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30화
제임스는 잘 학습한 사람처럼, 제네비브의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
물론 ‘황급히’ 피했다는 말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 제임스가 자연스럽게 못 본 척했다는 것엔 이견이 없었으나— 그의 상대는 파인트리 행사 때 친한 척하려는 학생이 아닌, 그를 3년 동안 봐 온 제네비브였다. 어색한 연기는 티가 나는 법이었다.
이즈음 되니 답답해서 화가 나려고 한다. 제가 제임스에게 화낼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제네비브는 최소한의 설명이 듣고 싶어졌다. 불만이 있다면 자신에게 쏟아 내기를 바랐고, 원망이든 짜증이든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무시를 당하는 게 더 싫었다.
“뭐 하십니까? 그쪽이 아니라 이쪽—.”
“일 분만.”
시온은 길을 이탈하는 제네비브의 뒤를 쫓아갔다.
제네비브는 친구를, 혹은 친구였던 상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녀는 제 로브가 벗겨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며, 테수스의 인파를 뚫고 걸음을 옮겼다.
밤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섞여 들어간 제네비브는, 제임스가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먼저 붙잡을 수 있었다.
“제임스, 얘기 좀 해.”
긴장한 목소리가 나왔다.
“…….”
금색 눈이 움직여, 제네비브를 보았다.
드디어 제임스가 제 존재를 인지한다.
하지만 제네비브가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얼마 가지 못해 끝나 버렸다.
다시 마주한 제임스는, 그야말로 낯선 사람이었다.
“……오랜만이네. 제네비브.”
제임스는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인사를 건넸다.
익숙한 목소리와 표정, 그리고 억양이었다.
한결같은 모습이었으나— 이에 문제가 있다면 제임스는 저런 말투를 귀찮은 사람을 상대할 때 썼다는 점이었다. 그가 이런 가공된 친절로 상대방을 대할 때면, 무리는 눈치 없는 상대에게 시달려야 하는 제임스를 동정하고는 했다.
그러니까, 저런 식으로 대답하는 건 명백히 선을 긋는 행동이었다.
이 상황에서 ‘눈치가 없는 귀찮은 상대’는 제네비브였다. 제네비브는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제임스를 오래 봐 왔기에 알고 있는 행동이었고, 그 역시 제네비브를 오래 봐 왔으니, 그녀가 알아챘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네가 왜 이런 곳에 있냐는 둥 혼자 왔냐는 둥 이어지는 질문은 없었다. 대화를 더 이상 이어 가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보였다.
막상 제임스와 대화할 순간이 왔지만, 이렇게 대하는 걸 보니 말이 선뜻 안 나왔다.
제네비브를 상대한 제임스는 미련 없이 시선을 테수스 거리로 옮겼다.
제게 아무런 말도, 관심도 안 주는 제임스를 보며 제네비브는 불안하게 아랫입술을 뜯었다.
“돌발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고—.”
이 숨 막힐 것 같은 분위기를 푼 건, 뒤늦게 도착한 시온이었다.
왁자지껄한 테수스 거리와 상반되게 둘의 분위기가 조용하다는 걸 읽은 시온은 말을 점잖게 바꿨다.
“달링 양, 대체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겁니까? 그리고 이쪽은…….”
“제임스, 왜 네가 나를 피하는지 모르겠어.”
제네비브는 제임스와 시온의 통성명을 돕는 대신, 말을 꺼냈다.
“……나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편지로 얘기하든가. 이런 식으로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네비브는 저를 흘겨보는 제임스를 보았다.
“……부탁이야.”
제네비브는 간절하게 말했다.
“달링 양, 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시온은 제네비브의 머리를 로브로 다시 가려 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굳이 제네비브만이 아니더라도, 제임스와 시온은 눈에 띄는 조합이었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제임스의 인사를 들으며, 시온과 도망치듯 테수스 거리를 빠져나갔다.
* * *
기차에서 내린 둘은 마차를 잡았다.
마차는 제네비브의 요청대로, 먼저 칼리지 외곽을 향해 달렸다.
몸에 축적되었던 모든 긴장이 풀려 힘이 없었지만, 잠은 오지 못했다. 소화할 감정과 사건이 많았다.
에드워드의 인생사부터 타인이 되어 버린 친구까지.
제네비브는 천천히 눈을 끔뻑이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 노력했다.
‘이렇게까지 알아도 되는 건가?’
밀포드가 운영하는 유흥가를 벗어나고 나서야, 제네비브는 너무 깊숙한 사생활까지 침투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멍하니 바뀌는 바깥 풍경을 구경하던 제네비브는, 마차가 정차하는 걸 보고서는 몸을 일으켰다.
“정말 이곳이면 됩니까?”
테수스를 나오고, 마차를 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시온이 물었다.
그의 걱정은 타당했다. 마차는 칼리지 소유의 초원 부근에서 멈췄는데, 해는 이미 져서 어두웠고, 초원 역시 세인트 존 칼리지의 명성에 알맞게 광활했다.
“너랑 같이 갔다가 걸리면 그 즉시 퇴학일 텐데.”
“초원을 혼자 걸어가는 것보단 낫겠죠.”
시온은 최소 한 시간은 걸릴 거라고 중얼거렸다.
“누가 걸어간대?”
그렇게 대답한 제네비브는 휘파람을 불었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고저 없던 음은 한순간에 휙 올라갔다. 휘파람 소리는 바람을 타고 초원을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말 한 필이 달려왔다.
금색 말은 제네비브 앞에 멈춰 섰다. 제네비브는 작은 목소리로 ‘에인젤’이라고 말하며 금빛 갈기를 정돈했다.
“학교 초원에 말이 있는 줄 몰랐는데요.”
“시합 시즌이 아닌 주말엔 폴로 클럽과 승마 클럽 말들을 초원에 풀어 놓거든. 너는 교환 학생이니 모를 수밖에.”
제네비브가 말했다.
“이 정도면 잘 찾아갈 수 있겠지?”
“네, 뭐…… 걸리지만 마시길.”
정당한 교통수단까지 있으니 할 말 없을 거다.
제네비브는 아침에 미리 설치한 고삐를 끌었다. 초원을 조금 걸어간 그녀는, 말안장 위로 올라탔다. 옆구리를 가볍게 발로 치자, 에인젤은 속력을 올렸다.
말을 타며 찬바람을 맞으면 복잡한 심경이 정리될 거라는 기대와 다르게,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이걸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하는 걱정과 다르게, 머릿속을 시끄럽게 뛰어다니던 걱정은 다른 문제로 금방 자취를 감췄다.
‘기숙사 방까지 어떻게 올라가지.’
머리는 기숙사 외벽을 보는 순간 고요해졌다.
오웬이 분명 나갔던 방법으로 다시 들어가면 된다고 했는데.
에인젤을 타며 비교적 수월하게 초원을 건넌 것과 다르게, 제네비브는 칼리지 건물을 힘겹게 빠져나왔다. 그녀는 벽에 붙어 있는 비상 사다리를 이용했는데, 문제가 있다면 사다리의 첫 번째 디딤대가 바닥이 아닌, 더 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었다.
“대체 오웬은 어떻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안 닿았다. 내려올 땐 그렇게 높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막상 다시 올라가자니 저와 사다리의 거리가 2미터는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깡충깡충 뛰던 제네비브는 필사적으로 오웬이 한 다른 말들을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오웬을 떠올리니 항상 그와 함께하던 제임스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등장했다. 제임스를 생각한 제네비브는 가벼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걱정은 조금 뒤에 해도 된다.
지금 급한 건, 대체 저 사다리를 올라가는 방법을 알아내는 거다.
“해 보자.”
제네비브는 잡념이 사라지길 바라며 중얼거렸다.
‘파이프도 좋은 탈출 수단이지. 제일 흔해서 찾기도 쉽고.’
오웬의 탈출 강의를 복기한 제네비브는 재빨리 벽에 붙은 파이프를 찾았다.
담쟁이덩굴 뒤로 숨은 파이프를 밟아 올라간 제네비브는, 재빨리 왼쪽에 있는 사다리 디딤대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미친……!”
하지만 너무 급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거리 계산을 실패한 탓일까. 제네비브는 사다리와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리를 남기며 놓쳤다.
꽤 높던데, 못해도 다리 하나는 부러지겠구나.
“…….”
“제네비브……?”
뼈 하나는 부러질 각오를 하고 있던 차, 제네비브는 꽤 안락하게 내려앉았다. 눈을 살짝 떠 보니, 다급하게 달려온 듯한 에드워드가 자신을 안고 있었다.
“아팠던 거 아니었어요?”
에드워드는 너무나 그다운 걱정의 말을 하며, 제네비브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제네비브는 무언가 찔린 사람처럼 팔로 옷을 감추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제네비브가 외출복을 입고 있음을 본 에드워드는.
“……나가셨군요.”
조금 화난 것 같았다.
한순간에 스친 표정이었지만, 제네비브는 확실하게 봤다.
처음 보는 에드워드의 표정에 제네비브는 조금 당황했다.
“건강해 보이네요.”
“…….”
“걱정했는데.”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제네비브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왜 죄책감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저기…… 에드워드, 나 좀 내려 줄 수 있을까.”
한참을 그렇게 있던 차, 저와 에드워드의 자세를 자각하게 된 제네비브는 민망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녀의 부탁대로, 에드워드는 군말 없이 제네비브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제네비브는 고맙다고 중얼거리며 에드워드를 보았다.
“걸리면 안 되는 거겠죠.”
제네비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한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의 손목을 붙잡았다. 우악스럽거나 아프지 않았고, 되레 부드러웠다. 제네비브는 죄인처럼 그의 뒤를 쫓아갔다.
에드워드는 벽을 타는 것 외로도 몰래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는지, 그는 창문 하나를 열어 안으로 훌쩍 들어갔다. 먼저 건물 내부로 들어간 에드워드는, 이내 손을 뻗어 제네비브를 안으로 당겼다. 제네비브는 너무나 쉽게 창문 안을 통과했다.
‘여기는…….’
에드워드가 데리고 온 곳은 기숙사 주방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깨끗하고, 모든 시설이 구비되어 있지만, 정작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 제네비브는 일어서는 대신,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를 유지하며 에드워드를 보았다.
정말 화가 난 걸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네비브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와 마찬가지로, 주방을 나가는 대신 볼일이라도 있는지 스토브 위에 주전가를 올렸다. 찬장에서 익숙하게 통을 꺼낸 에드워드는 컵 안으로 가루를 덜어 넣었다. 곧 주방은 달콤한 초콜릿 냄새로 가득 찼다.
제네비브는 물을 끓이는 에드워드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웃기게도, 그를 보자마자 뒤엉킨 머리가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지?’
제네비브는 말 없는 에드워드를 보며 생각했다.
두 사람이 움직일 때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나, 도자기 컵과 스푼이 부딪치는 소리를 제외하면, 주방은 조용했다.
“…….”
에드워드는 말없이 제네비브에게 따뜻한 핫초코를 건넸다.
따뜻한 컵을 만지고 나서야, 제네비브는 제 손이 얼음장 같았다는 걸 알았다. 한 모금을 들이켜자, 차가웠던 몸에 온기가 돌았다. 제 커피까지 만든 에드워드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어디로 가신 거예요?”
에드워드가 물었다.
“…….”
제네비브는 잠깐 침묵을 지켰다. 어떻게 대답을 하는 게 맞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제네비브는, 떨리는 손으로 음료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핫초코는 혀가 아플 정도로 달콤하고 진했다.
“……칼리지 밖으로 나갔어.”
제네비브가 말했다.
“시온 헤이븐과.”
그 이름을 들은 에드워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제 말을 끼어들거나 말을 얹지 않았다.
정말 밀포드를 언급하는 게 맞는 일일까? 만약에 제임스처럼 대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무례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머리가 또다시 시끄러워진다.
“하아…….”
제네비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답 모를 질문들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친구 관계로 답답해 죽겠는데,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도 싫었다
“시온과 간 이유는…… 내가 밀포드에 대해 알려 달라고 해서 그런 거야.”
‘밀포드’라는 단어를 들은 에드워드는 놀란 표정으로 제네비브를 보았다.
연갈색 눈은 당황한 듯 커졌다가 방황했고, 그러다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그의 몸이 일순 굳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사람처럼 뻥끗거리던 입은 곧 다시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