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장. 부부의 탄생 (10)
타티아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깜빡깜빡했다.
그의 기는 블룸 경의 수제자답게 시리고 깨끗해서 그녀는 이 와중에도 그것에 감탄했다.
그러나 이건 그리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기드언은 ‘아, 지금 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네?’ 정도의 강도로 어깨 한 번 슬쩍 털어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일반인들도 이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냐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자리에 어린아이가 있었더라면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을 게 분명했고, 바지에 오줌을 지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시선과 기가 향해 있는 곳을 따라 눈을 돌렸다.
기드언은 자신의 참모진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저것들은 대체 뭐 하는 물건들이길래 저렇게 쓸모가 없는 걸까?’ 하고.
그리고 타티아나는 그들을 잠시 훑는 것만으로도 알아챘다.
기드언의 참모진 중에는 딱 한 명의 실력자를 제외하고는 칼잡이가 아무도 없었다.
몸에 운동이라는 게 전혀 묻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브레인 출신들이 분명했다.
그걸 또 어떻게 아느냐, 하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아까와 비슷한 대답을 들려줄 수밖에 없다.
검술가들의 눈썰미라는 게 원래 다 이렇다고.
그리고 이건 어쩌면 일반인들도 쉽게 알아챌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신들, 거기서 두엇 정도는 조만간 거북목이 될 조짐이 보여요. 그러니까 책상 앞에선 똑바로 앉아야지. 그 얼굴이 아깝지도 않아?’
그런데 참 의외인 건 그들이 이 상황을 그럭저럭 버텨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낯빛들은 하나같이 좋지 못했으나, 파르르 떨거나 자리에 주저앉는 이는 없었다. 바지 위에 실례를 하는 민망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타티아나는 한참 뒤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아아, 다들 이 상황이 익숙하신 거군요?’
아니, 평소에 어땠길래 기사도 아닌 문관 출신들이 살기에 익숙해져 버렸을까?
기드언은 훈련 교관으로 나선다면 발터 전역에 위명을 떨칠 게 분명했다.
타티아나는 그들과 기드언을 좀 신기해하며 바라보았다.
그런데 기드언의 참모들은 그녀에게 뭔가를 간절히 전하고 싶은 눈빛이었다.
그녀와 문제의 명검을 번갈아 가며 힐끔거렸던 것이다.
낭패했단 얼굴로 간간이 한숨까지 쉬어 가며.
‘뭐야. 원인이 나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사실 나도 눈치챘어.’
타티아나는 어쨌든 이 상황을 매끄럽게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꼈다.
원래 결혼하고 나면 남편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 싶을 때 옆구리도 한 번씩 찔러 주고 그러는 거다.
“전하, 뭔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말로 하세요.”
“뭐를.”
기드언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 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평생 책상머리에만 붙어 앉아 살아온 사람들에게 살기를 뿌렸으면서 시치미를 떼고 싶은 모양이었다.
타티아나는 그런 기드언에게 속삭이며 알려 주었다.
“지금 상당히 무서운 사람처럼 보이세요.”
기드언은 ‘그럴 리가’ 하며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증스러운 연기였지만 픽, 흘러나오는 미소만큼은 감추지 않았다.
방 안을 짓누르던 본인의 기 또한 말끔히 거두어들였고.
호흡곤란을 겪던 보좌진들의 낯빛은 한결 편안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따금씩 검과 타티아나를 힐끔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타티아나도 예리하게 제련된 검을 바라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걸 받았어야 한다는 뜻인 거지?’
이제라도 다시 말을 꺼내 볼까 싶었지만 기드언은 이미 끝난 사안이라는 건지,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건지 차만 홀짝였다.
타티아나에게 ‘뭐해? 안 마시고.’ 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얼른 찻잔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남편 비위를 맞추기가 상당히 어렵구나, 생각하며 한쪽 볼을 뚱하게 부풀릴 뿐이었다.
오늘의 유일한 일정을 끝마친 신입 왕자비는 한가해졌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 별것도 아닌 일정을 자신이 제대로 소화한 건지 의문스러웠다. 살짝 찝찝했던 거다.
그녀는 무리 중에 수석 시녀를 콕 집어 손짓했다.
무슨 일이 생겼다 싶을 때 책임자와 얘기하며 해결을 보고 싶은 건 누구나 같은 마음인가 보다.
타티아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이자벨에게 물었다.
“있잖아. 나 오늘 식사하면서 혹시 뭐 실수했니?”
“예?”
아니, 내 남편이 말이야. 아무래도 감정 기복이 좀 있는 것 같아.
어릴 땐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
“제가 감히 생각하기엔…….”
“응.”
“실수라고 이를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흔쾌히 검을 받아 주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기드언도 넌지시 물었을 뿐 강권한 건 아니었다.
에둘러 사양하는 타티아나의 태도도 밉지 않았고.
그렇지만 왕자비가 계속 개운치 못한 기색이었기에 이자벨의 마음은 덩달아 침중해졌다.
수석 시녀 이자벨 녹스.
그녀는 자신의 진짜 주인인 스칼렛 공주가 젖먹이였던 시절부터 성에서 일해 왔다.
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기드언과 타티아나의 나이보다도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이자벨도 1왕자의 속내만큼은 정확히 들여다보기 어려웠다.
왕족들은 본래 너나 할 것 없이 뿌리 깊은 인간 불신을 갖고 있다.
기드언은 그중에서도 정도가 좀 심한 편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나 곁에 안 두는 걸로 유명했으니까.
그런데 1왕자의 보좌진도 아닌 그녀가 그의 흉중을 다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이자벨로서는 그 기드언이 단순히 김이 새 버려서 저런다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것도 ‘타티아나가 새벽에 몰래 침대를 빠져나갔다든지’, ‘선물을 보고도 심드렁하게 반응했다든지’와 같은 사소한 이유로 말이다.
고작 그런 일로 심술을 부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란 더 어려웠다.
계속 찝찝한 기분에 빠져 있던 타티아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이내 털어 버리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시녀들 쪽을 바라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챙길 건 좀 챙겨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 어디서 단검 한 자루만 구할 수 있니.”
뮐러 부인과 실랑이를 하는 게 싫어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지만, 호신 물품 하나 정도는 곁에 두는 편이 좋았다.
기드언이 주려던 보검 같은 건 필요 없었으나, 모기를 때려잡을 막대기 정도는 있어야 했다.
여름은 매년 돌아오니까.
그러나 새 신부가 너무 살벌한 것을 찾자 시녀들은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살폈다.
타티아나는 그 반응을 보며 별일이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너희도 다 하나씩 갖고 있을 거 아니야.”
시녀들도 성에 들어올 땐 호신술을 몸에 익힌다.
타티아나가 알기론 기초 체력 테스트도 거친다.
당연히 호신용 단검쯤은 다들 소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검은 대체로 자결 용도로 쓰이곤 했다. 수치스러운 상황을 피하거나, 유사시 고문을 못 견디고 비밀이 새어 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죽음으로써 본인의 입을 막는 것이다.
타티아나가 ‘일단 꺼내 놔 봐’ 하는 눈으로 지그시 그들을 바라보자, 시녀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품에 지닌 단검을 하나둘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던 타티아나의 표정은 시시각각 아주 다채롭게 변했다.
의아해서 갸우뚱하다가, 기가 막혀서 웃다가, 최종적으로는 시녀들을 딱하게 보기까지 했다.
‘장신구야? 아까 그 검을 보고도 느낀 바가 없어? 이걸 한 번이라도 써 보긴 했냐고. 잘 안 썰렸을 텐데?’
성이 그간 몹시 평화로웠나 보네.
타티아나의 기준에 이것들은 검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호신용도, 자결용도 아니었고 그냥 예쁜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자개가 울퉁불퉁 박힌 손잡이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리자, 시녀들 중 하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불과 몇 시간 전, 타티아나의 등을 깔고 앉았던 코니였다.
“노여워 마시어요, 비전하. 이건 다 비전하를 지키기 위한 목적이랍니다.”
“아니, 누가 누굴 지키……. 허이고.”
난 못 들었다.
타티아나는 뒤늦게 모르는 체하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 엉덩방아를 찧던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코니는 낙법도 할 줄 몰랐다.
타티아나는 ‘낙법이라는 것은 말이다’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내일 아침까지 강론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다. 이들은 그런 데에 아무 관심이 없으니까.
계속 헛웃음만 짓던 타티아나는 이제 좀 슬퍼지기까지 하려 했다.
그녀는 아까 전 기드언의 날카로운 기를 정면으로 받아 내는 참모진들을 보며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래도 기드언의 무리 중에는 실력자가 적어도 한 명은 있었는데, 이곳은 전멸이 아닌가.
그러니 진짜 불쌍한 건 시녀들이었다.
아니? 유사시 얘네들의 목숨까지 건사해야 할 그녀 자신이었다.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난 앞으로 어째야 하나, 고민하던 타티아나는 그냥 다 관두기로 했다.
검술과 호신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달라, 한두 마디로 소통이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 생각했던 대로 아무 검이나 한 자루 구해 오기로 했다.
성에는 그러기에 꽤 적합한 장소가 하나 있다.
사실 타티아나는 성안의 지리라고는 그곳밖에 몰랐다.
“우선 병영으로 가자.”
그러나 타티아나의 말이 떨어지자 시녀들의 얼굴에는 일제히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자벨이 그들을 대표하여 이유를 설명했다.
“비전하, 기사들의 수련장은 사전 허가를 받아야만 방문할 수 있습니다. 전술이나 군사비밀이 오가는 곳인지라…….”
“그렇지. 근데 난 아닌데.”
“…….”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잘 모르나?”
다른 이들은 쉬이 오갈 수 없는 곳이라지만, 타티아나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그곳에 갈 수 있다.
지금은 와병 중인 국왕이 직접 허가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