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25화
오전 수업은 통치학이었다.
제네비브가 아침을 먹으며 가졌던 기대를 충족시키듯, 에드워드는 교실 안으로 얼굴을 비쳤다. 교수보다 십여 초 이르게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의 오른쪽 대각선에 앉았다.
이름이 불리는 것과 함께 수업이 시작되었다.
불의의 사건으로 학교를 떠난 오데인 교수의 자리는 부교수였던 슈미트 교수가 차지했다. 그는 30분가량의 수업 설명을 끝내고서야 본론을 꺼냈다.
“중간고사는 과제로 대체하겠습니다. 여태까지 발표된 통치학 논문에서 하나를 골라, 방법론적 비평을 하면 됩니다. 어느 논문을 고르든, 어느 시각으로 작성하든, 그리고 얼마나 많이 쓸지는 학생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물론 수업에서 배운 부분을 적용한다면 더 좋겠죠.”
슈미트 교수는 첫 수업부터 중간고사 대체 과제를 알려 줬다. 그는 시간이 많은 만큼 양과 질을 눈여겨보리라고 선언했다.
제네비브는 칠판에 논문을 찾을 수 있는 도서관 구역을 적는 슈미트 교수를 보며, 이번엔 또 얼마나 오랫동안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계산했다.
‘성적 관리도 잘해야지.’
에드워드의 흑화를 막았다고 해도, 졸업할 성적이 못 되면 그건 성공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보통 중간 과제는 차일피일 미루는 게 학생들의 암묵적인 규칙이자 행동 지침이었지만, 괜찮은 논문을 찾으려면 빨리 시작하는 게 좋았다.
교실의 모든 학생은 중간시험이 없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오데인 교수는 허용하지 않았던 일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같이할 사람 찾기는 글렀군.’
제네비브는 과제 주제조차 메모하지 않는 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같이 과제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과제 기한이 코앞까지 닥쳐온 게 아닌 이상, 친구들과 함께하는 과제 하는 걸 선호하는 제네비브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몇 주 지나면 다시 공지하겠지만, 그래도 모두가 주제마저 안 쓰는 걸 보면 당분간 과제를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런 걸 보면 편한 교수가 꼭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학생들은 슈미트 교수를 앞에 두고 작게 속닥거리거나, 턱을 괴며 꾸벅꾸벅 졸았다.
‘정말 같이할 사람이 없는 건가?’
주변을 둘러보던 제네비브는 (무의식적으로) 눈길을 주지 않으려 피하던 에드워드 쪽을 보았다. 그는 교실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자세로 앉아 수업을 듣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제때 할 것 같은데.’
제네비브는 그런 에드워드를 보며 생각했다.
오데인 교수가 그를 편애해서 점수를 높게 줬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완벽한 수업 태도였다. 제 수업을 경청하는 학생을 싫어할 선생이 존재할까.
‘그리고 시간표도 완전히 겹치기도 하고.’
서로가 비는 시간을 맞추는 것도 쉬울 거다. 마침 수요일 오후 수업도 텅 비었으니까.
쉬는 시간에 물어볼까. 머릿속으로 상상해 본 제네비브는, 곧 그만큼 비현실적인 가정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에드워드는 언제나 주변 사람의 이목을 끌고 다니는 이가 되었고, 전처럼 그와 개인적으로 대화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간 틈틈이 그와 ‘우연히’ 마주쳐서 대화를 나눴던 게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제네비브는 제 손가락 사이로 펜을 굴리다가, 이내 노트에 무언가를 사각사각 적는 에드워드를 보고, 칠판에 단어를 적어 가는 슈미트 교수를 보았다.
아직 과제 주제와 도서관 2B 구역만을 적은 새 공책으로 시선을 돌린 제네비브는, 짧은 고민 뒤에 무언가를 써 내렸다.
[같이 과제 할래?]
물론, 약간의 사심은 존재했다. 사심이 존재해서 탄생한 쪽지였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잠시 제가 적은 문장을 평가한 제네비브는 노트를 찢어 대충 접었다. 제네비브는 그럭저럭 쪽지의 모양새를 띤 종이를 대각선 책상을 향해 던졌다.
“……?”
종이는 에드워드의 책상 위로 툭 떨어졌다.
난데없이 떨어진 종이를 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에드워드가 쪽지를 펼쳐 읽었다.
내용을 읽은 에드워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돌려, 제네비브를 보았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쭉 올려 미소를 지어 보고는 펜으로 종이 위를 끄적거렸다.
어설프게 접힌 종이가 다시 제네비브에게로 왔다.
[좋아요. 수업 끝나고 도서관에서 볼래요?]
깔끔하고 어른스러운 서체가 답을 알렸다. 승낙을 본 제네비브는 미소를 지으며 빈 공간에 문장을 적었다.
[프란시스 부인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Long Live the Librarian).]
그 농담을 읽은 에드워드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 * *
수업은 장장 두 시간 만에 끝났다.
그사이 손바닥 뒤집듯 ‘오데인 교수의 수업 방식이 더 낫다’라는 학생들의 뒤바뀐 평가를 들으며 제네비브는 교실을 나와, 먼저 도서관에 도착했다.
제네비브는 구불구불한 나선형 계단을 올라, 도서관 2층에 도달했다. 슈미트 교수가 알려 준 2B구역은 외곽에 있어서 1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논문을 찾아보던 제네비브를 방해한 건 아래쪽에서 들려온 소란이었다. 제네비브는 소리를 따라 난간에 기대며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1층에는 에드워드와 에드워드를 졸졸 따라다니는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도서관에 올 이유가 없어 보이는 남학생들은 프란시스 부인의 눈빛과 호통을 받곤 뿔뿔이 흩어졌다.
“친목은 도서관에서 하는 게 아니랍니다.”
프란시스 부인이 딱딱하게 말했다.
“전하께서도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건 자제해 주시길 바라요.”
“죄송합니다.”
에드워드에겐 다소 억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프란시스 부인이 하는 말을 부드럽게 받아 줬다.
에드워드는 사서 업무를 위해 떠나는 프란시스 부인을 보고서야 2층으로 올라왔다.
“세인트 존 칼리지 인기쟁이네.”
제네비브는 웃으며 말했다.
“조금 지나면 제가 익숙해지겠죠.”
에드워드는 쑥스러운 듯 머쓱하게 말했다.
제네비브가 맡아 놓은 책상에 에드워드가 책과 가방을 내려놓으며, 본격적인 과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생각해 둔 논문은 있어? 오데인 교수님은 논문이 주 과제 재료가 된 적이 없어서……. 아니, 실은 모든 교수님이 그렇지. 이런 유형은 처음이라,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릴 것 같네.”
제네비브는 난감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슈미트 교수님은 이번이 첫 정식 수업이라 성향 파악이 어렵기도 하고요.”
두 모범생은 서로의 고민을 나눈 뒤에 B구역 책장을 닥치는 대로 살펴보았다.
“1학년 때부터 자주 나오는 학자를 찾아보면 더 쓸 내용이 있지 않을까요. 페터스나 알키비아데스 같은. 유명한 데엔 이유가 있으니까요. 그게 아니면, 슈미트 교수님 논문을 써도…….”
“당사자 앞에서 논문을 비평하라니…… 나는 못 할 거 같아.”
제대로 못할 거면 차라리 제출을 안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붉은색 잉크로 빼곡하게 적힐 피드백을 상상하자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요? 저는 그래서 더 써 보고 싶은데. 제대로 쓰기만 하면 점수가 잘 나오잖아요.”
“도전 정신이 강하구나…….”
나는 1학년 때 교수님 논문 인용하다 망쳐서, 그 뒤로는 절대로 안 해—.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제네비브의 안색은 사뭇 어두워졌다.
“그래도 빨리 정해야 갈피가 잡힐 텐데.”
“급할 게 뭐가 있어! 다음 수업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제네비브는 조급해 보이는 에드워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와 다르게, 그 말을 들은 에드워드는 크게 당황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태평하게 같이 수업을 듣던 지난 며칠이 무색해질 정도로, 에드워드는 알아챌 줄 몰랐다는 듯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눈은 갈 곳을 잃어 방황했다.
“그…… 그게.”
그리고 상대가 당황하면, 본인마저 당황하게 되는 법이다.
제네비브는 말을 더듬었다.
숨길 생각이었던가? 그보다, 숨길 생각이 아예 없던 거 아니었어? 괜찮다고, 좋았다고 해야 하나?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제네비브는 이 일을 별것 아닌 걸로 만들기로 했다.
‘시간표를 전부 맞추는 게 별일 아닐 리 없지만…….’
생각을 정리한 제네비브는 입을 열었다.
“……아는 친구가 있으면 편하니까, 그런 건 줄 알았지.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는 건 제네비브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대답 덕에 머릿속이 정리가 되었는지, 안절부절하던 에드워드는 점차 평온함을 되찾았다.
“뭐…… 그런 거죠.”
에드워드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제네비브는 그저 그가 평정심을 되찾아 다행이라고만 여겼다.
“아, 그리고…… 클럽을 가입하게 되었어.”
제네비브는 제 순발력을 칭찬하며 주제를 자연스럽게 바꿨다. 계속 시간표 얘기를 하다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갈 것 같았다.
“무슨 클럽이에요?”
침울한 그림자가 살짝 드리워졌던 연갈색 눈동자가 일순 반짝였다. 에드워드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직 정식 클럽은 아니야. 사교계 잡지 같은 건데, 학교 소식지야. 아쉐트가 창설하려고 하는 클럽인데, 인원이 부족해서 머릿수 채워 주려고 가입했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제네비브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아쉐트요?”
에드워드는 마치 처음 듣는 이름인 양 반응했다.
“그, 전에 네가 길을 안내해 줬던 여자 신입생 있잖아. 분홍색 머리카락에 엄청 큰 금색 눈동자 갖고 있고! 진짜 예쁘게 생겼는데…… 목소리도 엄청 곱더라.”
제네비브는 어제 만난 아쉐트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 엄청 귀엽고 사랑스러웠지. 제네비브는 마치 책에서 좋아하는 장면을 회상하는 사람처럼 아쉐트를 입에 담았다.
“제네비브가 더…….”
하지만 제네비브가 자신만의 세상에 너무 빠져 버린 나머지, 그녀는 에드워드가 하는 말을 미처 못 들었다.
“응? 뭐라고 했어?”
나를 불렀던 것 같은데. 제네비브는 암녹색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물었다.
에드워드는 그런 제네비브를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작은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속 얘기해 줘요.”
‘……역시, 여자 주인공에게 끌리는구나.’
제네비브는 흥미를 품고 묻는 에드워드를 보며 생각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생겨나는 아쉐트를 향한 부러움을 애써 누르며, 제네비브는 운을 띄웠다.
“으응, 알았어. 아무튼, 아쉐트 얘기를 하고 있었지. 그래서, 에드워드 너는 아쉐트를 기억해?”
에드워드는 어떻게 반응할까.
제네비브는 저도 모르게 숨까지 참으며 에드워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네. 그 신입생이요.”
하지만,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생각하던 것과 다르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