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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
그럴싸한 유화가 걸려 있는 사무실에서 하루미는 계약을 하고 있었다. 부동산 매매계약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수없이 거듭해온 일이었다. 억 단위의 돈을 다루는 일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 건은 그리 비싼 부동산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전에 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이 집에 기울인 정성은 지금까지 다루었던 여느 부동산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상으로 이의가 없으시면 서류에 서명과 날인을 해주세요.” 이십만 엔은 됨직한 고급 양복 차림의 부동산 회사 직원이 선탠 살롱에서 태운 구릿빛 얼굴로 하루미를 보며 말했다.
하루미 회사의 주거래은행 신주쿠 지점의 한 사무실에서였다. 이 자리에는 던힐 양복 차림의 부동산 회사 직원 외에 매도자인 할머니, 그리고 딸과 사위까지 모두 모였다. 할머니의 딸은 작년에 오십 대에 접어들었다. 드문드문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하루미는 매도인 쪽의 얼굴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할머니와 딸은 고개를 숙이고 있고 사위는 부루퉁하게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참 한심한 사내라고 하루미는 생각했다. 불만이 있으면 차라리 정면으로 쏘아보면 될 게 아닌가.
가방에서 펜을 꺼냈다. “이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서명과 날인을 마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이것으로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던힐 양복 차림의 직원이 높직한 목소리로 선언하고 서류를 정리했다. 그리 큰 일거리는 아니지만 중개 수수료가 확정되어 나름대로 흡족한 눈치였다.
쌍방이 서류를 받아 들자 사위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딸은 아직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 앞에 하루미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의아하다는 듯 딸이 고개를 들었다.
“계약 체결을 축하하는 악수예요.” 하루미가 말했다.
“……응.” 그녀가 하루미의 손을 마주잡았다. “하루미, 미안해.”
“미안하기는요.” 하루미는 웃음을 건넸다. “다 잘됐잖아요. 서로에게 좋은 모양새로 일이 처리됐어요.”
“그건 그렇지만…….” 그녀는 하루미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어이, 하고 사위가 돌아보며 아내를 불렀다. “뭐해? 빨리 가자고.”
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는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 표정에 머뭇거리는 기색이 보였다.
“아, 할머니는 제 차로 모실게요.” 하루미가 나서서 말했다. 정확하게는 이모할머니지만 오래전부터 그냥 할머니라고 불러왔다. “걱정 말고 어서 가보세요.”
“그래, 그럼 부탁 좀 할까? 엄마, 그래도 괜찮지?”
“응, 나는 괜찮다.” 할머니는 힘 없는 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 하루미, 잘 부탁한다.”
하루미가 아직 대답도 하기 전에 사위는 휑하니 사무실을 나갔다. 딸은 미안하다는 듯 슬쩍 목례를 건네고 종종걸음으로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은행을 나서자 하루미는 할머니를 모시고 근처 주차장으로 갔다. 거기서 BMW 차를 타고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제 더 이상 ‘할머니 집’이 아니다. 다무라가의 집이 ‘하루미의 집’이 된 것이다. 방금 체결한 계약이 그것이었다.
올봄에 이모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노환으로 돌아가셨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는 이부자리에 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랜 세월에 걸친 할머니의 간병 생활도 끝이 났다.
할아버지의 여생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루미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유산 문제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할아버지의 집이다. 예전에는 자산가였지만 이제 남은 재산이라고는 그 집 말고는 없었다. 최근 이삼 년 동안 부동산 가격은 계속 뛰었다. 도쿄에서 두 시간 거리라서 약간 불편하기는 해도 자산 가치가 충분한 집이다. 딸 부부, 특히 사위 쪽에서 눈독을 들일 거라고 내심 짐작은 했다. 그는 여전히 수상쩍은 사업에 손을 대고 있지만 아직껏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모할아버지의 사십구재를 치렀을 즈음, 할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딸 부부가 유산 상속 문제로 상의를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딸 부부의 제안은 이런 것이었다. 재산이라고는 집밖에 없으니 그것을 모녀가 반씩 상속한다. 하지만 가옥을 잘라 나눠가질 수는 없으니까 집 명의는 딸 쪽으로 옮기고 전문가에게 감정을 받아 그 평가액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딸이 어머니에게 지불한다. 물론 어머니는 계속 이 집에서 살아도 된다. 다만 그럴 경우에는 딸에게 임대료를 내야 한다. 즉 딸이 어머니에게 드릴 돈을 분할로 해서 그 임대료와 상쇄하자는 것이었다.
법적으로는 별 문제없이 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제안을 할머니에게서 전해 듣고 하루미는 수상쩍은 기미를 감지했다. 한마디로 집에 대한 소유권은 일단 딸 쪽으로 옮겨놓되 딸은 어머니에게 한 푼도 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딸 쪽에서는 언제라도 집을 매각할 수 있다. 이 집에서 살고 있는 어머니를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그렇게 되면 임대료로 상쇄한 금액만큼은 어머니에게 지불해야 할 의무가 발생한다. 하지만 그때는 돈이 생기는 대로 슬슬 갚아나가겠다고 버티겠다는 속셈이다. 어머니가 차마 소송까지는 못하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이런 몹쓸 짓을 친딸이 제안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사위가 뒤에서 조종하는 거라고 하루미는 짐작했다. 그래서 하루미는 할머니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집은 모녀간에 공동 명의로 하고 그 집을 하루미가 매입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매각 대금을 모녀가 반씩 나눠가져 가면 된다. 하루미는 물론 그 집에서 할머니를 계속 살게 해드릴 생각이었다.
이 제안을 할머니를 통해 딸 부부에게 전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사위 쪽이 따지고 들었다. 왜 우리 제안을 폐기하느냐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그런 사위에게 하루미의 뜻을 밀어붙였다.
“우리가 살던 집을 하루미가 사주기만 한다면야 그게 가장 좋지 않겠니? 웬만하면 내 뜻대로 해다오.”
그러자 사위도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애초에 그 사람은 유산 문제에 참견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할머니를 모시고 온 김에 하루미는 그날 밤은 고향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 날은 일찌감치 도쿄로 출근해야 한다. 토요일이라 회사는 쉬지만 큼직한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 만 크루즈 선박에서의 파티를 맡아서 치러야 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 행사다. 준비한 티켓 이백 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매진되었다.
잠자리에 누워 눈에 익은 천장의 얼룩을 바라보며 하루미는 진한 감회에 젖었다. 이 집이 내 것이 되었다는 게 아직 믿어지지 않았다. 현재 살고 있는 도쿄의 맨션을 샀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이 집만은 다른 사람에게 내놓을 생각이 없다. 언젠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는 날이 오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지니고 있기로 했다. 별장으로 사용해도 좋으리라.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무서울 만큼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마치 어디선가 수호천사가 지켜주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은 그 편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눈을 감자 그 개성적인 필체가 떠올랐다. 나미야 잡화점에서 보내준 신기한 편지.
선뜻 믿을 수 없는 얘기들이었지만 고민 끝에 하루미는 그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그 밖에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도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본다면 도미오카 같은 사람에게 기대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경제를 공부하는 것은 장래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다니던 회사에는 사표를 냈다. 그 대신 전문학교에 들어갔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주식 거래와 부동산에 대해 공부하고 몇 가지 자격증도 땄다.
한편으로 호스티스 일에는 그 전보다 더욱 힘을 기울였다. 다만 길어도 칠 년 안에는 그만두기로 정했다. 기한을 설정하니 더욱더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게 이쪽 일의 재미있는 부분이다. 순식간에 고객이 불어나 가게에서도 톱클래스의 매상을 기록했다. 애인 계약을 거절했더니 도미오카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 정도의 마이너스는 간단히 메울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도미오카가 몇몇 음식점의 개업에 관여했다는 건 역시 허풍이었다. 잠깐 상의를 해준 정도였던 것이다.
1985년 7월, 하루미는 첫 승부에 나섰다. 몇 년 동안 알뜰하게 모아 삼천만 엔이 마련되자 그것을 모두 맨션을 구입하는 데 투자한 것이다. 요쓰야 지역의 중고 부동산 물건이었다. 어떻게 굴러가건 가격이 떨어질 일은 없다고 판단한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여 만에 세계경제계에 일대 격진이 일어났다. 미국에서의 플라자 합의에 의해 단숨에 엔화 강세, 달러 약세가 진행된 것이다. 하루미는 소름이 돋았다. 일본 경제는 수출산업이 중심이다. 엔화 강세, 달러 약세가 이어지면 불경기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그즈음 하루미는 주식 거래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경기가 바닥을 기게 되면 주가도 떨어진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망연자실했다. 나미야 잡화점의 예언과는 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사태는 나쁜 쪽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경기 악화를 우려한 정부가 저금리정책을 내세웠다. 나아가 공공사업에의 투자를 선언했다.
그러던 1986년 초여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루미가 맨션을 살 때 중개해준 부동산 업자에게서 온 것이었다. 아직 이사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맨션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하루미가 말끝을 흐리자 혹시 도로 팔 생각이 있다면 자신들이 사고 싶다는 것이었다.
감이 딱 왔다. 맨션의 자산 가치가 뛰고 있는 것이다.
팔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하루미는 즉시 은행으로 향했다. 요쓰야의 맨션을 담보로 얼마나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며칠 후, 담당자가 산출해준 가격에 깜짝 놀랐다. 구입한 액수의 1.5배까지 뛰어 있었다.
곧바로 대출을 신청하고 더불어 다른 부동산 매물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와세다 지역에 마침 좋은 맨션이 나와서 은행 대출금으로 즉각 매입했다. 얼마 안 되어 그 맨션의 가격도 뛰었다. 금리 따위는 거의 무시해도 될 만큼의 상승세였다.
이어서 이 맨션을 담보로 다시 대출을 받기로 했다. 그러자 은행 담당자가 회사를 설립하는 게 어떻겠냐고 추천해주었다. 그러는 편이 자금 조달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오피스 리틀 독’이다.
하루미는 확신했다.
나미야 잡화점의 예언은 옳았다.
1986년 가을까지 하루미는 맨션을 사들이고 되파는 일을 거듭했다. 부동산 물건에 따라서는 단 일 년 만에 가격이 세 배 가까이 뛰기도 했다. 주가도 연일 상승해서 자산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급증했다.
호스티스 일과는 작별을 고했다. 대신 호스티스 시절의 인맥을 살려 이벤트 사업을 시작했다. 이벤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접객 여직원을 파견하는 등의 일이다. 호경기를 타고 날마다 어디선가 화려한 축제와 파티가 벌어졌다. 일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1988년에 들어서자 하루미는 갖고 있던 맨션이며 골프 회원권 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격이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감을 잡았기 때문이다. 호경기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한발 앞서 대비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미는 나미야 잡화점의 예언을 굳게 믿었다. ‘폭탄 돌리기’ 같은 상황이 온다는 것도 분명 틀림없는 얘기일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런 미친 듯한 호경기가 한없이 이어진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얘기다.
그 1988년도 이제 며칠이면 막을 내린다. 내년에는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하루미는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