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23화
“이 사람을 알아?”
눈빛이 반짝이고, 목소리가 올라가며, 표정은 성가심에서 흥미로.
감정이 변화함에 따라 태도는 순차적으로 바뀌었다. 그게 뚜렷하게 보였는지, 제네비브를 본 시온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이 사람이 계속 보인다’라고 이야기했을 뿐이지만, 제네비브에겐 그 말이 마치 밀포드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파인트리 서클 사람 아닙니까.”
하지만, 시온은 너무나 간단하게 제네비브의 기대를 배신했다. 맥 빠지는 답을 들은 제네비브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런데 달링 양께서는 이런 형식적인 답을 원하시는 게 아닐 테고.”
시온은 그런 제네비브를 보며 익살맞게 말했다.
“뭔가를 더 알아?”
“어때 보이는데요?”
시온은 알려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은 어조로 되물었다.
이런 사소한 말장난에서까지 가타부타할 힘이 없었던 제네비브는 그를 더 상대하는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알려 줄 거면 됐네요. 내가 알아서 하고 말지.”
제네비브는 몸을 꼬물꼬물 움직여, 시온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나무가 만든 그림자에 걸쳐진 제네비브는 <파인트리 서클>에 머리를 처박았다. 시온에게서 답을 듣는 것보다 느리겠지만, 그래도 밀포드가 받은 훈장을 알아보면 또 다른 단서가 나올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한 건 명예 훈장이야.’
제네비브는 밀포드 초상화 아래에 적힌 기나긴 목록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경력을 보았다.
밀포드의 명예 훈장 수여 연도를 확인한 제네비브는 다시 책을 읽는 게 나을지, 아니면 수십 년 전 신문을 찾아보는 게 좋을지를 고민했다.
그런 제네비브를 답답한 눈길로 바라보던 시온 헤이븐이 손을 뻗어,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을 덮어 버렸다.
“야……!”
“책이 모든 걸 알려 주진 않는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성을 내려는 제네비브를 보며 시온이 말했다.
“그림 한 장이 말 천 마디를 대신한다고, 제 제안을 수락하면 궁금증은 전부 해결될 겁니다. 연회 일도 그렇고, 저 밀포드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고.”
결국 밀포드에 대해 알고 싶으면 제 제안을 승낙하라는 소리다. 똑같은 소리를 계속해서 들으니 신경증에 걸릴 것만 같았다.
“아본리아 친구들한테 물어봐도 대답 안 해 주죠? 책도 딱히 정보랄 것도 없고.”
그가 하는 말을 전부 무시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시온이 덧붙여 말했다.
그런 점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 몰랐다.
시온이 ‘표면적인’ 밀포드만을 알고 있는 게 아닌, 찝찝한 부분까지 안다는 걸 알아챈 제네비브는 그를 보았다.
“이제 구미가 당기나요?”
드디어 제네비브에게 맞는 미끼를 찾았다는 양, 시온은 조금 기쁜 기색으로 물었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아니.”
하지만, 제네비브는 거절했다.
예상에 없던 즉각적인 거절에 시온은 당황했다.
“먼저 밀포드가 누군지 말해. 그러면 네 제안을 생각해 볼게.”
역제안을 들은 시온은 떫은 표정을 지었다. 제네비브는 패배감을 느끼는 그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만약 시온이 이 이야기를 마이언에서 했다면 제네비브는 곧장 승낙했을 거다. 그땐 에드워드가 아직 밀포드의 수중에 있었을 때고, 밀포드 견제를 얼마나 해야 할지 저울질하는 시기였으니.
하지만, 지금 에드워드는 황실에 있다.
아무리 황실과 연이 깊어도, 밀포드가 전처럼 에드워드에게 영향을 끼치는 데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제가 손해 보는 장사인데요? 받아 준다, 도 아니고 생각이라니. 전과 다를 게 없잖아요.”
시온이 열을 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네가 흥정할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제네비브가 말했다.
자신이야 개인적인 호기심을 푸는 동시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지만, 시온은 황실의 견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입장이다.
더 절박한 쪽이 지는 수밖에 없다.
“……못 이기겠군요. 알겠습니다. 알려 드리도록 하죠.”
제네비브가 한 말에 틀린 점이 없음을 아는 시온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해묵은 궁금증이 드디어 풀린다.
그간 밀포드 하나를 알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과정이 거쳐 갔는가. 제네비브는 시온을 바라보며, 그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온은 기대와 다르게 침묵을 이어 갔다.
“……제게 할 말이라도?”
시선이 부담스럽군요. 시온이 능글맞게 말을 덧붙였다.
“지금 알려 주려던 게 아니었어?”
“말했잖아요. 직접 보는 게 더 빠를 거라고. 지금 이곳엔 밀포드는 없잖습니까.”
시온은 마치 당연한 상식을 가르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면…….”
“외출해야죠. 주말에 나갑시다. 토요일은 어떤가요?”
시온이 물었다.
제네비브가 학교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걸 알 턱이 없는 사람다운 제안이었다.
“……나갈 거면 외출 신청해야 해.”
사실을 상기한 제네비브는 태평하게 잔디에 앉아 있는 시온을 보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걸 벌써부터 합니까?”
“우드 칼리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세인트 존 칼리지는 미리 신청해야 하거든.”
“비효율적이군요. 뭐, 우드 칼리지 주변에 번화가가 있었으면 거기도 비슷했을 것 같습니다.”
시온이 귀찮은 티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 신청을 위해, 제네비브는 시온과 함께 기숙사까지 동행했다.
“……근데, 어디로 갈 거야? 수도야? 많이 위험해?”
제네비브는 불안한 마음에 물었다. 수도만 아니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안전한 곳이기만 하면…….
“오, 달링 양. 그는 당신의 귀족 친구들도 입에 올리기를 꺼리는 사람인데.”
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당연히 위험한 곳이죠. 물론, 수도입니다.”
마음속에 품었던 일말의 희망이 그렇게 사라졌다.
‘수도에, 위험한 곳이라니…….’
부모님께 걸리는 그 즉시 졸업장이고 뭐고 카르디르로 돌아가야 할 판이다.
개학 이후 첫 번째 주말에 외출하는 건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첫 한 달 동안에는 어떻게든 칼리지에 눈과 귀를 심어 놓았을 텐데…….
“밀포드가 누군지 알기 싫으면 됐고요.”
영 좋지 못한 그녀의 반응을 보던 시온은 미련 없다는 듯 말했다.
“……아, 아니야. 갈게.”
제네비브는 본능적으로 이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임을 알았다.
“대신, 내가 사정이 있어서 칼리지 외출을 들키면 안 되거든. 그러니까, 외출 신청은 너만 해.”
“당신은요?”
“몰래 나가야지. 이 복도만 꺾으면 사감 사무실이야. 잘 기억해 둬.”
제네비브가 말했다.
기숙사 사감 사무실은 건물 1층에 있었다. 학생들 눈에 안 띄는 곳에 배치된 사무실은 입구부터 안락했다.
안쪽에서 허락이 떨어져서야 제네비브는 문을 열었다.
“…….”
그런데, 기숙사 사감과 먼저 대화를 나누는 학생이 있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제네비브는 봄꽃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보며 생각했다.
피폐 소설 주인공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도 이미 옛말이었다.
‘빨리 아쉐트한테 반해서 나 좀 내버려 뒀으면.’
제네비브는 뒤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시온을 보며 빌었다.
제네비브와 시온을 본 기숙사 사감이 곤란한 표정으로 아쉐트에게 마무리 말을 내뱉었다.
“하아…… 고집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부원을 전부 채우고 나서 요청하든 말든 하세요.”
그는 빨리 나가라는 듯 손짓하며 아쉐트를 내쫓았다. 사감의 말이 끝나자, 아쉐트는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제네비브와 시온을 지나쳤다.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었는데도 저렇게 예쁠 수가 있지? 감탄을 저절로 나오는 미모였다.
“무슨 일인가요?”
제네비브는 닫히는 사무실 문을 힐끔 보며 물었다.
이상한 기숙사 방을 배정 받았나? 아니면, 벌써부터 괴롭힘을 받는 걸까? 여러 고민과 걱정이 머리를 습관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아, 학생이 클럽 창설 관련으로 문의해서요. 아무튼, 무슨 일이시죠?”
다행히 과민 반응인 것 같았다.
평범한 답을 들은 제네비브는 한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토요일 외출 신청을 하러 왔어요.”
“알겠습니다. 학생 이름과 학년은 어떻게 됩니까?”
“저 말고, 이 학생이요.”
제네비브는 시온을 앞으로 끌며 말했다.
“2학년의 시온 헤이븐입니다.”
기숙사 사감은 두툼한 학생 명부에서 시온의 이름을 찾아낸 뒤, 그에게 외출권을 끊어 줬다. 관련하여 주의 사항까지 전달 받은 둘은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외출 신청은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별로 안 어렵지?”
“네, 뭐…….”
제네비브는 시온의 대답을 들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사무실 복도에는 아직도 아쉐트가 있었다. 그녀는 보는 사람까지 불안해질 정도로 복도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우리, 저번에 봤었지? 사감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제네비브는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예상하지 못한 대화였는지, 발걸음을 멈춘 아쉐트가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 클럽 창설을 하려고 하는데, 담당 교수님을 찾아야 해서요.”
아쉐트가 힘든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의외의 답을 들은 제네비브는 그녀가 원작에서도 클럽에 소속이 되었는지 생각했다.
아무 클럽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러나 희미한 기억과 대조해 봤자 쓸모가 없다는 걸 깨우친 제네비브는 마저 말을 이어 가라는 듯 아쉐트에게 눈짓했다.
“행정실은 먼저 담당 교수를 찾아야 한다고 하고, 교수님들은 먼저 부원부터 모으라고 하셨는데…….”
아쉐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말하지 않더라도 이유는 쉽게 짚인다.
아마 친구를 만드는 건 실패한 것 같았다. 다른 학생들이 그녀를 피하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장학생’이라는 신분이 움츠러들게 하는지 몰라도. 왜 에드워드가 아쉐트에게 동질감을 느꼈는지 알 것 같았다.
제네비브가 안타까워하는 사이, 시온은 남자 주인공답지 못하게 아쉐트에게 무관심을 선사하며 복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쉐트는 진짜 쟤를 왜 좋아한 거지? 시온을 한번 째려본 제네비브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무슨 클럽?”
“아……! 별건 아니고…… 요즘 사교계에서 가십지가 유행이잖아요. 학교에서도 그런 소식지를 만들어 보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요.”
“여기도 신문 클럽이 있는 것 같던데.”
그때, 대뜸 시온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더 칼리지>도 좋기는 한데, 너무 정제된 느낌이라서요! 전부 다 읽지는 못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쉐트는 최선을 다해 <더 칼리지>를 비하하는 듯한 표현을 배제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애초에 <더 칼리지>는 교내 논쟁에서 한 발 떨어지려고 하니, 언론의 역할을 할 때가 극히 드물었다.
‘이 대화를 계기로 시온이 아쉐트한테 흥미를 가졌으면 좋을 텐데…….’
제네비브는 아쉐트가 하는 말을 듣는 시온을 보며 생각했다.
그 순간, 생각 하나가 제네비브의 머리를 스쳤다. 시온이라는 혹을 떼어 내고, 약간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묘수.
“아쉐트, 최소 모집 부원 수가 몇 명이야?”
“네 명이에요.”
아쉐트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일단 내가 가입할게. 가산점 관리도 해야 해서…… 나머지 부원들은 천천히 모아 보자.”
제네비브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말했다.
“오, 세상에! 정말인가요? 그러면 벌써 절반이나 모집한 거예요!”
아쉐트가 기쁘게 말했다.
그녀에게서 펜을 건네받은 제네비브는 벽에 종이를 대고, 부원 칸에 제 이름을 썼다.
“무슨 클럽이라고 했죠?”
아니나 다를까, 짐작대로 시온이 반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