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장. 부부의 탄생 (9)
부부가 반드시 한 침대를 써야 한다는 법이 없듯이, 기상 시간을 분 단위까지 맞출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타티아나는 재판장에서 왕족에게 친국을 당하는 듯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나, 생각하던 타티아나는 물었다.
“혹시 서운했어요?”
“그건 아니고.”
서운하다기보단 매일 아침, 휑하니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볼 때마다 심사가 좀 꼬일 뿐이었다.
아침에 잘 잤냐는 기본적인 인사도 안 할 거면 멀쩡한 방 놔두고 내가 왜 거기까지 가서……
그래도 거기까지 가서 잤을 것 같긴 하다.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어떻게 자신에게 발각되지 않고, 매일같이 빠져나갈 수 있는지도 좀 의문이었다.
그의 궁금증을 전혀 알지 못한 채 타티아나는 피시시 웃으며 물었다.
“전하는 그 시간에 제가 뭘 했을 것 같은데요?”
“운동했겠죠, 뭐.”
“뻔히 알면서 왜 물어보시는데요.”
“비 입으로 직접 말하는 걸 듣고 싶으니까.”
“아. 그냥 가볍게 스트레칭만 했어요.”
아까 그걸 정말 ‘가벼운 스트레칭’이라고 일컬어도 되는 걸까.
이자벨과 코니는 스트레칭은 그런 곳에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드언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약간의 실랑이 끝에 식사는 순조로이 시작되는 듯했다.
사흘 전 결혼한 새신랑이 눈살을 찌푸리기 전까지는.
타티아나는 가장 먼저 건포도가 알알이 박혀 있는 호밀빵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을까?
기드언이 하도 뚫어져라, 바라보는 통에 타티아나는 식사를 하려다 말고 눈치를 살피게 됐다.
‘내가 또 무슨 잘못을……. 식전 기도라도 올렸어야 했나? 농부가 흘린 숭고한 땀에 지금이라도 감사를…….’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드언은 불쾌한 표정이었다.
이자벨과 시녀들을 차갑게 훑어보며, 저것들은 대체 뭐 하는 물건들일까? 몹시도 쓸모없는 쓰레기 보듯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타티아나가 슬금슬금 분위기를 살피며 빵을 우물거리자 그의 표정은 또 한 번 변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불쾌감이 아니라 의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비, 그거 맛있습니까?”
맛이 없어야 할 이유라도……?
만약 소태맛이 난다 해도 저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난 지금 몹시 행복해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모든 음식이 훌륭했다. 화병의 꽃마저 아름다웠다.
분위기가 삐걱거릴 뻔했지만, 신혼부부의 식사는 그렇게 다시금 재개될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불과 오늘 새벽만 해도 자신의 남편이 누굴 한없이 기다려 줄 만큼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은 아닐 거라 예상한 바 있다.
그에 대한 사교계의 평가도 그러했지만, 종종 마주치던 어린 시절에도 그는 예사 소년들과는 달리 녹록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건 당연한 걸까. 기드언은 흠잡을 데 없는 식사 매너를 가지고 있었다.
비단 식기를 우아하게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틈틈이 그녀와 눈을 맞추었으며, 짧은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그러다 건포도를 바라보며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고.
어찌 되었든 그에게서는 이 시간만큼은 아내에게 집중하겠다는 성의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가 포크를 내려놓자 기드언은 곧바로 말했다.
“더 드세요, 비.”
“아, 전 이제 끝났어요. 전하.”
“비께서 더 드시면 저도 같이 먹겠습니다.”
“네?”
“부족한 게 있으면 얘기를 하란 뜻입니다.”
그의 말이 마치 꼭 더 먹었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들려서 타티아나는 우스갯소리처럼 되물었다.
“왜요. 저 식탐 있어 보여요?”
설마 여기에 ‘네’라고 대답하는 무례한 남자가 있을까?
그런데 어떡하나. 기드언은 그런 남자였나 보다.
“비께는 모자라지 않나요?”
“…….”
방 안에는 갑자기 탄식 소리가 내려앉았다.
타티아나가 내쉰 게 아니니, 그녀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누군가가 대신 쉬어 주었을 것이다.
‘그치? 이거 나 많이 먹게 생겼다는 거지?’
타티아나는 실제로 잘 먹는 편이었다. 호리호리하고 날렵한 체형이었지만, 운동량이 남다르니 대사량 또한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잘 먹는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이었다. 건강하다는 뜻이니까.
그런데도 타티아나가 지금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건, 그녀 또한 귀족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닌 이상, 남의 집에선 음식을 추가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건 굶주렸고 가난하다는 뜻이니까.
타티아나는 발터의 귀족 여성들이라면 상당수가 저 말을 뾰로통하게 받아들일 거라는 쪽에 자신의 오른쪽 손모가지를 걸 수 있었다.
그래도 못 믿겠다면 삭발 내기도 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가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기드언은 그 반응을 즐거이 감상했다.
그리고 다행히 농담이었는지 뒤늦게 자신의 발언을 해명하려 했다.
“한참 예전에 블룸 경이 말입니다.”
“……우리 아빠가 왜요.”
“타냐의 식대를 감당하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내 앞에서 한숨을 쉰 적이 있습니다.”
“…….”
“사설 수업을 할까도 고민하는 눈치였습니다. 뭐, 농담이었겠죠.”
뭐라고 얘기하나 들어나 보자, 벼르고 있던 타티아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아니, 우리 아빠는 왕자한테 검술을 가르치러 갔으면 검술만 가르칠 것이지, 왜 쓸데없이 딸 얘기를 하고 있었을까?
그래도 둘이 저런 사담을 주고받은 걸 보니 가까운 사이이긴 했나 보다.
멋쩍어하던 타티아나는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건 성장기 때 잠깐 그런 거죠. 어릴 땐 많이 먹으면…… 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물론 타티아나는 그 당시에도 체격은 상당 부분 타고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루하루가 다른 또래 소년들의 발육을 지켜볼 때마다 그녀는 초조했고, 마음이 조급했다.
그래서 한때는 정말로 토하기 직전까지 미련하게 먹었던 적도 있다. 체한 적도 두어 번 있다.
그때 타티아나의 부모는 한숨을 쉬며 그녀 앞에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대체 누굴 닮아서 이런 무식한 짓을…….’
‘여보, 이건 기사들이라면 어린 나이에 다 한 번씩은 해 보는 짓이야. 별일 아니라니까.’
‘발터에 아직도 그런 무식한 집단이…….’
‘내가 거기 부대장이야, 여보.’
‘자랑이야?’
어머니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곤 했지만, 결과적으로 어머니보다 훨씬 길쭉길쭉 자랐으니 이 정도면 추억이려니 하고 넘어가도 되는 거 아닐까?
물론 블룸 경만큼은 크지 못했지만, 그건 원래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되는 거다.
아마 성별을 바꿔 태어났어도 그 체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과 마주 앉아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타티아나는 갑자기 궁금한 게 생기고 말았다.
이 사고 흐름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들은 지난 3년간 교류가 없었기에 어릴 때 얘기 말고는 다른 공감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전하.”
“네.”
“혹시요. 저 처음 만난 날 기억하세요?”
지금 나, 너무 사연 있고 질척거리는 여자 같지 않았나.
타티아나는 본인이 말해 놓고 좀 소름 돋는다는 표정이었는데 기드언은 곧바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날은 상호 간에 상당히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찝찝한 기분 또한 오래도록 간직해 왔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의 첫 만남을 굳이 헤집고야 말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보신 거 맞죠.”
“아마도?”
“그때 저 보고 뭐라고 생각하셨어요?”
“솔직하게?”
“네, 솔직하게.”
그러자 기드언은 날렵한 턱선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과거를 회상하던 그는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
“난 그때 비가…….”
“네.”
“힘이 장사구나, 했습니다.”
“…….”
“소녀 장사?”
“…….”
요정이나 천사 같은 표현은 그녀도 기대 안 했다.
코를 찔찔 흘리며 추하게 울다가 갑자기 벙싯벙싯 웃으며 칼춤을 춰 댔으니 좋은 소리가 나오는 게 더 이상했다.
누가 보면 뭐에 씐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첫인상이 ‘힘이 장사’라니.
이건 시작부터 잘못된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기드언은 더 정확한 표현을 찾고 싶다는 듯 ‘꼬마 장사? 아기 장사?’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금 저한테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하세요?”
“뭐가 말입니까.”
“……우리가 과연 이러고도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솔직하게 말하라면서.”
“…….”
“그땐 비도 볼에 젖살이 토실토실할 때라 아기 장사 같았습니다.”
“……아, 토실토실.”
타티아나는 그의 말을 떨떠름하게 되뇌었다.
하지만 말이라는 건 원래 어디에 무게중심을 두느냐가 중요하다.
기드언은 지금 ‘소녀 장사’에서 ‘소녀’, ‘꼬마’, ‘아기’ 등등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처음엔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었는데, 실은 너 그때 좀 귀여웠다? 이런 의도였다.
타티아나가 망했다는 듯 체념의 한숨을 내쉬고, 기드언이 피식피식 웃는 사이였다.
두 사람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입가심용 차가 준비됐다.
타티아나는 샐쭉해하던 표정을 지우며 아기자기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찬찬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기드언은 혼인을 하며, 왕자궁 안에 있는 공간을 반으로 뚝 잘라 그녀에게 배정해 주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왕자궁은 딱히 구경할 재미랄 게 없는 곳이었다.
타티아나의 침실만큼은 시녀들의 입김이 닿았는지 제법 공들여 꾸민 티가 났으나, 그 외의 장소는 대체로 무미건조했다.
예식 날, 역사에 길이 남을 외모와 화려한 옷차림으로 등장해 이 사람이 꾸미는 쪽에도 관심이 있었나? 싶었는데 생활공간을 보고 있자면 그게 아닌 것 같다.
허공을 차례차례 배회하던 타티아나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벽면에 안착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의외로 그녀의 시선을 오랜 시간 잡아끄는 물건이 있었다.
장식품처럼 진열된 검이었다.
‘명검이네.’
그걸 어떻게 사용해 보지도 않고 바로 아느냐, 누군가가 묻는다면 타티아나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검술가란 인간들이 원래 그렇다고.
사람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저 정도는 한쪽 눈만 뜨고 봐도 아는 것이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공간을 장식하는 취미는 없어도 좋은 검을 수집하는 취미는 있었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제련공이 쏟아부은 고민과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검이었다.
저렇게 장식품이 되어 먼지나 켜켜이 쌓아 올리는 신세가 되기엔 아까웠다.
물론 식당에 먼지 따위는 없었지만.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시선이 특정 장소에 고정되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왜요, 비. 뭐 관심 가는 거라도 있습니까.”
“너무 좋은 칼이라서요.”
“그럼 한번 써 보셔도 됩니다.”
“…….”
“맘에 들면 가지셔도 되고요.”
진짜? 저거 하나면 영지 몇 개 정도는 가뿐히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걸 날 준다고?
물론 기드언은 그 정도 돈이 아쉬울 리 없는 왕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이 뜻밖이라서 타티아나는 입술을 몇 번이나 우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건 고작 모기나 파리 잡는 데 쓰기에는 너무나 과분한 검이었다.
지금 들어 봐야 그녀에게는 무겁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질 테지.
사실 조금은 부끄러울 것도 같다.
그녀의 검술은 어느 순간 정체되고 말았으니.
타티아나는 복잡한 속내를 감춘 채 설핏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지금 저한테는…… 좀 과한 물건인 것 같아요.”
“……아아, 그래요.”
기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를 것 없는 호응어를 내뱉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아, 그래요’ 말하는 그의 어조가 위에서 아래로 순식간에 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주변 공기가 묘하게 싸늘해지고 있었다.
마치 뾰족한 바늘이 생살을 찌르는 것 같기도 했다.
이 기운은 쓰는 이가 어떻게, 어느 정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주변인들에게 압박감과 위압감을 줄 수 있다.
이걸 통상적으로 뭐라고 부르냐 하면…….
‘아니, 밥 잘 먹어 놓고 왜 갑자기 살기를 흘려?’
내가 또 그새 무슨 잘못을…….
결혼 생활의 위기는 밥을 먹다가도, 고작 차를 마시는 중에도 찾아올 수 있다는 걸 왜 아무도 그녀에게 알려 주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