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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0)화 (1/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Prologue

하늘은 드높고, 구름은 새하얗다.

뙤약볕을 에워싼 솜털 구름은 오늘따라 깃털처럼 상냥했다.

적어도 비 소식을 몰고 올 것처럼 심술궂진 않았다.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어느 가을날.

이 날씨를 천진하게 즐겨도 좋으련만.

조금 전까지 훌쩍훌쩍, 잉잉거리던 타티아나 블룸은 반짝이는 돌멩이를 주워 들며 눈가를 훔쳤다.

“조약돌을 쥐듯이, 마치 달걀을 손에 쥔 것처럼 조심스럽게…….”

타티아나는 손가락을 살포시 말아 마력석을 움켜쥐었다.

여기까지는 너무나 쉬웠다.

“대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채…….”

타티아나는 바람도 느낄 수 있다. 연보라색 머리칼이 가볍게 흩날리고, 그대로 가만히 눈을 감는다.

지금 부는 것은 서풍.

엄마가 가르쳐 준 예쁜 말로는 하늬바람.

그녀는 고개를 주억이며 마법서의 다음 구절을 읊었다.

“몸 안에 흐르는 마나의 파장을 느끼…….”

……이걸 어떻게 느끼지?

문제는 늘 이 구절에서 발생했다.

소녀는 오늘도 순수한 의문에 젖어 입문자용 마법서를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정도로 매번 같은 부분에서 막힌다면 아무리 순진무구한 아이일지라도 의심을 품게 된다.

마나란 무엇인가.

마력이란 게 정말로 있긴 한 건가?

혹시 지금 세상이 날 단체로 속이나?

어른들이 어린아이한테 장난쳐도 누가 안 잡아가나?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 책의 저자를 불신하며 막무가내로 떼를 쓸 수 없었다.

이 마법서를 쓴 사람은 명실공히 마탑의 2인자였고, 다른 누구도 아닌 타티아나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가 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며칠째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저술 작업에 몰두 중인 어머니를 떠올리며 타티아나는 시무룩해졌다.

소중하게 쥐고 있던 마력석을 풀밭에 내팽개친 그녀는 결국 심통이 난 얼굴로 코를 훌쩍일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 블룸.

그녀는 불과 일주일 전, 열세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아직은 어린 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선 실패와 좌절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녀가 이제껏 맞닥뜨렸던 인생의 암초라고 해 봐야 아무 생각 없이 베어 물었던 빵 안에 숨어 있는 건포도 정도가 다였다.

먹기 싫은 음식이 식탁 위에 올라왔을 때 부루퉁한 표정을 짓게 되는, 딱 그 정도의 난관.

하지만 타티아나도 이제는 서서히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제국에 겨우 한 줌뿐이라는 마법사들.

그들의 마법적 재능은 아주 높은 확률로 10살 이전에 발현되곤 했다.

그러니 그녀도 더 큰 실패와 좌절에 익숙해질 준비를 지금부터라도 해야 하지 않냐는 거다.

대부분의 왕국민이 그러하듯 그녀 또한 마력 없이 태어났단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타티아나는 싫어하는 건포도를 백 개쯤 씹은 표정으로 코를 크게 훌쩍였다.

그런데 블룸 가의 정원에는 몹시 낙담한 그녀를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길을 잘못 들었나 보군.’

기드언 아인슬러는 국왕이 블룸 백작에게 하사하는 무공 훈장을 친히 전달하기 위해 내방한 차였다.

자신의 검술 선생이자 현재 제국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고 칭송받는 블룸 경의 무도장을 감상하려는 의도도 조금은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택을 거닐다가 풀밭에 주저앉아 훌쩍훌쩍 우는 소녀를 마주한 순간, 기드언은 오늘의 일정을 그만 마치고 성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는 타티아나보다 고작 3살 많을 뿐이었다. 그러나 누가 질질 짜는 것은 질색이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귀찮은 짓도 당연히 해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없으리라.

그는 발터 왕국의 기드언 아인슬러였다.

누가 그 앞에서 내 눈물을 닦아 달라며 어리광을 부릴 텐가?

한데 저 소녀에게는 조만간 저택이 떠나가라, 와앙! 대성통곡할 불길한 조짐이 보였다.

귀찮은 상황에 발목 잡히기 싫었던 기드언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정원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불쌍하게도 추욱 처져 있던 타티아나는 갑자기 볼에 바람을 넣으며 인상을 구겼다.

젖살이 아직도 통통하게 남아 있는 얼굴은 아무리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도 무섭지 않았지만, 꽤 야물어 보이긴 했다.

타티아나는 이번에는 내팽개친 마법석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장검을 집어 들었다.

“이봐, 그거…….”

몇 발짝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기드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성격답지 않게 중간에 끼어들며 만류할 뻔했다. 소녀가 휘두르려는 검날이 너무나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저 작고 미숙한 생물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는 건 절대 아니었고…….

아마 검을 제대로 다뤄 본 이들이라면 타티아나를 보며 누구나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검술을 익힐 때 선행되어야 할 건 무거운 무기를 들어 올리는 게 아니라 올바른 자세를 잡는 거였다.

그러니 제대로 된 자세가 안 나올 때 취해야 하는 조치도 정해져 있었다.

무기의 중량을 일단 낮추는 것이었다.

본인 체격과 근력에 맞지 않는 검을 휘두르면, 특히나 성장기에 그런 짓을 함부로 하면 결국 어깨와 허리가 무너지고 만다.

그럼 검사로서의 수명 또한 단축될 수밖에 없었다.

‘블룸 경은 자기 딸한테 저런 것도 안 가르쳐 준 건가.’

그러나 타티아나를 제지하려던 기드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 눈을 갸름하게 뜨더니 몹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술 새로 흘러나온 소리는 얼핏 신음 같았으나 사실 탄성이었다.

기드언은 조금은 놀랐으며, 또 감탄했다.

‘누가 블룸 경 딸 아니랄까 봐…… 힘이 장사군.’

또래 여자아이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소년들도 쉽게 들어 올리기 힘든 검이었다.

그런 쇠붙이를 작달막한 몸으로 휘두르면서 타티아나가 펼치는 검법은 시종일관 호쾌했고, 보는 사람마저 시원시원하게 만들었다.

그에 따라 검의 주인 또한 행복해진 것일까?

아까까지만 해도 시무룩하게 콧물을 들이마시던 소녀는 우울함을 저 멀리 날려 버리고 이제는 활짝 웃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저건 검술이라기보다는 물결과 대기처럼 느껴진다.

분명히 미숙한 구석이 있었으나 그래서 풋풋했고 도리어 자연스러웠다.

기드언은 잠깐이나마 그 몸짓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경계와 긴장을 풀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을 발견한 타티아나가 깜짝 놀라 뚝딱거리는 걸 본 후에야 급격히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누구……세요?”

블룸 가는 원래도 외부인의 출입이 잦았다.

기사들의 훈련 교관을 포함해 이런저런 잡다한 직책을 맡고 있는 블룸 백작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의 금지옥엽 같은 어린 딸과 사랑스러운 아내가 머무는 집이었다.

타티아나가 블룸 경이나 호위 없이 낯선 사람을 마주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지금 아무런 불안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겁이 없어서라기보단 단지 눈앞의 남자가…… 너무 심각하게 잘생겨서였다.

그가 어느 정도로 아름다웠냐 하면…….

‘혹시 천사인가?’

타티아나와 같은 잔디를 밟고 서 있는 기드언은 키가 컸다.

나이는 그녀보다 3살 많을 뿐이었으나 성장기에 그 몇 년의 격차는 컸다.

그래서일까. 턱을 치켜들고 올려다봐야 하는 그는 또래 소년들처럼 가깝거나 친근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근육질의 기사들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기드언은 지금 그 미묘한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양발을 걸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조만간 이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을 강렬히 예고하는 징조를 몇 가지 품고 있었다.

이를테면 불룩 튀어나온 목울대랄까.

어느새 구름 사이로 태양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그러자 그의 플래티넘 블론드빛 머리칼은 금가루를 뿌리기라도 한 것처럼 반짝였다.

타티아나를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 또한 인상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흔들림 없는 홍채의 색은 시리고 투명한 하늘빛.

먼 나라의 깊은 바다에는 저런 얼음 조각 같은 게 둥둥 떠다닌다고 하던데.

그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넋 놓은 채 보고 있던 타티아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천사다. 진짜 천사인가 봐, 아니면 지금 헛걸 보나?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자 타티아나는 보다 현실성 있는 가설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왕자님?”

어린아이에게 너무 대단한 사유의 깊이를 기대하지는 말자.

타티아나는 그냥 왕자님이라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하게도 이 가설이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아 버렸다는 것이었다.

역시 어린아이의 제약 없는 상상력이야말로 이 나라의 미래이자 희망이었다.

“날 아나?”

기드언은 블룸 가의 외동딸이 자신과 오늘 초면이 아니었나,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고 타티아나는 대충 찍은 게 들어맞자 더 놀라선 또 되묻고 말았다.

“……진짜 왕자님?”

“…….”

기드언은 지금 영 바보 같은 문답을 주고받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런 상황에서마저도 한 가지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아까 전 그가 엿본 타티아나의 무위가 보통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을.

발터 왕국은 부모와 가문이 물려주는 유, 무형의 자산이 자식의 미래를 판가름 짓는 나라였다.

신분, 작위, 재산, 명예.

사실은 그게 왕국민의 인생을 결정짓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왕족인 기드언 아인슬러보다 더 비싼 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는 발터에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예술, 체육계에는 신분과 재산 못지않게 중요한 수저가 하나 더 존재하는 법이었다.

운동신경 수저.

이를테면 유전적 능력치랄까.

보기 힘든 진풍경을 우연케도 구경한 기드언은 타티아나에게 담백하면서도 제법 진솔한 감상을 표했다.

“너, 검 끝이 블룸 경을 아주 많이 닮았군.”

형식적일지라도 왕족에게 치하의 말을 듣는 건 영광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저 한 줄을 가문의 기록물로 남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순수하게 좋아했고, 조금은 수줍어했다.

평민 출신으로 참전하여 열 명의 병사를 책임지는 십인장, 백 명의 병사를 책임지는 백인장을 거쳐, 마침내 천인장의 자리까지 오른 사내.

왕실 주관 무투 대회 3연속 우승자.

왕족 친위대의 교관이자 1왕자의 검술 스승…….

타티아나의 아버지에게 주렁주렁 따라붙는 수식어는 무수히 많았고, 하나같이 참 길기도 길었다.

타티아나는 그 수식어들에 따르는 사회적, 역사적 가치까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평민이 전공을 세워 백작에 봉해진다는 게 얼마나 드문 사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수식어를 대충 듣기만 해도 엄청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지 않나?

타티아나에게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았다는 말 이상의 극찬은 없었다.

“정말이에요?”

“……그래.”

“진짜로?”

그녀가 눈을 반짝이자 기드언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티아나가 좋아라 하며 입술을 달싹거리는 동안 그녀의 볼에는 작고 귀여운 우물이 패였다.

그러자 갑자기 기드언과 타티아나 사이에는 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좀 머쓱하기도, 다소 어색한 것도 같은.

그리고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블룸 백작이 땅을 박차며 달려온 건 그때였다.

많이 놀랐는지 숨을 몰아쉬던 블룸 경은 딸의 작은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어 아주 능숙한 자세로 엉덩이를 받쳐 안았다.

“전하, 무례가 있었다면 용서하십시오. 제 여식이 아직 경험이 모자라고 배움 또한 부족합니다.”

기드언은 ‘별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으나 블룸 경은 불안감이 채 가시지 않은 눈치였다.

그는 자신의 작고 소중한 소녀 장사에게 추궁을 하듯 속삭였다.

“타냐. 전하께 그새 무슨 결례라도 저지른 건 아니겠지?”

타티아나는 아버지의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쭈욱 잡아당기며 마찬가지로 속삭였다.

“아무 잘못도 안 했어. 근데 여기 우리 집…….”

“오오, 타냐, 이 저택은 국왕 폐하께서 우리 가문에 친히 하사하신 거란다. 그러니까 입 좀…… 아빠 귀 먼저 놓아주겠니.”

블룸 경은 딸을 하녀에게 맡길 요량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넓은 어깨에 오밀조밀한 손으로 매달려 있는 타티아나와 기드언의 눈은 계속 마주쳤다.

타티아나는 왕자에게 뒤늦게 예를 표하는 건지, 아버지 어깨에 뺨을 문대는 건지 판단하기 어려운 동작으로 목을 움츠렸다.

기드언 또한 그런 타티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충 인사를 받아 주듯 고개를 까딱였다.

거기에서 재미있게 느껴진 부분은 무엇이고, 좋았던 건 또 무엇일까?

타티아나는 기드언을 바라보며 말갛게 웃다가 이번에는 좀 더 제대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드언은 뭔가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이번에도 그 인사를 받아 주었다.

여전히 건성이었지만 손을 반쯤 들어 올리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없이 손을 내려놓은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드높고, 솜털 구름은 상냥하다.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만 같은 청명한 가을날.

기드언 아인슬러의 나이 열여섯, 타티아나 블룸의 나이 열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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