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장. 부부의 탄생 (14)
* * *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 개인 공간을 타인에게 허락해 준다는 건 꽤 큰 호의이며 호감의 표시다.
기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블룸 가에는 무수한 사내들이 드나들었지만, 부대장의 개인 연습장에 상시로 출입할 수 있는 건 타티아나와 기드언뿐이었다.
그건 일종의 특권이었다.
사람들은 블룸 경처럼 걸출한 기사를 보면 궁금해하니까.
전쟁 영웅의 수련장엔 어떤 운동 기구가 있을까. 그는 요즘 무엇에 빠져 있나.
심한 경우, 바닥에 깔아 놓은 잔디의 품종까지도 알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사실 그곳에는 별다른 게 없다.
누군가의 재능과 꾸준한 땀, 시도 때도 없이 뛰어다니는 개구리만 있었을 뿐이지.
왕자의 수련장도 유독 넓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기사가, 그것도 왕족이 자신만의 공간을 타인과 공유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타티아나가 모를 리 없었다.
사실 이 정도면 어떤 이에겐 거의 성은인 거다.
그녀는 고마움을 느꼈고, 탁 트인 풀밭에 앉아 있으려니 이제는 이상하게 편안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더해 또 하나의 선물…….
타티아나는 발치에 두었던 검을 집어 들며 해도 해도 지나치지 않는 감탄을 반복했다.
“진짜 가볍네.”
그녀가 모르는 신소재가 발터에 갑자기 등장했을 리는 없었다.
이건 순전히 제련 기술의 발달과 무기 제작자의 노고가 이루어 낸 쾌거였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그 좋은 검을 들고도 선뜻 자신의 검법을 펼쳐 보이지 못했다.
“가벼워. 가벼운데…… 무거워.”
검이 무겁다는 게 아니다. 마음과 어깨가 무겁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근 몇 년간 이런 기분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검을 등한시하며 냉전을 펼치고, 때로는 권태기가 온 것처럼 한숨을 쉰다.
만약 그녀를 검과 결혼한 여자에 빗댄다면, 이건 부부 싸움이나 별거와 다를 바 없었다.
꼭 갈라서기 직전의 위기 상황에 놓인 부부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이쯤 되니 사과해야 할 사람이 한 명 생각난다. 기드언이었다.
‘전하, 미안해요. 사실 전 초혼이 아니었어요. 생각해 보니 제가 검이랑 결혼한 적이 있었네요.’
언제부턴가 들기 버거워진 검을 바라보며, 그녀는 오늘 운동은 공쳤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기드언은 이 모든 광경을 서재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칼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는데, 건물을 등지고 앉은 타티아나는 한숨만 쉴 뿐이었다.
그 뒷모습에서 언뜻언뜻 심란한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진짜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기드언이 혼잣말을 내뱉자 사람들은 창가를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전쟁 영웅의 딸이 어떤 실력을 가졌는지 직접 보고 싶은 건 기드언의 참모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호기심이 달갑지 않았던 기드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뇌까렸다.
“내 비를 눈요깃거리로 삼지 마라.”
“저희는 그게 아니라…….”
“비는 광대가 아니야.”
“……송구합니다.”
기드언은 날카롭게 경고하며 눈매를 구겼다.
기사들의 입이 가볍네, 어떤 놈들이 헛소리를 지껄여 댈 걸 생각하니 거슬리네, 이유를 덕지덕지 갖다 붙였지만 그가 타티아나에게 본인의 수련장을 쓰라고 한 실제 이유는 조금 더 단순했다.
그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그녀를 혼자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궁금해진다.
아내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아내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 중에서 더 유치한 건 어느 쪽인지.
기드언은 창틀에 턱을 괴고는 감상을 이어 갔다.
타티아나 블룸 아인슬러.
그와 일주일 전 결혼한 여자.
어릴 때는 몇 마디 나누어 보지 못했고, 지난 몇 년간은 얼굴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드언은 자신의 아내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그는 타티아나가 건포도를 싫어한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블룸 경은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정말 아무런 맥락 없이 딸 얘기를 한 번씩 흘리곤 했으니까.
그날은 아마 함께 식사를 하던 중이었을 것이다.
‘타냐가 어릴 때 빵을 먹다가 절 죽일 듯이 노려본 적이 있습니다.’
‘…….’
‘편식을 하길래 건포도를 빵 안에 잘 숨기라고 하녀들에게 지시했거든요. 저한테 진심으로 실망했다고 하더군요. 자길 속였다고.’
‘그건…… 뭐, 경이 잘못한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고작 건포도 하나 때문에 신뢰를 잃었으니까. 나라면 앞으로 블룸 경이 주는 빵이라면 일단 의심부터 하겠습니다.’
‘전하, 저는 딸애를 독살하려던 게 아니고 그저 편식을 고쳐 주고 싶었던 겁니다. 타냐는 토라진 거고요.’
‘뭐, 경의 딸과 나는 다르니까.’
아직도 그 기억이 기드언에겐 꽤나 생생한데, 그녀는 이제 건포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모양이었다.
뮐러 가 하녀들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는 건 정말 몰랐다는 거다.
그녀는 그 외에도 바뀐 점이 많다.
어릴 적 훌쩍훌쩍 울며 슬퍼하던 소녀.
마냥 해맑고 씩씩하던 소녀는 이제 저기에 없다는 거다.
당연하지만 그녀는 조금은 어른이 됐고, 겉으론 담담해졌으며 보다 현실적인 사람이 됐다.
어떤 부분에선 기드언보다 더 염세적인 것 같기도 하다.
물어보면 곧잘 대꾸하고 유쾌하게 웃지만 언뜻언뜻 자조가 느껴진달까.
그런데 기드언은 그 변화가 생경할지언정 실망스럽지는 않다.
그는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타티아나가 지난 3년간 공작 저에 틀어박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블룸 경이 작고하고 그 마음을 잘 추슬렀는지.
한데…… 동시에 이런 의문도 든다는 거다.
내가 그 지난 시간을 굳이 들쑤셔야 할까?
그건 우리에게, 특히 너에겐 별로 좋을 게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소녀였던 너와 지금의 너를 그대로 이어 붙이면 안 되나.
‘난 너를 이 성안에 들어 앉혔잖아.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결국 이렇게 됐잖아. 사실 난 그것만으로도 요즘 상당히 만족스러워. 그러니 그냥 이대로 쭉…….’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안다.
결혼은 결과가 아니라 시작이라는 걸.
그런데 그 시작부터 뭔가를 묻어 놓겠다고?
틀림없이 언젠가는 문제가 고개를 들걸. 그때가 되면 정말로 해결이 어려울걸.
인간이 만약 어떤 존재로부터 진화했다고 가정한다면, 반드시 그 과정, 중간 종이라는 게 있었을 것이다.
그 시간을 규명하고 추적해야 현재의 너와 내가 정확하게 설명된다.
갈등 상황에 직면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지, 너는 왜 나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지 상대의 사고 회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서로에게 공백으로 남아 있는 시간들을 규명해야 했다.
잃어버린 고리, 미싱 링크. 그들의 3년.
기드언은 한동안 수심에 잠겨 있었고, 타티아나는 또 한 번 어깨를 높이 세웠다가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그 한숨을 지켜보며 기드언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선물이 진짜 잘못됐나 보네.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틀을 짚고 풀밭을 향해 뛰어내렸다.
기드언의 호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그 외 인력들은 허둥지둥거리다가 죄다 복도와 계단행이었다.
타티아나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그들은 다들 책상 앞에서만 살아온 인생들이었고, 고층에서 자신 있게 몸을 던지기엔 관절이 나약했다.
탁.
기척을 최대한 죽였음에도 이질적인 착지음은 타티아나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이네.’
타티아나는 혹시 몰라 검 손잡이를 쥐고 등 뒤를 돌아봤다가 기드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몸에서 힘을 풀었다.
이어 그녀가 그를 맞이할 요량으로 엉덩이를 들썩이자, 기드언은 그냥 있으라며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타티아나는 그에게 물었다.
“혹시 저, 구경하러 오셨어요?”
아아, 구경?
미안하지만 그건 아까 실컷 했다. 그것도 로열석에서.
내심 기대하던 칼춤은 못 봤지만, 뭐, 타티아나도 하기 싫은 날이 있을 게 아닌가.
기드언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냥 비와 같이 있으려고 왔습니다.”
혹시 싫은 건가?
하지만 싫다 해도 별수 없었다.
여긴 애초부터 기드언의 영역이라서, 앞으로 그녀가 이곳에 틀어박힌다 해도 그는 누구의 제지도 없이 오갈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그가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까진 생각지 못해서, 볼우물을 만들며 웃었다.
“아. 친해지려고 오셨구나?”
“네, 맞습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반달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람결인지, 가까운 거리 탓인지 서로의 옷자락은 수도 없이 스치며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편안한 가운데에도 심장에 묘한 조임이 느껴지는 까닭은 두 사람 다 서로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드언은 중력에 이끌리듯 타티아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눈썹을 찡그리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녀의 한쪽 어깨에서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타냐.”
“네?”
“가만히 있어요. 놀라지 말고.”
반사 신경이 남다른 아내와 살면, 벌레를 몰래 떼어 주는 매너 따윈 불가능해진다.
손만 슬쩍 올려도 타티아나가 알아챌 것이 뻔했기에 기드언은 먼저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풀벌레를 발견하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 이거요?”
난 또 뭐라고.
그녀는 손가락 하나 길이의 풀벌레를 대수롭지 않게 튕겨 내려 했다.
그러나 반질반질한 엄지와 검지 손톱은 벌레의 더듬이 앞에서 아주 약간의 틈을 남긴 채 멈추고 말았다.
기드언이 방금 전 이 벌레를 떼어 주려 했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도 어중간한 위치까지 손을 들어 올린 상태였다.
타티아나는 이런 상황에서 ‘꺅!’ 하며 소리를 지르거나 그의 뒤에 숨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습관은 거짓말을 못 하니까.
이제 와서 굳이 내숭을 떨고 싶은 생각 또한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타티아나는 그에게 너무 그악스러운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이 이미지를 어떻게 해 보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쓸쓸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이렇게 하면 제 매력이 반감되나요?”
설마 이런 걸 물어볼 줄 몰랐던 기드언은 그만 파핫,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뒤늦게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아니요, 매력이 더 올라갔습니다.”
솔직한 대답이었으나 타티아나는 그다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듣기엔 나쁘지 않았는지 입가에 계속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그녀는 풀벌레를 방사하기 전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좀 늦었지만 전에 있었던 나방 사건을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그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사실, 나 그렇게 잔인한 사람 아니라고.
“살려 줄 거야.”
“…….”
“얘는 익충이거든.”
아, 또 그런 기준이 있었던 건가?
나이 든 이자벨마저 진지하게 듣는 눈치라 타티아나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곤충학자가 아니라서 곤충에 대해선 머리, 가슴 배로 나뉜다, 정도밖에는 몰랐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궁금해지네.
세상에 완벽한 익충과 완벽한 해충이란 구분이 존재하긴 하나?
나한테는 해로워도 누군가한테는 이로울 수 있잖아.
한참 생각하던 타티아나는 또 다른 면책 사유를 내세웠다.
“사실 나, 얘랑 눈 마주쳤어.”
아, 그럼 죽이기 힘들지.
어렵게 다수의 공감대를 얻어 낸 타티아나는 눈알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풀벌레를 손등으로 어깨에서 가볍게 털어 냈다.
“잘 가. 친구들 몰고 오지 말고.”
풀벌레는 자신이 처형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이제껏 왕자비의 어깨에 가만히 앉아 있었던 건 그저 졸아붙어서였는지, 구명 길이 열리자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속도로 탈출했으니까.
다리를 기하학적인 각도로 와다다, 움직여 가며 사라지는 연둣빛 풀벌레를 보며 타티아나는 비식비식 웃었다. 그리고 기드언에게 괜히 동의를 구했다.
“희한하게 웃기네.”
“…….”
“좀 귀엽다, 그렇죠?”
저게 뭐가 귀여워.
기드언은 참 어처구니없다, 생각하면서도 말로 내뱉진 않았다.
그는 벌레 따위엔 관심이 없어서 이미 한참 전부터 타티아나만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 ‘존재’라고 일컬을 만한 건 지금 그녀밖에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있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네요. 참 웃기고, 귀엽고.”
기드언은 타티아나에게 싱긋 웃어 주고는 시선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디에선가 선선한 하늬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은 드높았으며 솜털 구름은 상냥하기까지 했다.
과거의 어떤 날을 떠오르게 하는 날씨였다.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청명한 오후.
타티아나와 기드언이 부부가 된 지 정확히 일주일째 되는 가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