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장. 부부의 탄생 (5)
선공은 필승이라고 누가 그리 말하였나.
타티아나는 그 말을 한 사람을 색출해 내서 아니지 않냐고 따지고 싶었다.
야심 차게 찔러보았지만 돌아온 말이 하도 심상치 않아 그녀는 괜히 눈동자를 한 바퀴 돌렸다.
타티아나가 우물쭈물하자 기드언은 시시하다는 듯, 혹은 말 안 해도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는데 그녀는 도리어 거기에 떨떠름해지고 말았다.
어쩐지 지금 어리숙한 애 취급을 당한 것 같아서.
무시당한 것 같아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안기는 게 무섭지 않냐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타티아나는 많이 긴장했다. 하지만 그가 두려운 존재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만약 한밤중에 골목에서 둔기를 든 신원 미상의 괴한들을 마주친다 해도 그녀 쪽에서 벌벌 떠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길쭉한 막대기 하나 없이 건장한 상대를 제압하는 건 그녀에게도 까다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언제나 자신이 있었다.
이길 자신?
아니.
그 싸움에서 끝내 패배할지언정 상대 또한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줄 자신이.
한마디로 나 혼자서는 절대 안 죽겠다는 거다.
그런데 내가 왜 당신을 무서워해야 해.
이 방에서 얼마나 나쁜 짓을 할 생각이길래.
타티아나가 점점 몸에 힘을 주고, 위험한 눈초리로 그의 신체를 훑어 내리자 기드언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비.”
“네.”
“난 지금 비가 마지못해 누워 있는 건지, 정말 하고 싶은 건지 그걸 알고 싶어서 물어본 겁니다. 강제로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게 아녜요.”
“…….”
“그러니까 안 내키면 그냥 조용히 잡시다.”
“…….”
“남편한테 폭력 쓰지 말고.”
그러자 타티아나의 표정은 한층 더 오묘해졌다. 실제로 그녀는 지금 급소의 위치를 하나하나 떠올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티가 났나.
“혹시…… 제가 지금 살기를 흘렸나요?”
타티아나는 그럴 리가 없는데?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정확히 5살 때부터 목검을 갖고 놀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호시탐탐 아버지의 진검을 노리곤 했다.
그런 그녀가 이제 와서 살기를 노출하며 초보자도 안 하는 실수를 했을 리 없었다.
근데 어떻게 안 거지?
“그게 아니라, 방금 여차하면 날 죽여 버리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랬군요.”
못 감춘 건 살기가 아니라 표정이었나 보다. 앞으론 주의해야지.
그런데 타티아나는 그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게 결코 아니었고, 막 결혼한 남편한테 상해를 입히려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가 잠자리에서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는 했다.
꼭 소중히 대해 주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타티아나는 기드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의사는 충분히 확인했다는 듯 어느새 바로 누워 있었다.
평온한 나머지 여유마저 엿보이는 얼굴에선 어떠한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다.
첫날밤을 맞이한 사내의 성마른 조급함 같은 건 그라는 사람에게 존재하지 않는 걸까?
‘설마 그 요란한 소문들이 진짜인가?’
기드언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는 모르겠으나, 타티아나는 적어도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오늘 밤,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셈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긴장했던 어깨에 힘을 풀고 뒤늦게나마 허세를 부려 볼 수 있었다.
다소 발칙한 농담까지도.
“전하.”
“……또 왜 그럽니까.”
기드언은 다시 턱을 괴고 그녀와 눈을 맞춰 주었다.
겉으론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꼭 그녀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제 친부께서는요. 싸움은 되도록 피하라고 하셨어요.”
“응, 그런데.”
“네, 그런데요. 만약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빨리 끝내 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말도 하셨어요. 전쟁은 속도전이라고요.”
“…….”
“일격필살. 아세요?”
부부간에 꼭 치러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이참에 빨리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는 은유였다.
하나 그 말을 내뱉는 타티아나의 눈에는 간절함이란 게 정말 한 톨도 없어서, 기드언의 입매는 살짝 비뚜름해졌다.
무서워하지 않는 것까진 참 좋은데…… 비유가 마음에 안 드네.
너한텐 이게 싸움이고, 피해 갈 수 없는 절차야?
고작 통과의례일 뿐이냐고.
그는 비딱하게 괴고 있던 얼굴을 타티아나 쪽으로 가까이했다.
“색사는 전쟁이 아닐뿐더러, 그게 일격에 끝날 것 같으면 비와 나는 토끼입니다.”
이건 일단 시작하면, 난 절대로 한 번에 끝내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녀가 이 의미심장한 말을 곱씹을 여유를 주지 않고 몰아세우듯 물었다.
“비는 내가 남자로 느껴지긴 합니까?”
“그럼 설마 여자로 느껴…….”
기드언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그거 말고.”
“…….”
“오늘 나한테 안겨도 괜찮겠냐고 묻는 겁니다.”
“…….”
“좋냐고.”
어쭙잖은 말장난이 가로막히자, 타티아나는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이 간단한 질문이 어렵다는 듯, 한참이나 그 상태였다.
기드언은 그녀가 왜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딱 잘라 싫은 것은 아니나, 마냥 좋다고 인정하자니 애매한 거다.
해야 한다면 까짓것 하겠지만, 정말로 하고 싶으냐고 속마음을 묻는다면 그 답은 본인도 잘 몰라서.
그리고 이건 타티아나가 이 결혼에 대해 갖고 있는 온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드언은 상당히 일방적인 방식으로 그녀에게 청혼했다.
‘내가 조만간 결혼이라는 걸 할까 하는데, 너 시간 돼?’ 하는 사람처럼.
타티아나가 수락했으니 그는 다른 모든 부분을 그녀에게 맞춰 줄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그보다 더했다.
‘아무 때나 상관없으니까 너 다 알아서 해’ 하는 사람처럼.
기드언이 뮐러 가로 보낸 시종들은 번번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성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런데 기드언은 절대 충동적인 마음으로 청혼한 게 아니었다.
그는 뮐러 가의 보호 아래 있는 그녀가 성년이 되기도 전에 애먼 가문과 엮일까 봐 발터 결혼법을 뜯어고치는 데에 일조한 바 있었다.
한데 네가 잠자리마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굴면.
그냥 내 마음대로 하라는 듯 미온적인 태도로 나오면…….
‘내가 상당히 서운할 것 같지 않아?’
너무 서운해서 눈물까진 안 나오더라도 오기는 생기려고 했다.
기드언은 얠 어떻게 해야 할까,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경우의 수를 따지는 사냥꾼처럼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한참 뒤, 그는 가느스름하게 떴던 눈매를 바로 하며 제안하듯 말했다.
그는 그녀가 이 결혼과 밤의 관계에 감정적으로도 책임지는 부분이 있길 바란다.
“비.”
“네?”
“그럼 일단은 우리 좀 친해져 봅시다.”
“……어떻게요?”
궁금해진 타티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얼굴이 어릴 때처럼 말갛게 보여서 기드언은 입술을 말았다.
하지만 동시에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느냐고. 여자랑 친하게 지내 본 적이 없는데.
기드언은 대답 대신 양손으로 그녀의 머리맡을 짚으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자세는 그 한 번에 몹시 노골적으로 변해 버렸다.
타티아나는 머뭇머뭇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는데, 곧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뼈아프게 후회했다.
검술가가 상대의 공격을 목전에 두고 눈을 감으면 이미 진 거다.
그런데 타티아나도 변명하고 싶은 게 있다.
그녀는 이제껏 현역 기사들과 대련하며 온갖 종류의 공격은 다 받아 봤다.
검, 주먹, 화살, 표창.
그렇지만 이런 얼굴 공격은 타티아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처음 접해 본 신무기는 너무나 위력적이었다.
‘잘생긴 게 자꾸 다가오니까…… 엄청 부담스럽네.’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눈을 콱 감아 버리자 다가가다 말고 웃음을 흘렸다.
기다리면 실눈이라도 떠 줄까 싶었는데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검지로 그녀의 애교살을 살짝 끌어 내려 보았다.
‘눈도 못 뜰 거면서 왜 그렇게 용감한 척했어?’
하지만 그럴수록 타티아나는 고집스럽게 인상만 쓸 뿐이라서 그는 방법을 바꾸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타냐.”
“…….”
그러자 거짓말처럼 타티아나의 눈꺼풀이 열리고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티아나는 그의 부름에 놀란 눈치였다.
왜냐하면 ‘타냐’는 그녀조차 들어 본 지 오래된 애칭이었기 때문이다.
그 애칭을 불렀던 사람은 이 세상에 단 두 명뿐이다.
아빠, 그리고 엄마.
어쩐지 기분이 묘해져서 타티아나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기드언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혹스러워하는 그 표정을 그는 무엇 때문이라고 여겼을까.
그는 타티아나가 타냐라는 이름을 부모님과 그녀만의 영역으로 남겨 두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슬쩍 웃으며 곧바로 다른 호칭을 제시했다.
“싫으면 티티라고 부를까요.”
“티티요? 아니, 그건 뭔가 좀…….”
집에서 키우는 동물 이름 같은데. 고양이 이름 같기도 하고.
곱씹을수록 마음에 안 들어서 타티아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무심결에 뱉어 놓고 이거 꼭 고양이 이름 같네, 생각한 건 기드언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름은 보랏빛이 감도는 타티아나의 머리칼과 연녹색 눈동자에 상당히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너무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니 이 이름을 꼭 부르고 싶어져 버렸다.
“그냥 타냐라고 부르세요.”
“좀 더 생각해 보고.”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요청에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웃었다. 곧이어 정결하면서도 사늘한 얼굴은 다시금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타티아나는 아까처럼 눈을 질끈 감지는 않았다. 잠깐의 대화가 긴장감을 덜어 주어서.
하지만 당연히 입을 맞출 줄 알았던 그의 얼굴이 목덜미와 쇄골로 향하자, 그녀는 크게 움칠하며 가슴팍을 위로 띄우고 말았다.
“전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기드언은 말캉한 입술을 타티아나의 목선에 그대로 맞댄 채 말했다.
“친해지기로 했잖아요.”
“……누가 이런 방식으로 친해져요?”
“부부들은 아마 이렇게 할 겁니다.”
“…….”
“사실 나도 잘 몰라요. 비가 처음이라서.”
“…….”
“나도 초혼이잖아.”
타티아나는 눈을 끔벅거리기만 하다가 기드언이 소리 죽여 웃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어느새 입가에서 진득한 웃음기를 지워 낸 기드언은 다시금 목덜미에 코를 박고, 마치 그 향과 맛을 음미하려는 사람처럼 하얀 이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