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24화
아쉐트는 신난 목소리로 창설하려는 클럽 개요와 목적을 설명했다. 수십 번을 연습한 듯, 그녀는 막힘없이 말했다.
시온은 얼핏 경청하는 듯 보여도 애당초 관심이 없던 사람답게 정신이 다른 데 가 있었으나(그의 자색 눈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다행히 제 포부를 밝히는 데 빠진 아쉐트는 그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괜찮은 클럽처럼 들리는군요.”
길디긴 설명이 끝날 때쯤, 시온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제네비브에게서 종이와 펜을 가져간 시온은 그 아래 칸에 제 이름을 작성했다.
“이제 한 명 남았네요!”
아쉐트가 기쁘게 말했다.
의욕이 생기다 못해 넘쳐 나는 듯, 그녀는 여자 주인공다운 화사한 미소로 두 사람에게 화답했다.
“힘내서 마지막 부원까지 모집해 볼게요. 두 분 모두 너무너무 고마워요.”
아쉐트는 금색 눈동자를 반 즈음 접으며 해맑게 말했다.
“…….”
무언가에 홀린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두 뺨까지 붉혀 가며 좋아하는 아쉐트를 보자니, 제네비브는 불순한 목적으로 클럽에 가입한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그와 동시에 자신 덕분에 아쉐트가 기뻐한다는 사실에 뿌듯함도 느껴졌다.
아쉐트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그녀를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랑스러운 여자 주인공.
‘아무튼, 이걸로 시온을 떼어 내면 반은 성공한 거야.’
제네비브는 무신경한 시온과 멀어지는 아쉐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적성에 안 맞는 클럽에 가입한 본 목적은 이거였다. 시온과 아쉐트의 접점을 만들어 주고, 그들이 원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로 죽지 못해 사랑하는 사이가 되게 하는 것.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니만큼 둘은 붙여 놓으면 알아서 사랑에 빠지고 말 거다. 그렇게 시온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의 관심은 아쉐트에게 넘어가게 될 거고.
또 어쩌면 두 사람은 원작과 다르게 계약 연애가 아닌, 평범한 연애로 관계를 시작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시온이 나를 놔둔다는 거지.’
조금만 버티면 연애 타령을 그만 들어도 된다. 운이 좋으면 그가 대가로 걸었던 정보들을 공짜로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저를 아주 정열적인 눈으로 바라보시네요.”
시온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농담입니다, 농담.”
시온은 멀어지는 제네비브를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외출 신청은 했는데…… 그러면 달링 양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같이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일곱 시에 역에서 만나자.”
“굉장히 이르군요.”
“외출 신청도 안 했는데, 나가다가 학교 애들이라도 마주치면 안 되잖아. 첫 주라 수도로 돌아가는 학생도 많단 말이야.”
제네비브가 말했다.
“분부대로 하죠.”
시온이 상급자에게 하듯 깍듯이 말했다.
“학교 투어는 여기까지 할게. 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거나, 교환 학생 투어 때 또 오거나 해. 주말에 보자.”
제네비브는 마지막 문장을 빠르게 덧붙이며 여자 기숙사 계단을 밟았다.
고민이었던 가산점과 짐 같았던 시온이 클럽 가입 하나로 해결될 줄 몰랐다. 때마침 복도를 서성거렸던 아쉐트가 천사처럼 느껴졌다.
바닥에 풀다 만 상자가 발에 차였다. 제네비브는 저번 학기와 똑같은 구조로 배치된 기숙사 방의 등을 켰다.
제네비브는 빌려 온 책과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외투까지 의자에 걸어 둔 후,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했다.
아쉐트가 창설한 클럽에 가입하는 기회를 고작 시온을 떼어 내는 데만 써서는 안 된다. 여자 주인공과 접점이 있으면 원작 비틀기가 여러모로 용이해지니까.
그러니 먼저 해야 할 일은, 클럽 활동을 발판 삼아 아쉐트와 친해지는 거다. 경계심을 세웠던 아쉐트가 마음을 열 기미가 보이는 이때를 잘 활용해야 한다.
‘그러면서 아쉐트의 학창 생활을 편하게 만들어야 하고…….’
아쉐트와 친해져서 그녀의 학교생활을 편하게 만들어 놓으면 ‘여자 주인공의 따돌림’을 계기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원작 사건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아쉐트는 따돌림을 받지 않으니, 에드워드는 아쉐트를 보며 동질감이나 동정심을 느끼지 않을 거고, 호감으로 발전되는 감정이 사라지니, 에드워드가 방화나 살인을 저지를 확률도 낮아진다.
“너무 이상적인 결말이라 그대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그 사랑스러운 여자 주인공을 다시 떠올리자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가 순탄하게 변할 것 같지 않았다.
이 세계에는 원작이라는 거대한 줄기가 존재한다. 고작 동정을 느낄 계기를 제거했다고, 에드워드가 아쉐트를 안 좋아하게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에드워드가 아쉐트를 좋아하는 것 같으면 바로 상담해 줘야 하고.”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연애 상담에 실패한다면…….’
제네비브는 진지하게 머릿속으로 최악의 상황을 그려 보았다.
불타오르는 학교와 죽어 가는 학생들. 그리고, 결국 그토록 사랑하던 아쉐트의 손에 목숨을 잃는 에드워드.
“……절대로 실패해선 안 돼.”
제네비브는 다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 * *
주말에나 볼 줄 알았던 시온을 그다음 날 아침부터 다시 봐서 그런가, 금요일 하루는 시작부터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자리, 없죠?”
시온이 아침을 담아 온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자리 있는데.”
실제로 폴로 클럽 부원들과 먹기로 했기에, 제네비브는 약간의 자신감을 담아 말했다.
“친구들 자리야.”
“다들 가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자리가 있든 없든, 제네비브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시온이 의자에 앉으며 포크로 한쪽을 가리켰다.
포크의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의 주장대로 같이 아침을 먹기로 한 아비게일과 캐서린, 그리고 루시가 은근슬쩍 동선을 틀고 있었다(심지어 아비게일은 잘해 보라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없는 것 같네.”
제네비브는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젠 그를 내쫓는 것만큼 무의미한 시도도 없다는 걸 알기에 제네비브는 조용히 샐러드를 먹었다.
“학교가 참 시끄러워요.”
대화 없는 아침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시온은 어림도 없다는 듯 대화를 시작했다.
“그건 그래.”
다이닝 홀이 유독 어수선했다. 학생들의 대화로 활기를 띠는 게 아니라, 무언가의 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안 좋은 쪽으로) 붕 떴다.
“꽤 유명한 코치였나 보군요.”
“유명하기는……. ‘알렌’이라는 이름을 오늘 처음 듣는 학생이 대다수일 텐데.”
그리고 이는 전부 메이슨 알렌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학교에 부임했던 그가 어제저녁에 해고되었다는 소식이 학생들을 강타했다.
본디 클럽 관계자란, 클럽 소속인 학생이 아니고서야 이름조차 모르는 게 대부분이다. 주기적으로 물갈이가 되는 게 클럽 지도진이니만큼 모든 학생이 관심을 가질 만큼의 큰 사건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의 퇴임 소식이 이렇게나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건 역시 화요일에 있었던 소동 때문이다.
“듣자 하니 어제부터 클럽 관계자들이 총장실로 불려 갔다는데.”
학교는 에드워드의 바람대로 자세한 내막을 밝히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정리할 때가 되었을 뿐이다’라고 설명하며 (실제로 알렌 코치는 상당히 오래 근무한 편이었다), 에드워드가 겪은 것과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지 착실히 조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보를 일부만 제공하는 데서 문제점이 발생했는데―.
“황태자 전하를 건들면 큰일 나겠군요.”
바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거였다.
알렌 코치는 그저 부당한 일을 벌여 해고된 것인데도, 에드워드를 건들이면 어떻게 되는지 예시를 보여 주는 것처럼 그려졌다.
“다 이유가 있겠지.”
제네비브는 알렌이 얼마나 미친 짓을 저질렀는지, 내막을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에드워드를 변호했다.
“뭐, 당신이 그렇다면야. 그나저나, 그 무슨 소식지 클럽은 새 부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시온이 고기를 집어 먹으며 물었다.
아쉐트와 이어 주겠다는 제네비브의 원대한 계획을 알 리 없는 시온은 그녀의 호감을 사려는 건지, 클럽 활동에 대한 기대감을 애써 꾸며 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던 그를 기억한 제네비브는 “못 찾으면 우리가 도와줘야지.”라고 대답하며 시간표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수업이 겹치려나?’
아직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고, 오늘이 첫 수업인 과목도 있었다.
왠지 모르게 오늘도 에드워드와 같은 수업을 들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시간표를 보던 제네비브는 곧 시선을 돌려, 에드워드를 찾아냈다.
“승마 좋아해?”
“시간 나면 우리 클럽 방문해 봐.”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은 놀라울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했다.
알렌 코치가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황태자가 제 클럽에 있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광고 효과가 존재한다는 걸 빠르게 파악한 용감한 자들이 그에게 제 클럽을 권유하고 있었다.
‘앞으로 같이 식사하긴 어렵겠네.’
그가 피곤하겠다는 감상과 함께, 제네비브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에드워드를 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