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2)화 (3/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장. 부부의 탄생 (2)

* * *

타티아나는 본인이 목표한 대로 연회장의 석조 기둥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뮐러 부부와 친분이 있는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그들과 찢어진 이후론 쭉 이 상태였다.

“하나, 둘, 셋…….”

무료해진 그녀는 홀 안의 회백색 석조 기둥을 세기 시작했다.

기왕 기둥처럼 있기로 결심했으니, 자신이 몇 번째 기둥인지 정도는 알아 둘 참이었다.

병졸들에게는 군번이 중요한 거니까.

그녀는 정확히 쉰세 번째 기둥이었다.

이쯤에서 아주 상투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 볼까 한다.

본인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다. 누구나.

그러나 그보다 더 상투적인 말을 하나 덧붙이자면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닐 확률이 대단히 높다.

남녀 할 것 없이 자신을 뽐내고자 하는 이 전투적인 무리 가운데에서 주목을 받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냉혹한 현실을 생각보다 어린 나이부터 맞닥뜨리게 된다.

내 얼굴은 옆집 마리아만큼 예쁘지 않구나, 난 우리 언니보다 머리가 나쁘네, 쟤네 아버지는 공작인데 우리 아버지는 백작이구나, 우리 아빠가 저 사람한테 고개를 숙이네? 등등의 깨달음과 함께.

마찬가지로 검을 처음 잡을 때는 누구나 자신이 왕실 친위대 정도는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 원대했던 꿈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작아진다.

잔인할 정도로 쪼그라들고 만다.

수도 경비대에서, 지방 하급 병사로, 종국에는 제복도 지급되지 않는 마을 자경단 정도로.

그러나 이 연회장의 기둥 53으로서 파티의 중심부에서 멀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 타티아나의 오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구) 타티아나 블룸.

(현) 타티아나 뮐러.

그녀의 친부는 국왕보다 인기가 높은 전쟁 영웅이었고 친어머니는 그 콧대 높다는 마탑의 2인자였다.

왕실이 주관하고 아버지의 열렬한 구애로 완성된 그들의 결혼은 초미의 관심사였고, 타티아나는 만인의 기대를 등에 업고 태어났다.

왕국 수재들이 낳은 2세.

조금의 과장도 보태지 않고, 그녀는 어머니 배 속의 태아일 때부터 이미 유명인이었다는 거다.

사실은 그때가 가장 유명했다.

그 관심은 타티아나가 성장함에 따라 자연히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기대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고 그녀의 친부모는 이미 운명했으니까.

하지만 호사가들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타티아나를 힐끔거리며 귀엣말을 하고 있었다.

뮐러 가에 몸을 의탁한 이래, 바깥출입이 뜸했던 탓일까. 타티아나는 뮐러 공작이 꼭꼭 숨겨 놓은 보석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녀를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은 오히려 더 집요해진 경향마저 있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지?”

타티아나는 못 본 체하는 것도 잘했고, 남의 말이 잘 안 들리는 척하는 것도 능했다.

그러나 정확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 1의 움직임을 감지한 순간, 그녀는 난감함을 느끼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자 2, 3까지 움직이는 족족 포착됐다.

검술을 배운 탓에 쓸데없이 시야가 넓은 탓이었다.

‘안 돼. 오지 마. 난 세련되게 거절하는 법을 몰라.’

타티아나가 다시 양부모께로 가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회장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그녀의 고민은 단번에 말끔히 해소됐다.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이들의 등장.

발터의 왕족들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언제나 무리의 정점에 있는 남자, 기드언 아인슬러가 있었다.

발터의 왕족들은 하나하나 회장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와병 중인 국왕을 대신하여 정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왕후와 그 왕후의 유일한 소생인 2왕자 바이칼.

작고한 선 왕후 소생인 스칼렛 아인슬러 공주.

착석한 건 이렇게 셋이었고, 기드언은 그들과 따로 떨어져 본인이 늘 몰고 다니는 젊은 관료들에게 향했다.

승냥이 같은 귀족들의 시선이 자신을 대신하여 기드언에게로 모이자, 타티아나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 또한 한 명의 관객이 되어 그를 조용히 바라볼 수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어서인가. 그녀는 무심코 기드언을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13살의 그 청명하고 평화로웠던 가을날.

부드러웠던 솜털 구름. 다정하게 불어오던 하늬바람.

그 순간이 아련하게 스쳐 지나가자 타티아나는 갑자기……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어졌다.

타티아나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 무렵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해맑고 순진무구했지만 동시에 가장 멍청했던 시기였노라고.

그녀에게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는 뜻이다.

‘나 그때 코 흘리면서 울고 있었지, 아마?’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그러다 갑자기 웃으면서 칼춤도 췄지?’

아아, 미친 자여. 이 미친 자여.

내가 왜 그랬을까.

얼어붙어 있던 그녀가 기드언을 보고 박 터지듯 내뱉은 외마디가 무엇이었나.

‘……왕자님?’

그건 발터의 1왕자에 대해 뭐 따로 들은 게 있어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합리적인 추론이 전혀 아니었고, 순전히 그가 동화 속 왕자님처럼 생긴 탓에 반사적으로 나온 감탄사였다.

그러니 타티아나도 이불만 찰 게 아니라 그의 외모 탓을 좀 해 보고 싶다.

왜 저 얼굴은 어린 나이부터 한순간도 본분을 게을리하지 않았느냐고.

미모가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아닌가.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기드언이 외양만 그리 보였던 게 아니라 실제로도 왕자님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게 왜 다행이냐 하면, 그가 만약에 저택에 수도 없이 드나드는 기사 중 누군가의 아들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타티아나는 성장하며 그 기사의 아들과 친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타티아나를 물색없이 놀려 댔겠지.

‘근데 너, 그때 왜 나보고 왕자님이라고 했어? 타냐,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 하고.

만약 그런 식으로 깐족댔다면 타티아나는 참지 못하고 검 손잡이를 꽉 쥐었을지도 모른다.

‘그치. 살인을 면한 거지. 참 다행이야. 근데 이렇게까지 해도 정신 승리가 안 되네?’

타티아나는 그 어린 날 이후로도 왕자를 심심치 않게 마주치곤 했다.

블룸 경을 존중하는 마음에서였는지, 기드언이 왕실 연무장을 놔두고 종종 블룸 가에서 검술을 사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첫 만남의 기억 때문에 기드언을 마주칠 때마다 몹시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래도 이제는 실소가 나오는 걸 보니 어릴 때 기억은 조금씩 미화되긴 하나 보다.

그녀가 변함없이 오늘도 본분을 다하고 있는 그의 미모를 감상하며 미소 지을 때였다.

귀족들은 타티아나가 조용히 옛 기억에 젖어 있게 놔두지 않았다.

어디선가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왕자 전하께서는 오늘도 파티에 관심이 없으신가 봅니다.”

“매번 그리하신 걸요, 뭐.”

“걱정입니다, 참. 여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시니…….”

유명인에게는 언제나 명암이 있다.

선망 어린 시선 뒤에는 질시와 음습한 소문이 따라다니곤 한다는 것이다.

타티아나는 사람들이 그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따져 보는 사유의 과정을 거쳤으리라곤 생각 안 한다.

그들은 그런 거 상관하지 않고 그냥 떠드는 거다.

왜? 잘나가는 사람의 인생에 흠집을 내고 싶어서.

그 결과, 저 잘난 기드언 아인슬러에게도 몇 가지 추문 정도는 달라붙어 있었다.

타티아나는 거기에 그의 잘못이 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렇지만 굳이 그에게서도 원인을 찾아보자면 파티에서 보여 주는 저 오만하고도 무성의한 태도에 있다고 하겠다.

기드언 아인슬러의 나이 스물넷.

그는 아직 정혼자가 없었고, 이건 왕족치고는 다소 늦은 나이였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겠으나, 그는 여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래, 여기까지도 뭐 그러려니 할 수 있겠으나, 그는 정도가 좀 심했다.

왕실이 주관하는 파티에서 여인과 사담을 나누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눈빛 한 번 주지 않았으니까.

기드언보다 5살 어린 이복 아우도 여인과 춤 정도는 추는데 말이다.

작년 이맘때 영애들의 데뷔탕트를 겸한 파티가 있던 날, 기드언이 회장을 한 번 쭉 둘러보더니 일언반구도 없이 자리를 떠 버렸다는 건 유명한 사교계 비화였다.

타티아나도 뮐러 부인이 엄선한 티 파티 정도는 참석하곤 해서, 그에 관해 어떠한 뒷말들이 떠도는지 상당히 구체적으로 주워들을 수 있었다.

성적 취향이 남달라 사실은 그를 따르는 부관들과 그런 사이라더라.

이미 성혼한 그의 누이, 스칼렛 공주와 한 방에 들어가면 통 나오지 않는다더라.

혹은…… 성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이상한 걱정까지.

‘진짜 사람들 너무하네.’

차라리 친화력이 부족하다든가, 대중을 포용하는 능력이 좀 아쉽다든가 하는 식의 말이라면 건전한 비판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너무 추잡스럽고 떠드는 의도가 빤해서 한숨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어릴 때의 추억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친부를 기억하는 사람 중 하나여서일까.

타티아나는 누가 기드언을 놓고 입방아를 찧으면 괜히 기분이 나빴다.

편을 들어주고 싶기도 했다.

연애와 결혼이 인생에서 몹시 중요한 사람도 있지.

삶의 목표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지.

그렇다면 아닌 사람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라.

타티아나가 보기에는 여자 없이는 못 살거나,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남을 깎아내리는 인간들보다는 기드언이 훨씬 나아 보였는데, 이 나라 귀족들은 아닌가 보다.

“전하께선 눈이 참 높으신가 보오.”

“취향이 남다르신 걸 수도 있지요…….”

타티아나는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날카롭게 벼려진 검술가의 기운이라서, 연회장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동시에 움칠했다.

그리고 본인 못지않은 발군의 미남들만 부관으로 거느린 탓에 이 뜬소문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남자, 기드언 아인슬러는 홀 구석에 서 있는 타티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회장 안의 사람들이 이상한 걸 목격한 건 그 순간이었다.

마치 얼음 조각 같았던 왕자의 얼굴에…….

“왜 갑자기 웃으시는 거지?”

타티아나는 불과 몇 초 전, 자신이 살기를 흘려보냈던 귀족의 말에서 모두가 자신과 같은 광경을 보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기드언은 이유 없이 미소를 머금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시는 것 같소만……?”

타티아나는 귀족의 말에서 또 한 번 확인했다.

기드언은 정말로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너무 우아하지만 얄밉게까지 느껴지는 느린 속도로.

덕분에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눈치챘다.

‘일부러 저러는 거구나.’

저건 이목을 끌기 위한 의도적 행위였다.

그리고 기드언이 정확히 타티아나의 앞에 멈춰 선 순간, 파티장의 석조 기둥 53이 되려고 했던 그녀의 계획은 완전히 허사로 돌아갔다.

“타티아나 블룸, 오랜만입니다.”

“……예, 전하.”

타티아나는 왕자가 자신을 블룸이라고 부르자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현재는 타티아나 뮐러였으니까.

“어릴 때 얼굴이 그대로 남아 계십니다.”

그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서른 번 이상은 서로를 마주치고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은 건 겨우 세 번째였다.

첫 만남, 블룸 경의 장례식, 그리고 오늘.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말한 ‘어릴 때’라는 단어에서 그 역시 첫 만남을 떠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자 여지없이 부끄러워지긴 했지만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전하.”

이제 그들이 더 나눌 말에는 어떤 게 남아 있을까.

데뷔탕트를 축하합니다?

공무를 수행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며 도란도란 고인에 대한 추억을 나눌 차례인가.

……왜 이 사람은 안 가는 거지. 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더 있다고.

타티아나는 이 상황이 어색했는데, 참 낯설다는 듯 관전하고 있는 건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현 유명인과 구 유명인의 만남이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화젯거리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더구나 1왕자는 파티에서 여인에게는 사적인 인사조차 건넨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왕자는 뭔가 이상한 작정을 하고 나온 것 같았다.

몇 년씩이나 파티를 등한시해 왔으면서, 이제는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오늘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즐거운 듯도 하지만, 어딘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표정으로.

“타티아나 블룸.”

“네.”

“…….”

“……왜 그러시죠. 뭐든 말씀하세요, 전하.”

“뭐든?”

기드언은 ‘정말로?’, ‘그래도 괜찮겠어?’ 눈빛으로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모두가 눈을 뗄 수 없게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도 평온하게 연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음성을 타고 흘러나온 건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타티아나 블룸, 내 비가 되어 주십시오.”

쨍그랑.

모두의 당혹감을 반영하듯, 누군가가 백포도주 잔을 대리석 바닥에 떨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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