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화 (5/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장. 부부의 탄생 (4)

* * *

타티아나는 며칠 동안 제 침실과 정원만을 오갔다.

본인 나름대로는 자숙의 의미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녀를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공작가에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는 걸.

혹 맘에 안 들거나 어떻게든 구명을 해 주고 싶었다면 중재는 그때 시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왕족이 특정 상대를 지목하여 사담을 걸었는데, 중간에 끼어드는 것도 참 난감한 일이었다.

뮐러 공작은 요즘 들어 고민이 많은 눈치였다.

타티아나를 볼 때마다 한숨만 푹푹 쉬어 댔다.

너무 고뇌가 깊은 얼굴이라 타티아나는 화를 내도 좋으니 그냥 무슨 말이라도 좀 해 주지, 하는 심경이 됐다.

당일 가장 격한 모습을 보였던 뮐러 부인은 오히려 반응이 유했다.

그녀는 이제 타티아나가 예전보다 멀게 느껴지는지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궁금해했을 뿐이었다.

‘기드언 전하랑 많이 가까운 사이였니?’

‘그런 건 아니지만 친아버지 덕에 인연이 있으니까요.’

타티아나는 한때 기드언에게 부러움에 가까운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그 관심은 호감 쪽에 상당히 가까워졌다.

어쩌면 기드언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

이러든 저러든 왕족에게 결혼과 후사란 의무이니 기드언은 그녀를 나쁘지 않은 혼인 상대로 고려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뮐러 가처럼 번듯한 혼처도 찾기 힘들었다.

비록 타티아나는 친딸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친부는 엄청난 전공을 세우고 순직했으니 왕가 입장에서는 명분도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미적지근하게 받아들이는 타티아나와 달리 귀족 사교계는 아주 뜨거웠다.

왕자가 여인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더니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더라, 둘이 어릴 때 아주 뜨거운 불장난을 한 모양이다, 에이, 그리 금욕적인 척하시더니 등등.

현재 그 소문에 열심히 부채질을 하고 있는 건 무서운 속도로 이 결혼을 추진하고 있는 남자, 기드언이었다.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거기에 최대한 맞추겠다는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왕자 측에서는 사람을 보내와 날짜와 규모 등에 대해 그녀의 의사를 물어왔다.

타티아나는 그쪽 편한 대로 하시라, 시종을 그대로 돌려보냈고 왕자 측은 그때부터 옳다구나, 싶은 사람들처럼 일을 진행시켰다.

이 엄청난 속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인물은 현재 발터에서 한 명뿐이었다.

2왕자의 친모이자 와병 중인 국왕을 대리하는 권력자, 왕후였다.

‘여염집 처녀도 이런 식으로 데려오는 법도는 없지요. 조금만 시일에 여유를 두시지요, 왕자.’

이건 난 네 결혼이 마음에 들지 않고, 어떻게든 어깃장을 놓고 싶다는 표시였다.

하지만 기드언은 이미 그쯤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전혀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기만 했다.

‘무수한 귀족들이 증인으로 있는 자리에서 내 입으로 공언했습니다. 내 비를 기약도 없이 기다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말 못 할 고충을 겪게 된 건 시녀들이었다.

왕자 측 인간들이야 그저 숙덕거리다가 신나게 일이나 저지를 줄 알지, 뒷수습은 죄다 그녀들의 몫이었다.

시녀들은 왕자비의 전속으로 배정되자마자 업무 분장의 여유도 없이 다짜고짜 결혼 준비부터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녀들의 얼굴이 며칠 만에 너무 상해 버리자 왕자의 측근들은 고언이라도 올리듯 괜한 농을 했다.

‘전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신부를 훔쳐 오는 줄 알겠습니다.’

‘내 입장에선 훔쳐 오는 게 맞지. 당연한 얘기를 하는군.’

왕자가 머쓱한 기색도 없이 선선히 인정하니 이제 딴지를 걸 수 있는 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녀들은 군소리 없이 성혼식 준비를 하면서도 틈틈이 왕자비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본래 모실 이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녀들은 자연히 뮐러 가 하녀들과 접촉했고, 이건 일종의 인수인계였다.

“비전하께선 뭘 잘 드시나?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다 잘 드시고 가리는 것 없으십니다.”

하녀들은 처음에는 도무지 빈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왕실 시녀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하나둘씩 수다스러워졌다.

집안의 아가씨는 출생과 성장 환경이 남달라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고, 하녀들은 그에 대해 얘기할 거리가 많았다.

“가끔 알 수 없는 이유로 빵이나 밀가루를 제한하는 시기가 있으십니다. 그때는 먼저 언질을 주시니 육류와 채소류 위주로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뭐야, 그럼 가리는 게 있는 거잖아.

시녀들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비전하께선 좀 깐깐한 성품이신가?”

“전혀요. 빵을 끊으셔도 타인에겐 화를 내지 않는 상당한 인격자이십니다.”

하녀들은 타티아나가 밀가루를 끊었던 최장기간을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으나 키득거리기도 했다.

실제로 타티아나는 함께하기에는 꽤 편한 주인이었다.

관심사가 유독 좁고 깊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공작 부인이 권유하는 소모임만큼은 싫은 내색 없이 참석했고 생각보다 열심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좋아하는 분야와 그렇지 못한 분야에서의 성취도는 천지 차이라서 티 파티에 다녀오면 타티아나는 가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묻곤 했다.

‘있잖아. 입술에 이거. 작년에 유행했다는 색이랑 많이 다른 거야? 내 눈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여서.’

‘아가씨, 하늘 아래 같은 색조란 건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

‘당연하죠. 설령 같은 색이라도 피부 톤에 따라 발색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아아. 하긴. 원래 같은 검술을 계승해도 똑같이 구사할 수는 없어. 사람마다 신체 조건이 다 다르고 고유의 습관이 있거든.’

‘……이럴 때 아가씨랑 얘기하기 좀 싫어져요.’

타티아나는 하녀들이 그런 식으로 과한 농담을 할 때도 아아, 그래? 하고 웃으며 넘어갔다.

나름대로 정이 많이 들었던 하녀들은 헤어지기 아쉽다고 생각하며 좀 서운한 눈을 했다.

“가끔 대답을 안 하실 때가 있긴 한데요. 정말 뭔가에 집중하시느라 그러는 경우는 거의 없고요, 대개는 일부러 못 들은 척하시는 거예요.”

왈가불가하기 싫다는 것이지요.

“시력과 청력이 애초에 일반인 수준이 아니라서요. 놀라지 마시고 그냥 기사구나,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수월하실 겁니다.”

한참을 늘어놓던 하녀들에겐 이제 마지막 주의 사항만이 남아 있었다.

사실 이게 오늘의 핵심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녀들은 나직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운동할 땐 방해하지 마세요.”

“그때가 가장 예민하고 진지하실 때입니다.”

그녀들은 정말 진심을 담아서 말했으나, 듣고 있던 시녀들의 미간 주름은 깊어졌다.

다 적어 놓긴 했는데…… 그러니까 대체 어떤 사람이라는 거지?

이해가 될 듯 말 듯 아리송했다.

어쨌든 이제껏 모셔 보지 못한 타입이라는 것만큼은 다들 알아들었다.

* * *

인력과 금력을 갈아 넣은 성혼식은 보름 만에 치러졌다.

전례 없는 속도였다.

너무 후다닥 지나간 탓일까?

타티아나는 예식에 대한 로망은 없었으나 이 모든 게 다소 싱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결혼 준비가 지나치게 길어지면 쓸데없는 고민이 많아지고, 괜한 우울과 감상에 젖게 된다.

굳이 없어도 될 분쟁 또한 생겨나기 마련이다.

여기에 양가 어른들까지 말을 하나둘 얹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아주 지옥이 펼쳐지는 거다.

물론 이 과정은 어떤 면에선 필요할지 모른다.

서로가 어떤 가풍에서 자랐는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기회였고, 앞으로 살면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 상대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지 엿볼 수 있는 시험대이기 때문이다.

다만 타티아나는 하루도 아니고, 고작 반나절 정도의 예식에 자신의 노고와 시간을 투여하기는 싫었다. 여기에 감정을 쥐어 짜내 가면서까지 고통받는 건 더욱 싫었다.

그녀는 궁극적으로 ‘결혼’을 하는 것이지, 결혼‘식’을 하려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쓸데없는 줄다리기로 자존심 싸움이 시작되려 하기 전에, 어른 중에 누군가가 현물이나 지참금 따위를 가지고 속물적인 발상을 떠올리기 전에, 모두가 어어어? 하며 정신을 차렸을 바로 그때!

……이미 홀 안에 입장해 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모두가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기간을 축소하는 것이다.

그 결과 타티아나는 성가신 일 하나 없이 성혼식을 아주 속 편하게 끝마쳤다.

다만 너무 전광석화와 같은 나날을 보낸 탓에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단점은 남아 있다.

어제와 지금의 나는 대체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녀는 얇고 부드러운 재질의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몇 시간 전 일을 되짚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오늘따라 더욱이 최선을 다한 기드언의 이목구비였다.

타티아나는 일찌감치 결혼한 티 파티의 일원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결혼식에서 남편이란 신부가 높은 굽에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붙들고 있는 손잡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인공은 신부이고 신랑은 그냥 들러리라는 거였다.

그러나 화려한 예복마저 무리 없이 소화하는 그의 미모를 본 순간 타티아나는 생각했다.

오늘의 들러리는 나인 것 같다고.

만에 하나 기드언이 예의상일지언정 ‘아름답습니다, 비.’ 이런 말을 내뱉었다면 기분이 떨떠름할 뻔했는데, 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 타티아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제 가자는 듯 손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예식 중, 기드언이 입을 연 건 딱 한 번이었다.

성혼 서약서에 서명을 할 때였다.

‘…….’

왕가의 여인들은 결혼 전 가문의 성을 자신의 이름 중간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때 잠시 머뭇거려야 했다.

순간적이었지만 이걸 블룸이라고 쓰는 게 맞나, 뮐러라고 쓰는 게 맞나, 둘 다 써야 하나 헷갈렸던 것이다.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던 기드언은 말했다.

‘왜 그걸 고민합니까. 블룸이라고 쓰세요.’

그는 아예 그녀의 손등을 쥔 채 ‘타티아나 블룸 아인슬러’라고 쓰게끔 손을 움직거렸다.

그렇게 사람을 서명 하나도 혼자 못 하는 맹추로 만들어 놓고는 태연하게 말하기까지 했다.

‘내 비가 긴장을 좀 많이 했군. 계속 진행하도록.’

참 무례하고 오만하면서도 이상한 쪽으로 친절을 잃지 않는 사내였다.

타티아나는 이불 끝을 말아 쥔 채 비죽 웃었다.

그때 침소 문이 열렸고, 기드언은 딸린 시종 없이 홀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타티아나와 달리 잠옷이 아니라 가벼운 평복 차림이었다.

왠지 일어나서 맞아 줘야 할 것만 같아 그녀는 허리를 세웠지만, 그는 편히 누워 있으라는 듯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괜찮으니 그냥 있어요.”

“…….”

혹시 사람들이 있어서 공대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기드언은 단둘이 있을 때도 계속 말을 높였다.

어릴 때는 편하게 얘기했던 것 같은데.

이제, 당신도 나도 그럴 나이가 아니라는 건가?

어쨌든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딴에는 존중받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그의 공대는 타티아나의 귀에 꽤 기품 있게 들렸으니까.

기드언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옷도 갈아입지 않고 타티아나의 옆에 그대로 길게 누웠다. 그러고는 팔뚝을 본인의 눈가 즈음에 얹었으며, 그 뒤로는…… 계속 그렇게 누워만 있었다.

당연하지만 타티아나는 이 상황이 몹시 어색했고, 남자와 나란히 누워있는 게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남편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랐던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익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부부는…… 밤에 해야 하는 일이 있다잖아.

손만 잡고 자려는 건 아니지?

타티아나는 팔뚝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누워 있는 기드언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주무세요?”

그는 미동도 없이 대답만 했다.

“아니요.”

“저, 우리요…….”

“네.”

“그냥 이렇게 자나요?”

순간 그는 입술 새로 픽,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냉랭한 나머지 성격이 나쁘다는 말이 돌던데.

어릴 때 기억을 반추해 보아도 사교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지 싶은데, 그는 타티아나가 무슨 말을 하면 꽤 쉽게 웃었다.

반듯하게 누워 있던 기드언은 상체를 조금 세우더니 턱을 괴고 타티아나를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얼굴이 아까보다 가까워졌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하늘색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빛을 내고 있었다.

“비께서는…….”

“…….”

“얘기도 몇 번 안 나누어 본 남자한테 안기는 게…… 무섭지도 않습니까.”

“……글쎄요.”

“난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무서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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