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장. 부부의 탄생 (1)
뮐러 공작가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오늘은 아주 중대한 이벤트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성에서 주관하는 파티는 수시로 열리곤 했지만, 올해 성인이 된 귀족 영애들의 데뷔탕트가 예정된 만큼, 금일 밤은 사교계 명사들에게 조금 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뮐러 가에서 일하는 하녀들의 얼굴엔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하녀 중 하나는 마치 남 일인 것처럼 먼 산을 보고 있는 타티아나를 향해 은근한 원망을 드러냈다.
“아가씨, 꼭 오늘 같은 날에도 운동을 하셔야만 했나요?”
“하루라도 운동을 안 하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고요?”
“그럴 리가 있겠어. 하지만 근육은 확실히 빠지겠지.”
타티아나는 식단으로 씨 뿌리고 운동으로 완성한 본인의 11자 복근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하녀들의 시선도 자연히 그쪽으로 모여들었다.
뮐러 공작 부부가 친부모를 여읜 타티아나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그녀가 공작가의 수양딸로 입적된 지 3년 차.
타티아나는 검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였다.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검은 언제부턴가 파리와 모기 잡는 용도로만 쓰였으므로 이건 놓은 거라 말해도 무방했다.
다만 타티아나는 매일같이 운동하고 체력을 단련하는 행위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친부를 따라 하고 싶은 마음에 꾸준히 해 온 일이었으니 습관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건 사실 질척질척한 미련에 가까웠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당장 사용하지 않는 마차라 할지라도 바퀴에 수시로 동물 기름을 칠해 두는 거.
언젠가 쓰일지 모른다는 괜한 생각에 굴러갈 수 있을 만큼만.
망가지지 않을 수준으로만, 딱 그 정도로 적당히.
물론 이건 타티아나의 기준에만 적당할 뿐이었지, 그녀가 소화하는 운동량은 하녀들을 포함한 일반인의 기준쯤은 가뿐히 상회했다.
실상은 현역 기사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그러나 타티아나가 생각할 때 자신의 신체는 효율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투입하는 인풋 대비 아웃풋이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성장기를 지난 그녀는 친모의 영향을 받았는지 팔다리가 길쭉길쭉 뻗어 있었지만, 친부만큼의 통뼈로 태어나거나 근육이 잘 붙는 살성은 가지지 못했으니까.
그 결과 성인이 된 타티아나의 신체는 검술가라기보단 숙련된 춤을 추는 무희에 가까웠다.
‘내 작고 소중한 근육들. ……그러니 더욱 1g도 잃을 수 없어.’
완벽히 좌우 대칭을 이루는 11자 복근과 마른 등에 모양 좋게 자리 잡은 잔근육을 응시하던 하녀들은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아, 근손실. 그건 못 참지.’
그러나 감탄하던 그녀들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타티아나를 흘겨보았다.
결국 따가운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타티아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슬그머니 뻗어 누군가를 지목했다.
“너 말이야.”
“저요?”
“응, 너 얼마 전에 친구 결혼식 간다고 며칠 굶었지. 작년에 산 예쁜 옷 안 맞는다고.”
“…….”
“그것보단 내 쪽이 훨씬 더 건강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
“굶어서 살 빼면 언젠가 두 배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잔소리 좀 그만하란 뜻이었다.
괜히 옆에 있다가 싸잡혀서 상처를 입은 하녀들은 일제히 원망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가씨가 뭘 알아! 사실 우리도 다 알아!
그러나 타티아나는 눈치만 한 번 스윽 보더니 무심하게 덧붙였다.
“자칫 잘못하면 머리도 빠져. 그건 회복 잘 안 돼.”
“……차라리 저주를 하시어요.”
이건 저주가 아니라 사실인데.
타티아나는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하녀들의 볼멘소리 정도는 대체로 안 들리는 척하거나 웃어넘기곤 했던 타티아나가 조곤조곤 반박하자 그녀들은 속삭였다.
‘오늘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
‘그냥 파티 가기 싫으셔서 그래.’
타티아나는 올해 스물하나였고, 사실 그녀의 데뷔탕트는 작년에 치러졌어야 했다.
그녀가 그 무렵 왕실 주관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던 건 격렬한 하체 운동을 하다가 인대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본인 몸을 그리도 아끼며 갈고닦는 사람이 부상을 당하는 건 또 무슨 경우냐고.
그런데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왕왕 있다.
잔병치레를 많이 하는 사람이 의외로 큰 병에 안 걸리고, 건강하게만 보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뜨기도 하는 것이다.
발터 왕국에서 붕대와 가장 친한 사람들도 민간인이 아니라 우람한 기사들이었다.
왜, 원숭이도 가끔은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지 않나.
근데 나무에 아예 안 올라가면 애초에 떨어질 일이 없잖아?
반면 나무에 매일 올라가는 사람들이 다칠 가능성이 큰 건 사실 너무나 당연한 거지.
하지만 지금 하녀들이 진정으로 우려하는 건, 타티아나의 부상 가능성이 아니라 이 저택의 안주인인 공작 부인의 심기였다.
“아가씨는 예쁜 옷 입겠다고 운동하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흰 그냥 아가씨가 마님한테 또 한 소리 들으실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
실제로 작년 이맘때 그녀의 다리 상태를 접한 뮐러 부인은 얼굴이 새파래져선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붕대를 감고 사교계 데뷔를 치르다니 그런 모양 빠지는 일이 어디 있냐며, 그녀의 데뷔탕트를 한 해 미루기까지 했었다.
그때 잔소리를 어마어마하게 듣긴 했으나 내심 파티에 가는 게 귀찮았던 타티아나는 속으로 어? 잘된 일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뒤늦게 의상 더미를 헤치고 나타난 뮐러 부인은 오늘만큼은 그녀에게 잔소리를 퍼부을 심적 여유가 없는 듯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어떤 누구보다 흥분해 있었다.
“세상에, 타티아나. 너무나 아름답구나. 어쩜 좋아. 오늘 우리 타티아나를 탐내는 청년들이 너무 많으면 어떡하지?”
“그럴 리가…… 있을까요?”
“내 말을 믿으렴.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네가 되겠구나.”
타티아나는 어설픈 웃음으로 대답을 뭉갰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곳 없이 단장한 수양딸을 보며 공작 부인은 무척이나 흐뭇해 보였다.
어쩌면 타티아나가 정말로 근사한 신랑감을 데리고 올 거라고 기대하는 듯도 했다.
사실 공작 부인이 이처럼 앞서 나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뮐러 공작은 타티아나의 친부인 블룸 경의 상관이었지만 막역한 벗이기도 했다.
남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타티아나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긴 했으나, 갑자기 집 안에 굴러 들어온 돌의 존재가 달갑기만 할 수 있을까?
공작 부부에겐 타티아나 또래의 아들도 있었다.
그리고 자식이 여럿이면 재산 분배라는 예민한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었다.
뮐러 부인이 이참에 그녀를 얼른 치워 버리고 싶어 한다 해도 타티아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파티는 어떤 사람들에겐 굉장히 좋은 기회처럼 보일지 모른다.
발터 왕국은 현 왕 치하부터 근친혼과 조혼을 금기시하더니 몇 년 전부터는 아예 성문법을 뜯어고쳐 법제화시켜 버렸다.
왕실에서 구습을 없애겠다고 앞장서는데 이의를 제기할 귀족이 있나?
있었다면 진즉에 숙청당했을 테니 여기에 답할 자는 없다.
그리고 이후, 데뷔탕트는 발터의 귀족들에게 결혼 적령기를 가름하는 상징성을 가지게 됐다.
데뷔탕트를 치렀다는 건 적어도 법적으로는 성인이 되었다는 의미니까.
자연스럽게 파티에서는 공식 커플도 종종 탄생했고, 공개적으로 청혼을 하는 일마저 생기곤 했다.
열에 아홉은 가문 간에 미리 교감을 나눈 경우였지만, 또 열에 하나 정도는 ‘첫눈에 반했습니다’처럼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그와 관련하여 데뷔탕트를 먼저 치른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감상을 들은 적이 있다.
‘공개 프러포즈라니 정말 끔찍하지 않니?’
‘그런가?’
‘그럼! 이건 사람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내 청혼 공격을 받아랏! 협박하는 것과 다름없어.’
‘난 잘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할 건…….’
‘어후, 얘는.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몇 달 동안 그 얘기만 한다고! 그건 공개 청혼이 아니라 공개 처형이지.’
‘…….’
듣고 있던 다른 영애들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었는데, 공작 부인은 이미 거기까지도 다 생각해 놓은 모양이었다.
“혹시 어떤 영식이 청혼하더라도 꼭 우리와 상의해야 한다.”
“…….”
아, 공개 청혼이요. 근데 그거 요즘 제 또래들 사이에서 반응 최악이던데요.
타티아나는 뮐러 부인이 결혼 문화의 최신 유행에서 이렇게 멀어져 가는가 생각했다.
그래, 시대가 급변하면 같은 속도로 발맞추어 나가는 게 힘들 수도 있지.
그러나 공작 부인은 본인이 갈고닦아 온 파티 문화의 비기를 전수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누가 호감을 표시하더라도 적당한 선에서만 맞춰 주라는 거야.”
“…….”
“너무 좋아하는 것처럼 웃어 주지 말고, 그렇다고 매몰차게 밀어내기만 해서도 안 된단다.”
“…….”
“딱 이만큼의 여지만 주라는 뜻이야. 타티아나, 내 말 잘 알겠니?”
아니요, 어머님.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살면서 간 보는 능력이라곤 대련할 때 상대의 실력을 간파하기 위해 써 본 게 다인 타티아나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네가 어린아이도 아니니 계속 따라다니진 않을 테지만, 무슨 일이 있거든 꼭 우리 쪽을 보면서 상의하거라. 가까운 곳에 있을 테니.”
공작 부인은 은근히 까다로운 성미의 사람이었으나, 사교계에 공식적으로 첫선을 보이는 수양딸을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하녀들 또한 걱정 반, 미소 반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다 좋은데 거기 가서 운동 얘기는 하지 마세요.’
그거 남자들이 군사 훈련 받았던 얘기 반복하는 것만큼이나 지겨워요.
근데 사실 저흰 아가씨가 일부러 그러시는 것도 알아요. 사람 상대하기 귀찮을 때 나가떨어지라고!
가끔 저희한테 그 귀여운 알통 자랑하시는 것도 그래서지요?
거기 가선 절대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안 돼요…….
타티아나가 파티를 무사히 마치고 오기를 기원하는 하녀들의 얼굴은 진실했다.
갑자기 괜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낀 타티아나는 시선을 피했으나, 뮐러 부인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느이 아버지께서도 너에 대한 걱정이 참 많으시단다.”
양부 얘기마저 나오자 타티아나는 오늘 가야 할 파티가 무슨 전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뭐가 됐든 일단 나의 현 위치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티아나는 아주 냉정하게 생각해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긴 할까? 싶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다더니.
다들, 오늘 파티에서 내가 외톨이가 되진 않을까, 그것부터 걱정해야 하지 않아?
나 오늘 한 마디도 못 하고 올 가능성이 크지 싶어.
근데 사실 내 진짜 목표가 그거야.
파티장의 과묵한 석조 기둥이 되려고.
자기 자신의 현 위치는 물론이고, 바로 몇 시간 후에 펼쳐질 미래도 알지 못한 채 타티아나는 거울에 비친 본인의 모습을 흠, 하고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