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38화
부원 모집을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던 건지, 마지막 부원이 가입하자마자 모든 일이 빠르게 해결되었다. 에드워드가 기폭제가 된 것처럼 아쉐트는 모든 일을 끝냈다.
여자 주인공의 일 처리 속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다는 걸 제네비브가 알게 된 건 방과 후 학생 휴게실에서였다.
제네비브가 학생 휴게실에 앉아 타 3학년생들과 통계학 과제를 하던 중, 아쉐트가 그녀를 찾아왔다.
“부실을 배정 받았어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건지, 아쉐트는 달뜬 숨을 참으며 신난 어조로 말했다.
“클럽 활동을 더 해요?”
제네비브의 옆에 앉은 미쉘이 물었다.
“폴로 클럽은 탈퇴했어.”
제네비브는 미쉘이 아직 제 클럽 탈퇴 소식을 모르고 있다는 걸 떠올리며 말했다.
“세상에, 언제 탈퇴한 거예요?”
“저번 주에. 나머지는 이따 마저 알려 줄게. 교재는 기숙사에서 돌려줘!”
제네비브는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곤 품에 노트를 안은 채 아쉐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벌써 부실을 배정 받을 줄 몰랐어. 조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제네비브를 포함한) 대다수 학생이 기존에 존재하는 클럽에 가입한 터라 제네비브는 클럽 창설과 관련하여 무지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배정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별관에 남는 부실이 있다고 해서, 바로 알았다고 했어요.”
아쉐트가 신난 발걸음으로 걸었다.
“다른 부원들은 안 데리고 가도 돼?”
제네비브가 물었다.
“알려 주려고 했는데…… 두 사람 모두 바빠 보여서요.”
아쉐트가 대답했다.
그녀가 제네비브를 데리고 간 곳은 한산한 복도를 지나, 별관 깊숙한 곳에 배치된 방이었다. 세인트 존 칼리지 내에서도 드물게 관리가 잘 안 된 곳처럼 보였다.
문고리를 돌리자마자 들려온 녹슨 경칩 소리는 제네비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여기라고?”
제네비브는 부실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스포츠 클럽 이외의 클럽 활동을 한 적 없었기에, 제네비브는 ‘일반적인 부실’이 사람의 손길이 닿기 전에 어떻게 생겼는지 알 길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 방이 예외적으로 부족하다는 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다고도 볼 수 없는 부실이었다.
낡은 카펫이 깔린 방에 발을 들이자, 가라앉았던 먼지가 부유하며 공기를 매캐하게 만들었다. 유리창에는 온갖 손자국이 찍혔다. 사람들이 오가며 창고로 썼던 모양인지, 입구를 중심으로 의자와 책상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었다.
심지어 손가락으로 선반을 훑자, 손가락 위로 먼지가 소복하게 묻어났다. 제네비브는 비위가 상하는 걸 느끼며, 먼지 묻은 손을 털어 냈다.
“……남은 부실이 없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잘 찾은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아쉐트는 애써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차례 방 안을 둘러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에드워드가 황태자여도 버젓이 있는 클럽을 내쫓을 명분이 없었겠지…….’
세인트 존 칼리지 입장에선 정말 남은 부실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멀쩡하게 활동하는 다른 클럽을 내쫓는 건 불가능했다. 제아무리 에드워드라 하여도 다른 학생들의 반발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황태자에게 ‘다른 클럽과 부실을 나눠 쓰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남아 있는 방 중에서 가장 멀쩡한 곳을 배정하는 것으로 최대한 타협한 것 같았다.
‘그래도 며칠만 지나면 어떻게든 새로운 방을 찾아서 배정해 줄 것 같은데.’
제네비브는 혹시나 아쉐트가 실망했을까 싶어서 달래려고 입을 열었다.
“새로운 부실이 나오면, 그때 알려 줄 거야.”
“그런가요? 저는 여기도 괜찮은데…… 조금만 손보면 될 것 같지 않아요?”
아쉐트가 물었다.
“여기에 책상을 두고, 저기에 의자를 놓는 거예요.”
아쉐트는 그렇게 말하며 제 머릿속 모습을 구현하려는 듯 의자를 끌었다. 입구와 마주 보도록 의자를 재배치한 뒤, 이내 책상도 움직이려 했다.
제네비브는 옷소매까지 걷어붙인 채 낑낑거리는 아쉐트 옆으로 다가갔다.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
“두고만 보는 게 더 불편해. 어서 옮기자.”
제네비브가 말했다.
아쉐트의 말대로 책상을 중앙에 옮기고, 부활동과 관련 없는 물건을 벽에 밀어 두고서야 제네비브는 창문을 열었다.
깨끗한 공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매캐한 먼지에서 벗어난 제네비브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
다시 생각해도 비현실적인 경험이다.
여자 주인공과 가구를 옮기게 될 거라곤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제네비브는 필요 없는 가구에 표시를 남기는 아쉐트를 봤다. 딱 이 정도 온도에서 원작과 다른 결말을 맞이하면 좋을 텐데. 이토록 평화로운 일상이 자칫 잘못하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가중되었다.
“표시 남기는 거 도와줄까?”
“아, 벽 쪽에 붙어 있는 책장 빼고 이 종이를 붙이면 돼요.”
그사이 제네비브의 도움에 적응한 아쉐트는 그녀에게 노란색 종이를 건넸다.
그렇게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을 때 즈음, 아쉐트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정말 안 도와줘도 되는데……. 괜히 저 때문에 시간을 쓰게 한 것 같아요.”
“나도 어엿한 부원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제네비브의 대답을 들은 아쉐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정말 클럽을 연 게 실감 돼요…… 같이 열심히 해요!”
“나도 옆에서 많이 도울게.”
제네비브가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예상과 다르게 클럽 활동은 그보다 더 늦게 시작되었다.
에드워드의 클럽 가입 소식은 한순간에 교내에 퍼졌다.
그다음 날, 학생들은 말이라도 맞춘 것처럼 일제히 제네비브와 아쉐트를 찾아와 클럽 가입 신청 의사를 밝혔다(그들은 차마 에드워드에게 가지 못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없어 클럽 창설조차 어려웠는데, 지금은 거의 모든 학생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네 명의 부원은—어제와 비교하면 깨끗하게 정리된—부실에 있었다. 어제 옮긴 책상 위로는 두툼한 가입 신청서가 있었다.
“저 때문에…… 미안합니다.”
에드워드가 말했다.
“세상에, 아니에요! 덕분에 클럽을 만들 수 있었던걸요.”
아쉐트가 허리를 푹 숙이며 말했다. 한편에 있는 시온은 여전히 관심이 없다는 듯 의자를 뒤로 젖힌 채 흔들거렸다.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운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제네비브는 가입 신청서를 훑어봤다.
‘보통 이렇게 절박한 걸 티 내던가?’
본디 귀족은 좋은 걸 봐도 그게 일상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아무리 황실과 인연이 급하다 하여도 이렇게까지 티 낼 이유는 없었다.
‘……아.’
이 특수한 상황을 생각하던 제네비브는 그 이유를 곧 깨달았다.
에드워드는 졸업까지 일 년도 안 남았다. 아직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것도 분명 이유 중 하나겠지만, 필시 이 점이 더 크게 적용할 거다.
더욱이 학급생 중 3분의 1이 에드워드가 힘들었을 때 모르는 척하던 이들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뻔뻔하게 친한 척을 해야 하는데, 에드워드는 그럴 여지를 안 준다.
‘진솔하게 사과하면 되는 일을…….’
제네비브는 그 당연한 순서를 무시하는 이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제네비브가 아쉐트를 보며 말했다.
마음이 약해서 전부 받아 주지 않을까 싶어서 물은 건데, 의외로 아쉐트의 답은 이랬다.
“음…….”
곰곰이 생각하던 아쉐트가 곧 말했다.
“전부 거절할 생각이에요.”
아쉐트는 여상하게 말했다. 잠시 그녀의 말뜻을 잘못 이해한 줄 알았던 제네비브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뭐라고……?”
그 대답이 예상 밖인 건 에드워드나 시온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들은 벙찐 표정으로 아쉐트를 바라보았다.
“정말, 블렛 선배가 와 준 건 너무 감사한데요……. 솔직히 정말 클럽 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블렛 선배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냥 전부 거절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아쉐트의 솔직한 대답에 제네비브는 당황했다.
착해 보여도 할 말은 전부 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 말에서 틀린 건 없었지만, 이렇게 바로 전부 거절할 거라는 답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아쉐트의 계획대로 된다면 반발은 분명 심할 거다. 이유도 없이 거절하는 것이니, 설령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거더라도 불만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렇게 되면 원작과 다른 이유로 따돌림이 시작되지 않을까……?’
제네비브는 정말 아쉐트가 제 계획대로 모두를 거절하기 전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는 것보다…… 다르게 하는 건 어떨까?”
“네……? 어떻게요?”
“번거롭겠지만, 면접을 보는 게 낫지. 아무래도 이유 없이 거절하는 것보다 적당한 사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말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제네비브는 부드럽게 말했다.
“스포츠 클럽들은 그렇게 정하거든.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 무작정 거절하지만 말고, 면접 보면서 정말 흥미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 보자. 겸사겸사 자격 같은 것도 확인할 수 있고.”
제네비브가 차근차근 말했다.
(사실 기억도 못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시원시원한 여자 주인공의 성격에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면 잘 대답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