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2)화 (13/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장. 부부의 탄생 (12)

* * *

기드언 왕자는 적갈색 책상 앞에 앉아 북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마물의 생태와 활동 반경에 관한 내용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군.’

그의 주위에는 냉랭한 기운이 맴돌았다.

원래도 따사로운 기운을 풍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좀 심했다.

읽고 있는 보고서의 심각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침 일찍부터 왕자궁을 방문해 그를 방해하고 있는 동복누이, 스칼렛 공주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남동생을 잘 약 올릴 수 있을까, 밤새도록 궁리해 온 스칼렛 공주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남동생을 보러 온 것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한 치장이 그녀의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전하, 우리 왕자비께서는 검을 보는 안목이 남다르신가 봅니다. 블룸 가 출신이라 그런 걸까요?”

타티아나가 세상에 둘도 없을 명검을 완곡히 사양하고, 어디 가서 남이 쓰던 개뼈다귀 같은 칼자루를 집어 왔다는 건 기드언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한쪽 입술만 슬쩍 말아 올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으리란 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기드언의 참모진들은 이 정도로 조용조용 넘어가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참이었다.

문제는 공주가 이걸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는 것이다.

답은 간단했다.

타티아나의 수석 시녀가 스칼렛 공주의 사람이니까.

스칼렛은 참 고소하다는 듯 ‘너 선물 까였다며?’ 킥킥거리고 있었고, 기드언은 결국 그런 누이가 거슬렸는지 서류를 조용히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내 비가 성에 익숙해지면, 일단 비의 시녀들부터 갈아치워야겠습니다, 누이.”

그때가 되면 네 수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모가지란 뜻이었다.

실제로 행하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칼렛은 표정을 싹 바꾸며 눈을 치켜떴다.

예의를 차리는 건 이쯤에서 끝이라는 듯 반말도 튀어나왔다.

“네가 내어 달라고 했잖아! 볼일 다 봤다 이거야?”

기드언은 코웃음도 안 쳤다.

그는 최근 들어 누이가 모처럼 신나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치 본인이 결혼을 하는 것처럼 들떠 있을 정도였다.

스칼렛은 아끼는 시녀들을 본인이 나서서 직접 추렸고, 그 까닭은 기드언을 돕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동생 부부의 사생활이 궁금해서였다.

자신의 항변이 씨알도 먹히지 않자, 스칼렛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듯 보였다.

그녀는 타깃을 기드언에서 타티아나로 변경했다.

“네 아내는 언제 제대로 소개해 줄 거야?”

“인사했잖습니까.”

“난 올케랑 더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

“둘이 나눌 얘기란 게 있긴 합니까?”

“……말하다 보면 생기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네 비는 칼 말고 뭘 좋아하니?”

내가 막 다 사 줄 수 있는데.

스칼렛은 뭐든 말만 하라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고, 기드언은 드디어 누이에게 제대로 된 반응이라는 것을 돌려주었다.

코웃음 정도는 쳐 준 것이다.

“이제 와서 오붓하게 가족 놀이가 하고 싶어진 거라면 집어치워요. 내색은 안 할 테지만, 비는 자길 성가시게 하는 사람 싫어합니다. 누이랑 관심사도 다르고요.”

기드언의 말이 매정하게 들렸던 스칼렛은 너도 참 너무한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 본격적으로 성가시게 한 적도 없는데 벌써부터 타박이라니.

“네 아내는 네가 이런 남자인 걸 다 알고도 결혼한 거니?”

그러자 기드언은 비스듬히 턱을 괸 채로 천천히 미소 지었다.

보는 이들의 시야가 환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답변은 경고였다.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비 앞에선 그 입 꼭 닥쳐요.”

“…….”

“누이를 모셔라. 이른 시간이라 피곤하신가 보군. 여기 와서 잠꼬대를 하는 걸 보니.”

기드언은 명을 내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누이를 배웅했다. 손수 등까지 떠밀어 가며.

스칼렛은 속절없이 복도까지 밀려 나갔는데, 기드언은 문가를 한 손으로 짚으며 갑자기 눈썹을 찌푸렸다.

“누이, 내 방에 올 때는 그 향수 좀 어떻게 할 수 없습니까?”

“왜? 별로야? 바다 건너 온 건데.”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누이가 왔다 갈 때마다 머리가 아픕니다.”

이게 향수 때문인지 시끄러워서인지 기드언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스칼렛은 처음에는 으음, 그래? 하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해 보니 분했는지 주먹을 말아 쥐고 펄쩍 뛰었다.

“근데 왜 네가 지적질이니?! 내 남편도 아무 말 안 하는데!”

기드언은 ‘그럼 가서 네 남편이랑 놀든가. 왜 아침부터 남 일하는 데 와서 이래?’ 심드렁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네 비는 향수도 안 뿌려?”

“글쎄요. 그것까진 아직 잘 모르겠네요.”

확실치는 않지만 선호하진 않을 것 같다.

본인의 체향과 흔적을 보란 듯이 남기고 다니는 기사는 없으니까.

그런 기사는 애초에 자격 미달이었다.

게다가 타티아나는 운동하는 걸 좋아해서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찬물로 몸을 헹궈 내는 모양이었다.

기드언은 그 바지런함이 꽤 귀여웠다.

땀 냄새가 날까 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지. 그것 좀 나면 어때서. 만약에 그렇다 할지라도…….

“어쨌든 내 비에게서는 좋은 냄새만 납니다.”

누이를 대하는 것과는 지극히 다른 온도에 스칼렛은 별꼴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얘 좀 봐. 결혼하고 더 재수 없어졌어.”

“그런가요. 한데 누이도 매부랑 결혼한다고 난리칠 땐 참 가관이었어요.”

기드언은 싱긋 웃으며 스칼렛의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방 안이 다시 고요해지자 남은 사람들은 시선만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저렇게 서로의 신경을 살살 긁고 할퀴는 듯 보여도 왕자와 공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왕족들치고는 돈독한 축에 속했다.

그들은 그저…… 남매였을 뿐이다.

서로를 향했을 때만큼은 전투력이 더욱 강해지는 보통의 흔한 남매 말이다.

기드언과의 아침 식사는 어느덧 타티아나에게 하루 일과로 자리 잡았다.

그가 매일 아침 10분, 20분씩 먼저 와서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타티아나는 서둘렀다.

그 덕에 오늘은 복도를 걷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을 붙잡을 수 있었다.

기드언은 그녀를 예상 밖의 장소에서 마주쳤음에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대신 잠시간 생각하더니 팔꿈치를 구부려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끼라는 소리였다.

타티아나는 핏, 웃고는 그의 팔뚝에 슬그머니 손을 얹었고, 기드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흐뭇했다. 오늘 아침 식사는 뭔가 시작이 좋은 것 같아서.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식당에 들어선 타티아나는 어? 하며 눈동자를 사방으로 굴렸다.

내부가 어제와 심하게 달라져 있었다.

‘검이 새끼를 낳았나?’

쇠붙이들은 불과 하루 만에 엄청난 숫자로 증식해 있었다.

벽에 장식된 검만 얼추 수십 자루였다.

그녀가 이게 뭐냐는 듯 기드언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설명해 줄 의사가 그다지 없어 보였다.

그래서 타티아나는 그가 몰고 다니는 젊은 행정가들을 바라보며 의아함을 표시했다.

이것은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만약 이 상황에서 타티아나가 ‘내 남편이 검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구나?’ 해맑게 생각해 버린다면 이 결혼은 앞으로 상당히 암울해진다.

비단 결혼 생활에 국한되는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며 ‘이 사람, 눈치를 다 씹어 먹었구나?’ 싶은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대할 때는 반드시 전략을 바꾸어야만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원인, 과정, 맥락을 일일이 설명해서 입에 떠먹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상당히 귀찮은 일이 분명하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해야만 불필요한 감정 소모와 시간 낭비를 방지할 수 있다.

다행히 타티아나는 상황 파악이 꽤 빠른 축에 속했다.

그녀는 아버지 친구 집에서 3년이나 얹혀살았고, 원래 더부살이를 그 정도 하다 보면 없던 눈치도 생겨난다.

‘그러니까 이 검을 내가 가지면 된다는 거지?’

타티아나는 흡사 무기 공방을 연상케 하는 공간 속에서 문제의 명검을 눈짓으로 짚어 냈다.

참모진들은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눈빛 언어가 통한다! 우리 표정을 읽었어!’

기드언은 본래 모든 걸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의 참모들은 그가 상황을 짧게 축약해도 알아서 잘 받아먹어야 했다.

그걸 못한다고 해서 기드언이 크게 나무라거나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저것들은 대체 뭐 하는 물건들이길래 이렇게 쓸모가 없는 걸까’ 하는 식의 삭막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성향의 왕자를 보좌하고 있음에도 그들이 ‘전하께서 비전하께 잘 보이고 싶어 하는구나’ 느낄 수 있는 순간은 꽤 많았다.

일단 저 검부터 그러했다.

저건 그냥 명검이 아니었다.

기술자 섭외부터 설계, 제련, 가공까지. 모든 과정은 오로지 타티아나,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

왕자 측에서 비의 팔 길이를 포함한 신체 치수를 캐물었을 때 시녀들은 저것들이 왜 저러나 싶었겠지만, 속사정은 이랬다는 거다.

그뿐일까. 기드언은 평상시 본인을 치장하는 데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건 타티아나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본래 옷걸이가 출중한 사람은 간절함이란 게 부족한 법이니까.

한데 그런 기드언도 시종들이 준비한 옷을 보고는 다른 걸로 가져와 보라고 손짓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결혼식 날 입을 예복 때문이었다.

‘혼인식 땐 본인을 좀 누르시고, 신부를 최대한 돋보일 수 있게 하는 것이 보통의 관례이옵니다.’라는 조언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왕자가 누군가에게 말쑥한 남자로 보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고 놀라워서.

게다가 그 조언은 사실 불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외모는 모계 유전을 받았는지 왕자비는 상당한 미인이었으니까.

짙은 보라색 머리칼과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앙큼하고 귀여운 고양이를 떠올리게 했다.

비록 그 고양이는 검을 잡기만 하면 암사자로 화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 암사자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검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을 때였다.

기드언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난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만져 봐도 됩니다.”

“…….”

“뭐, 써 봐도 되고요.”

그러나 기드언은 이내 성미에 맞지 않았는지, 이제 와 감춰 봐야 뭐하겠냐고 느꼈는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지나치게 솔직하게.

“그냥 좀 가져요. 좋은 말로 할 때.”

살벌하게 들리는 소리였으나 타티아나는 아하하, 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와 결혼한 이래 가장 재미있어하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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