는 책이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학생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학교가 배치한 곳이기도 하다.
제네비브는 그중에서도 도서관을 오가며 모두가 한 번쯤 표지를 봤지만 결코 읽은 적 없는 책을 골랐다.
<파인트리 서클>
파인트리 서클의 문장이 화려하게 박힌 책은 다섯 학교 연합의 위대하고도—학교의 주장이었다—긴 역사를 담고 있다.
학교끼리 연합을 만들게 된 계기, 서클에 소속되는 학교를 선정하는 기준 등등…….
입학식처럼 각종 학교 행사와 파인트리 서클에서 들려주던 연설 덕분에, 기실 제네비브는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내용을 얼추 알았다.
‘책이 모든 걸 알려 주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단서는 존재하겠지.’
문득, 시온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고 생각하며 제네비브는 책을 펼쳤다. 역시나,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책은 새 책에서만 나는 냄새가 났다.
책은 다행스럽게도 최신판이었다. 제네비브는 첫 장에 적힌 제작 연도를 보며 궁금하지 않은 서클 연혁을 빠르게 넘기고는 사람들의 얼굴이 빼곡하게 그려진 페이지를 찾았다.
‘밀포드, 밀포드…… 대체 어디에 있니.’
그 콧대 높은 파인트리 서클 행사에서 시상까지 할 정도라면 당연히 초상화 하나 정도는 있는 게 맞다.
당당하게 펜싱 대회 귀빈석에 앉아 있던 밀포드. 심지어 시상까지 할 정도로 나서기를 좋아하는 남자.
“……찾았다.”
역시나, 밀포드는 있었다. 그의 초상화 아래로 그에 대한 정보가 주르륵 적혔다.
윌리엄 밀포드.
생일을 계산해 본 결과, 그는 68세 노인이었다. 제1부대장 출신이라는 정보와 그가 받은 훈장이 길게 나열되었다. 같은 페이지에 있는 모든 귀족과 비교해도 그의 능력은 출중했다.
“명예 훈장까지 받았잖아? 거의 국가의 영웅 수준인데…….”
제네비브는 밀포드에게 수여된 훈장을 읽으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의 직함은 무엇인가. 제네비브는 다시 초상화 아래를 제대로 읽어 보았다.
[파인트리 서클 장학 재단 이사]
“……에드워드는 어떤 장학 프로그램으로 칼리지에 들어왔던 거지?”
의외의 정보에, 제네비브는 자연스럽게 그런 의문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