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1)화 (12/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장. 부부의 탄생 (11)

* * *

때는 타티아나가 13살 무렵이었을 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그 당시 대답 없는 마력석 때문에 침울해하곤 했다.

기드언이 훌쩍이는 그녀를 목도한 건 우연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타티아나는 그 무렵, 꽤 자주 울었으니까. 혼자서, 몰래.

이렇게 말하면 울보 같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고, 그녀는 그 나이 때 처음으로 현실의 벽과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걸 배우는 중이었을 뿐이다.

시무룩한 딸을 위해 아버지, 블룸 경은 어떤 일을 벌였을까?

평범한 아버지들이라면 선물이나 사탕을 몇 개 사다 안기고 말았을 테지.

하지만 그는 발터에서 가장 강한 남자였다.

때마침 열렸던 왕실 주관 무투 대회.

블룸 경은 전년에도, 그 이전 해에도 우승을 차지한 실력자였다.

당해에도 여전히 유력한 우승 후보로 점쳐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 무슨 난감한 상황일까?

블룸 경이 그날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그의 상관인 뮐러 경이었다.

블룸 경은 그저 좀 난처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지만, 그때는 그도 알지 못했으리라. 자신의 대장이 몇 년 후에 다가올 미래에 딸의 양부가 되리라고는.

일반 대중들은 그날의 경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몹시도 치열하고 흥미진진한 싸움이었노라고.

하지만 예리한 기사들에게도, 어린 타티아나의 눈에도 보였다.

실력 차이는 압도적이었고, 그 경기는 블룸 경의 일방적인 우위였다.

그는 상관의 체면을 최대한 지켜 준 것뿐이었다.

마침내 우승을 거머쥔 블룸 경이 국왕 앞의 연단으로 향하자, 모두의 시선은 그의 입으로 모였다.

대중들은 궁금했기 때문이다.

‘블룸 경이 포상으로 뭘 요구할까.’

출신 탓에 백작에 머물러 있으니 더 높은 작위를 청할 것이다, 왕실 친위대장을 꺾었으니 그 자리를 넘볼 것이다.

아니지, 이 사람들아.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지.

아주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의견들이 오갔으나 발터에서 가장 강한 남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청을 국왕에게 올렸다.

‘폐하, 제 딸, 타티아나 블룸이 기사들의 연무장에 출입하는 것을 허가해 주십시오. 제 어미가 싸 준 도시락을 매일같이 아비에게 전해 주고 싶어 합니다. 부디 그 어린 마음을 귀엽게 보아주십시오.’

돔 안의 관중들은 술렁였다. 너무 소박한 청에 다들 얼이 빠져서.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안 그래도 높았던 전쟁 영웅의 인기는 그 순간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고야 말았다.

평민 출신 백작이 유서 깊은 공작 가문을 꺾었다. 친위대 부대장이 상관을 검으로 이겼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큰 사건이었는데, 그 강인하고 유능한 남자는 심지어 가정적이기까지 했다.

그런 남자는 원래 시대를 불문하고 모두의 질시와 부러움을 사는 법이었다.

하지만 가장 좋은 좌석에 앉아 그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고 있던 타티아나와 그녀의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저건 일종의 핑계이자 음, 개소리였다.

타티아나의 어머니는 눈을 홉뜨며 싸늘하게 중얼거렸으니까.

‘나보고…… 도시락을 싸라고? 매일……?’

당연한 말이지만, 집안의 멀쩡한 하녀들을 놔두고 백작 부인이 남편의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마탑의 중요한 자원으로 길러진 타티아나의 어머니는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본인 손에 물도 잘 안 묻히는 사람이었다.

블룸 경은 그날, 그냥 딸을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매일 아침 마력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던 아이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거다.

너는 좋아하는 게 하나 더 있지 않냐고.

저택에 찾아오는 기사들을 훔쳐보던 딸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길을 하나 더 열어 주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이제는 시간이 흐를 만큼 흐른 모양이지.

한때는 나라 전체를 떠들썩하게 할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는데, 성 돌아가는 사정에 빠삭한 수석 시녀마저 기억을 더듬더듬하고 있는 걸 보면.

몇 년 만에 병영을 구경하는 타티아나의 감상 또한 비슷했다.

낯선 얼굴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혹시 그간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는 없을까. 내가 모르는 검술을 구사하는 이는 없나.

타티아나는 마치 비밀을 캐내려는 스파이처럼 실눈을 뜨다가 이내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이야, 샘슨 아저씨.”

타티아나는 어마어마한 덩치의 중년 남자에게 속삭이며 인사했다.

어릴 때 말투 그대로.

그러나 그녀는 어느덧 훌쩍 자라 숙녀가 된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왕자비의 신분이었다.

그런 타티아나가 부담스러웠는지 남자는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자세로 우렁차게 외쳤다.

“왕실 친위대, 사무엘 샘슨! 비전하를 뵙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거리감이 훅 느껴지네.”

사무엘 샘슨은 죽은 블룸 경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왕실 친위대 현 부대장이자 기사들의 검술 교관이었으며, 한때는 블룸 가에 가장 많이 찾아온 기사이기도 했다.

옛날이야기이긴 했으나 타티아나가 코흘리개일 때부터 두 사람의 친분이 두터웠다는 뜻이다.

타티아나는 샘슨에게 속삭였다.

“아저씨, 둘이 있을 땐 그냥 원래대로 해요. 사석인데 뭐 어때.”

“…….”

“불똥 안 튀게 할게.”

“……그 말 책임지실 수 있으십니까.”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시집을 왔더니 너무 외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고 해명하면 다들 이해해 주지 않을까.

결혼을 하고 나니 오히려 더 외롭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꽤 있잖아.

타티아나가 그 이유를 알기란 아직 어려웠지만.

왕자비가 직접 괜찮다는 뜻을 내비쳤음에도 샘슨 경은 시녀들의 눈치를 봤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이 난감한 상황을 그대로 남에게 떠넘기려 들었다.

“대장님 불러 줘? 여긴 갑자기 왜 왔는데?”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관사에서 서류 업무를 보고 있을 양아버지를 불러 한가하게 잡담이나 늘어놓을 순 없었다.

뮐러 경은 그리 살가운 성격이 아닌지라, 미주알고주알 주고받을 얘기도 없었고.

“아버님은 됐고. ……나 칼이나 한 자루 줘 봐요. 견습 기사들 쓰는 거 있잖아. 너무 무식하게 큰 것만 아니면 돼요.”

“칼? 성에 오면서 그런 것도 안 가져왔어?”

샘슨 경은 타티아나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목검을 갖고 놀았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그 목검에 맞아 쓰러지는 척하면 으스대는 꼬마가 눈물 나게 귀여웠는데…….

이젠 가볍게 맨손으로 가격당해도 정말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난다. 세월이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죄 쓸데없는 드레스랑 보석만…….”

아, 쓸데없다고 말하면 안 되지.

이건 뮐러 부인이 보여 준 성의였다.

친부모가 없는 타티아나가 시집가서 무시를 당할까 봐 그녀는 무기만 빼고 이것저것 많이도 챙겨 주었다.

물론 거기엔 공작가의 체면을 지키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겠으나, 그래도 감사한 건 감사한 거였다.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내가 시집을 좀 급하게 왔거든.”

“그러게. 대체 뭐가 그렇게 급했냐.”

1왕자의 급작스러운 청혼에 기함했던 건 왕실 친위대원들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었다. 더구나 그들 상당수는 타티아나를 꼭 친척 아저씨와 같은 심정으로 보고 있었다.

당연히 이 결혼을 우려하는 마음 또한 컸다.

“결혼 생활은 좀 어때? 지낼 만해?”

“으음.”

만약 타티아나가 이 질문을 적어도 반년 동안은 받아야 한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밥 먹었어?’란 인사말을 위협할 정도로 자주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녀는 지금보단 훨씬 성의 없는 태도로 흘려들었을 텐데.

타티아나는 쓸데없이 고심하며 생각에 잠겼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못 지낼 건 또 뭐야. 아직 며칠밖에 안 돼서 잘 몰라요.”

“하긴 그렇겠지 뭐.”

미소를 지어 보인 타티아나는 샘슨 경이 견습 기사에게 검을 한 자루 가져오라고 지시하는 사이, 그의 모습을 천천히 감상했다.

항상 아빠가 서 있던 자리. 똑같은 제복.

직급을 알려 주는 배지와 검술 교관만 착용할 수 있는 견장.

아빠의 가슴팍에도 저런 훈장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이 모든 광경이 타티아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했다.

그런데 사람을 너무 위아래로 훑어본 건가?

샘슨 경은 뭔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불편한 기색으로 배를 어루만졌다.

요즘 나잇살이 찌는 것인지, 자꾸만 불어나는 허리둘레가 영 신경 쓰여서.

“인덕이야, 타티아나.”

“……누가 뭐래?”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하지만 타티아나의 눈에는 몇 년 전에 비해 딱히 변한 것도 없어 보였다.

샘슨 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냥 맷집이 좋은 근육 돼지일 뿐이었다.

그리고 기사들 사이에서 저런 체격은 자랑거리였다.

저런 몸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타티아나는 좀 아니꼬워하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인덕? 발터 기사단에는 나 모르는 족보가 있나 봐. 왜 아저씨들의 그 멘트는 세대가 교체돼도 바뀌질 않아요? 선후배 간에 전수 받아요?”

도무지 발전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녀들은 타티아나의 말에 동의하며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그 평화로운 순간, 시녀들 중 누군가는 갑자기 ‘꺄—아악!’ 하며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만약 이곳이 평범한 장소였다면 사람들은 허둥지둥 헤매거나 당황했을 테지.

일시적인 혼란이 빚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발터 최고의 기사들이 모여 있는 수련장이었다.

기사들의 눈빛은 순식간에 살벌하게 돌변했다.

비명을 지른 시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이는 타티아나였다.

그녀는 기사들과 비슷한 눈빛을 한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샘슨 경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옆에 있는 시녀들이 인지할 수 없는 발검 속도였다.

그런데 검을 쥔 채 비장하게 시녀를 돌아본 순간, 타티아나는 몹시도 허무해지고 말았다.

몸을 움츠리고 있는 시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손바닥만 한 나방 한 마리가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이거야? 크긴 크다만…….’

타티아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으나 꾹 참았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하며 기합 소리도 내뱉었다.

원래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으라랏……!”

뭐지, 저 이상한 기합 소리는……?

깜짝 놀랐던 것도 뒤로한 채 시녀들은 타티아나를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사이, 나방을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암사자는 검을 두 번이나 휘둘렀다.

아주 깨끗한 궤적이었다.

타티아나는 마무리 동작으로 샘슨 경의 허리춤에 검을 착, 꽂아 넣으며 시녀들을 핀잔했다.

“아무 때나 소리 지르지 마. 마음은 알겠는데, 이러면 진짜 위기 상황이랑 구분이 안 돼.”

샘슨 경도 심장 대신 배를 어루만지며 말을 보탰다.

“아오, 놀라라.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인덕이라며.”

샘슨 경은 할 말이 없었는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큰 덩치로 풀밭에 쭈그리고 앉아 암사자가 사냥한 결과물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성인 손바닥만 했던 갈색 나방은 정확히 세 동강이 나 있었고, 샘슨은 오오, 하며 턱을 매만졌다.

“머리, 가슴, 배……. 자로 잰 것 같네.”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곤충은 머리, 가슴, 배지. 해부학적 관점에서 볼 땐 이렇게 써는 게 맞아.”

그들은 싱거운 농담을 주고받았으나 애들이 들었다면 울음을 터뜨려도 이상하지 않을 소리였다.

다행히도 이 자리에 어린아이는 없었다.

대신 나방 한 마리에도 비명을 지를 만큼 비위가 약하고 섬세한 시녀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더듬더듬하며 말했다.

“허우, 너, 너무 잔인…….”

사이좋게 풀밭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타티아나와 샘슨 경은 그 말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설마 이런 일로 비난을 받을 줄 몰랐다는 듯.

그들은 새하얗게 질린 시녀를 바라보며 억울해하다가 서로에게 속삭였다.

“뭐래?”

“몰라. 진짜 뭐라는 거야?”

이럴 거면 소리는 왜 지르는 걸까? 도와 달라는 거 아니었어?

그래서 징그럽다는 거야, 불쌍하다는 거야. 잡아 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두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다가 성의 없이 귓가를 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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