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장. 부부의 탄생 (7)
* * *
왕성의 아침은 일찍 밝아 온다.
엄밀히 말해 성에는 완전한 밤이 오지 않는다.
누군가 잠이 들면 누군가는 깨어나고. 그 누군가가 다시 눈을 붙이면, 또 다른 이가 경계를 서고.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은 몹시 이른 시각이었다.
시녀들은 새로이 모시게 된 왕자비를 관찰하는 중이었는데, 그녀가 며칠째 똑같은 시간에 기상하자 모두는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렸다.
‘아침형 인간이셨군?’
타티아나는 사실 아침형 인간 정도도 아니었고, 새벽형 인간이라 보아야 옳았다.
한데 이 부지런함을 타의 모범이자 귀감이라고, 그렇게 이상적으로만 말할 수 있을까?
왕자비가 일찍 일어나면 보좌진들의 시계는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시녀들이 낭패한 기분을 느끼는 건 당연했고, 그들 중심에는 유독 생각이 많아 보이는 초로의 여인이 서 있었다.
이자벨 녹스.
그녀는 왕자비의 수석 시녀이자 비서관으로 내정된 인물이었다.
경력이 짱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 외에도 아주 독특한 이력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이자벨은 기드언의 동복누이인 스칼렛 공주의 젖어미였다.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시녀들 상당수가 비슷한 출신 배경을 갖고 있다.
다들 공주궁에서 차출된, 스칼렛 공주의 수족이라는 것이다.
어쩌다가 이런 사태가 발생했는가,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번 예식이 그 정도로 촉박했다고 또 한 번 답할 수밖에 없다.
왕자비의 보좌진을 새로운 인물로 채워 넣기에 주어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사태의 원흉인 기드언은 검증되지 않은 사람은 좀처럼 신뢰하지 않는 결벽이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스칼렛 공주의 시녀들은 상당히 유능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이 베테랑들은 며칠째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특별한 지시도 내리지 않고, 이렇다 할 질문도 없는 왕자비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주 무심한 표정으로 하루 종일 창밖만 내다보곤 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소파에 반듯이 앉아 있던 타티아나는 모처럼 그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사람들은 내심 긴장감을 느꼈으나 뭐든 명하시라는 듯 활짝, 아주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다시금 시선을 허공으로 돌려 버렸고, 이 어색한 침묵은 그로써 3일째로 접어들고 말았다.
“…….”
“…….”
눈치챘는가?
그렇다. 이들은 지금 상호 간의 탐색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녀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왕자비인 타티아나가 왜 그녀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느냐고.
그러나 귀족이든 왕족이든, 기왕이면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 싶은 욕구는 똑같다. 오히려 그걸 가장 꼼꼼하게 따지는 집단이 왕족이었다.
그래서 왕좌의 주인이 바뀌면, 그게 아무리 평화로운 승계일지라도 수뇌부에는 물갈이가 일어나게 된다.
타티아나는 시녀들이나 하녀들에게 고압적으로 구는 취미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이 과연 나를 어디까지 받아 줄 수 있을까?’ 좀 고민스럽기는 했다.
며칠째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한 시녀들 역시도 고민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나?’
그런데 그들이 무슨 큰 실수를 저질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사건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아. 그냥 우리 생긴 게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
기분 나쁘지만 왠지 가능성이 있었다.
도통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시녀들은 타티아나의 눈치만 살폈고, 그러다 자연히 그녀의 목덜미를 흘끔거렸다.
‘……저 요란한 자국은 없어지지도 않네.’
기드언이 만든 울혈은 나날이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저 새파랗고 시커먼 자국을 처음 목격했을 때, 시녀들은 하나같이 생각했었다.
‘두 분…… 굉장한 밤을 보내셨군?!’
비록 그날 밤의 실황을 직관하진 못했으나, 저 키스 마크는 시녀들의 상상력을 부추기기엔 충분한 소재였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기보단 험악한 자국이어서였을까?
여인에게 다정하게 구는 왕자의 모습만큼은 선뜻 떠올리기 어려워서인가.
서서히 이성을 찾은 시녀들에게 저 울혈은 언제부턴가 이렇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비한테 이만큼 눈이 돌아가 있으니, 알아서 잘들 하라는 왕자의 경고로.
어쨌든 저 무서운 걸 가리기 위해서는 오늘도 왕자비의 목에 분가루를 덕지덕지 발라야 했다.
시녀들이 그렇게 가까스로 할 일을 찾아냈을 때였다.
타티아나는 실로 오랜만에 그녀들을 향해 입을 뗐다.
시녀들은 ‘드디어’라는 감회에 젖었으나, 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어딘가 뜬금없었다.
“나, 몸 좀 풀어도 될까?”
뮐러 부인은 왕실로 시집가는 타티아나에게 당부한 게 있다.
성에 가서는 정숙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운동하면 다 말괄량이예요? 왕실 소속 여기사들은 아주 지독한 반항아들이겠네?
어머니, 그것은 편견이옵니다.
타티아나는 속으로 생각했으나, 가타부타 말꼬리를 잡지는 않았다.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았지만, 따박따박 따지는 순간 뮐러 부인의 편견에 일조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었다.
게다가 뮐러 부인은 타티아나에게 나름대로 잘 해 줬다. 비록 껄끄러운 관계였지만, 수양딸에게 파티 경험을 쌓게 해 주었고 예쁜 옷이 있으면 입혀 보고 싶어서 은근히 욕심을 냈다.
그러니 저런 고리타분한 잔소리도 뮐러 부인에겐 걱정과 우려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고개만 끄덕끄덕했고, 그녀는 결국 성으로 시집올 때 검 한 자루도 챙겨 오지 못했다.
하지만…… 개가 똥을 끊지.
그렇지 않나? 평생 일만 해 온 어른들도 은퇴하면, 갑자기 쉬니까 몸이 더 아프다는 소리가 나오는 법이었다.
타티아나가 며칠째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무력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현재 심각한 운동 금단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정원과 기드언 전하의 개인 연무장이 있습니다만, 연무장은 전하의 윤허가 필요합니다.”
“아, 이 방에서 할 거야. 그냥 스트레칭이나 하려고.”
“…….”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습관이라더라.”
왕자비가 처음으로 걸어온 대화에 형식적으로 응답하던 시녀들은 갑자기 솔깃해졌다.
성공하고 싶은 욕망은 사람이라면 모두 똑같았다.
“비전하, 그게 정말인지요.”
하지만 말을 꺼낸 타티아나는 그녀들의 기대를 배신하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글쎄. 나도 모르지.”
출생부터 대단한 배경을 등에 업고 태어난 타티아나는 이제 왕자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남편은 큰 사건이 없는 한 차기 국왕이 될 것이다.
남들이 볼 때 그녀의 인생은 탄탄대로였으나, 타티아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자신이 무수한 실패만을 경험해 왔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한참 동안 손에서 놓지 못했던 마력석.
그 응답 없는 돌멩이를 바라보며 맞이하던 매일 아침이 실패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그녀는 지금껏 이룩한 검술 성과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던데.’
만약 내가 언젠가 자타가 인정하는 성공이라는 걸 한다면, 그때 난 어머니가 대체 몇 명이 되는 거야?
지금도 벌써 두 분이나 계시는데?
입술을 삐죽거리던 타티아나는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본격적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목을 좌우로 두두둑 꺾었고, 양손을 동그랗게 굴리며 손목 관절을 풀었으며, 이어 허리, 정강이. 그리고 발목을…….
시녀들은 온갖 경이로운 기록에 빛나는 블룸 경의 친딸이 몸을 푸는 광경을 주시했다.
그러나 생각 외로 그 모습은 너무나 평범했다.
에이, 별거 없네.
기대가 식자 그녀들의 얼굴에는 싱거운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장인이 왜 장인인가.
그들은 자만하지 않고 한결같이 기본에 충실하기 때문에 장인인 거다.
몸을 제대로 풀어야 부상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이건 만인에게 공평한 진리였다.
그렇게 준비운동만 20분가량 하던 타티아나는 얇은 가운을 훌렁 집어 던졌다.
짧은 속바지 차림이 된 그녀는 손목을 또 한 번 풀더니 돌연 방 한가운데에서 물구나무를 섰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엉금엉금 걸어 벽에 붙고는 본인 팔을 벤 채 눈을 감아 버렸다.
마치 그 자세로 잘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아, 시원하다.”
“……정말이세요?”
“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야.”
“…….”
기분이 불쾌하시다는 얘긴가?
시녀들이 어색하게 웃었지만, 타티아나는 정말로 편안한 얼굴이었다.
뮐러 가 하녀들은 말했었다. 비를 그냥 기사처럼 생각하라고.
하지만 시녀들의 눈에 타티아나는 기사가 아니라, 그냥 곡예단에서 나온 사람 같았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타티아나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물구나무를 선 채로 오늘은 어떤 루틴으로 가 볼까, 한가하게 궁리하던 그녀는 곧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맨손 운동에는 역시 팔굽혀펴기가 빠질 수 없었다.
‘내 작고 소중한…… 삼두근을 위해.’
타티아나는 다리를 훌쩍 내려 바닥을 디뎠고 그대로 다음 코스에 돌입했다.
시녀들 중에도 물구나무를 설 줄 아는 사람은 있었다. 팔굽혀펴기 몇 개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자세는 교본에나 나올 것처럼 정확했다.
딱히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다.
‘보기보다…… 힘이 엄청 좋으시구나.’
시녀들은 감탄 반, 얼떨떨함 반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의문에 빠지고 말았다.
멀뚱멀뚱 지켜보는 것 말고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개수라도 세어 드려야 하나?
왕자비가 원한다면 꽃술이라도 흔들며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왠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그런 시녀들을 곁눈질하며 피식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타티아나는 누가 보는 앞에서 검을 잡거나 운동하는 걸 안 좋아했다.
구경거리가 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야 당연히 없을 테지만, 그녀도 위인이나 다름없는 부모님의 딸로 자라면서 아픈 구석이 한두 개쯤은 생겨서.
너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며 팔짱을 낀다든지 그럼 그렇지, 하는 식의 평가를 받는 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타티아나와 시녀들은 지금 며칠간의 탐색전 끝에 대면식이란 걸 하는 중이었다.
이 독특한 상견례는 뮐러 가 하녀들도 다 거친 과정이었으며, 그들은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에게 조금쯤은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너무 솔직한 나머지 타티아나를 은근슬쩍 피해 다니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상관없었다.
그럼 앞으로 아무런 방해 없이 조용히 운동하는 거지, 뭐.
타티아나는 시녀들에게 물었다.
“같이 할래?”
“……예?”
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들은 몹시 사양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손바닥을 땅에 짚은 채로 시녀들의 면면을 유심히 훑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열외로 친 건 수석 시녀 이자벨이었다.
발터에는 경로 우대라는 미풍양속이 있으니까.
타티아나도 노약자를 상대로는 검을 들지 말자는 주의였다.
이자벨을 제외하고 나니 남은 사람들은 연령도 체격도 다 비슷해 보였다.
타티아나는 그중 가장 앞 열에 서 있는 시녀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이래서 학교 다닐 때도 앞줄에는 안 앉는 거다.
“있지…….”
“저 말씀이십니까?”
“응, 내 등에 잠깐만 앉아 볼래?”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던 시녀는 ‘뭐요?’라고 되물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