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장. 부부의 탄생 (3)
타티아나는 한동안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뒤늦게 어떠한 말이라도 해 보려고 했으나…….
“어…… 저기…… 그…….”
그중 어떤 것도 문장으로 완성되지 못했고 그녀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으나 타티아나는 왕자 앞에서 어리숙하거나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게 참 싫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를 의식했던 적은 예전에도 가끔 있었던 것 같다.
왜 유독 왕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
어릴 때의 기억은 비교적 오래가기 때문이고, 그중에서도 유난히 선명한 순간이 있어서겠지만, 또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타티아나의 친부는 수많은 기사들을 직접 가르쳤고 양성했다.
기드언 아인슬러는 그 무수한 젊은이들 중, 검술로 블룸 경의 감탄을 이끌어 낸 유일한 사내라서.
어릴 땐 타티아나도 그런 기드언에게 부러움과 묘한 경쟁 심리를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한데 다 크고 난 뒤에 그 앞에서 또 이렇게 어수룩한 반응을 보이다니.
하지만 이건 그녀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리라. 주변에서 떨어뜨린 유리잔으로 미루어보건대 다른 이들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큰 위안이 되어 주진 않았다.
“지금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을 겁니다.”
“…….”
그녀는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방금 청혼한 남자란 원래 상대에게 친절할 수밖에 없다.
기드언은 다시 한번 풀어서 말해 주었다.
“예, 타티아나는 방금 나한테 청혼받은 겁니다.”
자, 이제 어떡할래.
그의 눈에는 옅은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사람들과 타티아나의 동요를 즐기는 것 같기도 했고 그녀를 놀리는 듯도 했으며, 어떻게 나올지 반응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타티아나는 꽤나 대범한 편이었다.
어릴 때 아이한테 운동시키라는 말이 괜히 있을 리가.
무도는 사람의 호전적인 면과 승부욕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침착성 또한 길러 준다.
모두가 이 참변에 가까운 청혼에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자기 정신을 차린 건 당사자인 타티아나였다.
그녀는 일단 파티장 안부터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석에 앉아 이쪽을 내려다보는 왕후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미소 짓고 있는데, 그 미소에 균열이 느껴진다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하지만 타티아나에게는 그래 보였다.
그 옆의 2왕자는 얼이 빠져 있었고, 기드언의 누이는 부채로 입을 가리고 있는데 눈이 웃고 있다.
그래, 진짜 웃는 건 저런 거지.
반면 기드언이 몰고 다니는 미남자들은 하나같이 난처한 얼굴이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었고, 내가 저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이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중에 타티아나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사람이 있다면 누굴까?
빠져나갈 구실은?
“글쎄요. 시어머니 되실 분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요.”
“시어머니랑 결혼합니까?”
“…….”
기드언이 시시한 말을 들었다는 듯 대꾸해서 타티아나는 또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뭐라더라. 고부 갈등을 푸는 열쇠가 남편에게 있다던가?
다 또래 소모임에서 주워들은 거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그 순간, 다른 아가씨들이 그토록 치를 떨던 공개 프러포즈를 자신이 받아 버렸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했다.
아, 이렇게 그들과 거리감이 생기는 건가?
어렵게 사귄 친구들인데.
딴에는 겉돌지 않기 위해 그 모임에 쏟아부었던 노력을 떠올리며 타티아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기드언은 그걸 안 좋은 신호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그녀만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차피 친모도 아닙니다.”
“사연이 복잡한 가문으로 시집가는 건 생각을 좀 더…….”
“혹시 결혼해 봤습니까? 예상외로 이유가 하나같이 현실적입니다.”
“……이번에 하면 초혼이에요.”
기드언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고 타티아나는 아까보다 더욱 곤란해졌다.
남들 눈에는 그들이 몹시 화기애애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기드언과 타티아나가 따로 교류하던 사이인 건가, 의심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진지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 타티아나는 자신의 양부모가 있는 곳을 돌아보며 말했다.
“부모님과 상의를 해야 할 것…….”
그런데 아무래도 그 상의는 힘들지 싶었다.
뮐러 부인은 얼굴이 너무나 새파래져 곧 혼절할 사람 같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의논하고 결정하라더니. 코칭을 해 줘야 할 사람이 저렇게 정신을 놓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 누구의 의견을 신경 쓰고 있습니까, 타티아나. 발터 성문법상 데뷔탕트를 치른 여성은 가문의 의사와 관계없이 본인의 혼인을 결정할 수 있고, 당신은 성인입니다.”
“…….”
말이야 바른 말이었다.
그런데 법의 침투력은 관습과 비교했을 때 어디까지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은 되도록 하지 말라는 사람들의 말은 왜 있는 걸까.
사실 타티아나는 뮐러 부인의 저 반응이 반대하는 제스처인지 단순히 놀라서인지도 잘 모르겠다.
“타티아나도 친부모는 사실 따로 있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요. 이건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전하.”
“아니요, 제게는 전혀 갑자기가 아닙니다.”
“…….”
“다리에 후유증은 없습니까. 인대가 상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타티아나가 거동에 무리가 있을 만큼 다친 건 인생에서 딱 한 번이었다.
기드언은 그녀가 작년 파티에 불참했던 일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던 타티아나에게는 그의 말이 꼭 이렇게 들렸다.
그녀가 예정대로 파티에 참석했더라면, 자신은 그때도 청혼했을 것이라고.
그러니 갑자기가 아니라고.
타티아나의 의문이 고작 이 정도로 해소될 리는 없었다. 오히려 들을수록 더욱 의아해질 뿐이다.
왕자는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나?
그녀는 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기드언은 그때부터 조건을 하나둘 달기 시작했다. 무슨 거래를 제시하듯이.
네 선택을 수월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듯, 사람을 꼬여 내려는 것처럼.
“모든 의식과 절차는 제 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따로 손이 가는 일 없을 겁니다.”
“…….”
몸만 오라는 뜻이었다.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거기에도 최대한 맞출 수 있습니다.”
“…….”
예식에 대한 로망이 있다면 그것도 들어주겠다는 거였다.
어떡하지. 그런 건 없는데.
“뮐러 가에서 관리하고 있는 블룸 가의 재산도 타티아나의 명의로 돌려 놓겠습니다. 사실은 진작에 처리되었어야 할 부분인데 안 했더군요.”
“…….”
시큰둥하던 타티아나는 거기에는 조금 반응했다.
그녀의 부모는 일가붙이 없는 평민 출신 귀족들이었다.
친부모 사후 타티아나는 여러모로 후견인이 필요했었다.
하지만 진작에 성인이 되었으니 결혼을 하든, 그냥 독립을 하든 블룸 가의 재산은 이제 그녀가 관리해야 할 그녀의 몫이었다.
금전이 얽히면 잡음이 일거나 서운한 일이 생길 순 있겠지만 법적으로는 당연한 절차였고, 아무런 하자가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뮐러 공작은 아버지의 벗이었고, 뮐러 가는 블룸 가의 유산을 탐내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잘 사는 가문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잘 먹고 잘 입고 보살핌을 받았으니 타티아나는 묵직하게 성의를 표시할 생각도 있다.
그런 그녀가 이 모든 일을 세월아, 네월아, 하고 1년간 방치한 건 단지 좀 귀찮아서였다.
한데 이 귀찮은 일을 당신이 대리해 주고 이 결혼으로써 얻는 이득은 뭘까?
승냥이 떼 같은 귀족들까지 구경꾼으로 동원해 가면서?
고심하던 타티아나의 머릿속에는 몇몇 가지 그럴싸한 사유가 떠올랐다.
그중에 가장 단순하면서도 일차원적인 걸 하나 꼽아 보자면.
“혹시 소문을 잠재울 구실이 필요하신가요?”
“……무슨 소문?”
모르는 건가? 사람들이 당신을 안줏거리 삼아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을 떠들던데?
만약 정말로 모르는 거라면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타티아나는 이렇게 얘기해 주고 싶었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사실 별 게 아니라고. 그냥 당신한테 질투가 나서들 그러는 거라고.
그게 그들에게는 당신을 마음대로 갖고 놀고 당신의 우위에 서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서.
그러니 그들의 정성과 노고를 가엾게 여길 필요까지는 없지만, 괘념치는 말라고.
분개할 가치도 없으며, 당신은 그런 비루한 자들에게 여유 시간을 쏟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지 않냐고.
주제도 모르고 왕족에게 괜한 조언을 건넬 뻔했는데, 그가 본인에 대해 어떤 험담이 떠돌고 있는지 잘 모르는 듯하니 다행이었다.
아닌가. 그냥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인가.
그렇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다행이었다.
타티아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다시 회장을 크게 한 번 둘러보았다.
뮐러 부인은 영 위태위태한 것이 이제 정말로 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왕후의 눈에서는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한 초조함이 읽힌다.
귀족들은 모두 타티아나를 보며 그녀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정작 그녀는 지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순간, 타티아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건 나뿐만이 아니고, 다음을 모르는 건 다들 마찬가지가 아니겠냐고.
그러자 그녀는 이 상황이 골치 아프면서도…… 좀 재미있게 느껴졌다.
결말을 종잡을 수 없어서 매번 사람들의 뒤통수를 쳐 대는 연극에 참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전하, 참 재미있네요. 전하께서는 제가 이걸 거절할 수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현실적으로?”
수락했을 때의 파장도 크겠지만, 거절했을 때의 후폭풍도 만만치 않다.
어쩌면 후자가 훨씬 더 심각할지 모른다.
애초에 왕족의 청혼을 거절한 사례가 발터 건국 이래, 있긴 한 건가?
“힘들겠지요. 현실적으로는.”
그걸 알면서도 이 판을 깔았다면 확신범이었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을 샐쭉하게 흘겨보았으나, 그는 담담히 덧붙였다.
“그러나 내가 당신 마음에 차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나도 압니다. 싫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그렇다면 당신도 지금 약간은 초조할까. 그런 감정을 느끼긴 하는 건가.
타티아나는 그게 많이 궁금했는데 방금 청혼한 남자는 여기 있는 어느 누구보다 표정 관리가 잘 되는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역시도 타티아나를 응시하며 다른 이들처럼 그녀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타티아나는 뺨을 몇 번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어쩐지. 아침부터 사고 치기 참 좋은 날씨다 싶더라니.
그녀는 웃으면서 기드언에게 천천히 오른 손등을 내밀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기드언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그 입술을 터뜨리며 바람 소리를 흘렸다.
타티아나의 대답이 분명 흡족한 것 같은데, 왜 흡족해하는지는 여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그는 이어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가볍게 갖다 댔다.
“그럼 성혼의 날 뵙겠습니다. 나의 비.”
회장 안에 끝도 없는 적막이 감돌았다.
만약에 이 장소에 바늘이 떨어진다면 그 소리까지도 모두의 귓가에 들릴 것이다.
그리고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을 현실로 끌어낸 건 그보다 더 큰 쿵, 하는 소리였다.
뒤를 돌아본 타티아나의 눈동자는 황당무계한 청혼을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커다래졌다.
뮐러 부인이 진짜로 어억, 하며 뒤로 넘어갔던 것이다.
타티아나는 곧바로 달려가 기도부터 확보하고 타박상 부위를 살폈다. 그러고는 호위 기사를 핀잔했다.
“부축을 했어야죠.”
기사가 반사 신경이 이것밖에 안 되면 어떻게 해?
그 모습을 말끄러미 지켜보던 기드언은 시종을 손짓으로 불러 뮐러 일가를 저택으로 모시거라, 지시했다.
그리고 여유롭게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언제나처럼 가장 먼저. 이제 여기에 볼일은 다 끝났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