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2장. 실전 돌입 전 필수 예제 (5)
“이 어미가 적적하여 며느리와 정다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답니다. 바쁜 왕자까지 오가게 해서 미안하군요.”
타티아나는 미리 마음 쓰지 못하여 죄송하다며 사죄하려 했다.
기드언은 그녀가 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가로챘다.
“그러실 연세도 됐지요. 보통은 한참 손주 재롱에 빠져 계실 때가 아닙니까. 저희가 여러모로 많이 늦었습니다.”
얼핏 들으면 이상할 것 없는 표현이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의 말에 미묘한 가시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제 국정에서 손 떼고 뒷방으로 좀 물러나라. 그럴 나이잖아?’라고 들리는 것 같았달까.
그런데 이게 착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주름 하나 없이 완벽한 왕후의 얼굴에 실금이 하나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타티아나는 분명히 보았다.
“아침엔 많이 바쁘셨나 봅니다, 왕자.”
“그도 그렇지만, 요즘 비와 시간을 보내느라 밤이 깊어 가는 걸 종종 잊곤 합니다. 좋은 아내는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더군요.”
이 또한 무난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기드언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그녀에게 저 말은 이렇게 들렸다.
신혼이니까 훼방 그만 놓으라고.
왕후는 입을 가리며 호호, 웃더니 한참 어린 젊은이에게 조언하듯 말했다.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왕자, 그게 다음 날까지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지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드언은 이제 이 정도 조언도 고깝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너무 기분 좋게 활짝 웃으니 더욱 그래 보였다.
“그건 새니까요. 사자가 벌레나 잡기 위해 아침부터 운신할 리 있겠습니까?”
기드언은 동의를 구하듯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온화하게 미소 지었고, 그녀는 눈치를 살피다 그냥 시선을 피해 버렸다.
지금 발언은 너무 세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저 말인즉, 본인과 타티아나는 새가 아니라 사자란 뜻이었다.
……그럼 여기서 벌레는 누구겠나?
타티아나는 성대하게 차려진 음식을 음울하게 바라보았다.
식사는 이제 됐고, 이 자리에서 간절히 빠지고 싶다.
계속 이런 식으로 으르렁거릴 거면 둘 다 웃통 벗고, 시원하게 주먹다짐을 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묻고 싶다.
그러나 왕후는 괜히 왕후가 아니었다.
기드언의 말을 듣고도 듣지 못한 듯, 고상하게 미소 짓는 것이 그러했다.
대신, 그녀는 타깃을 바꿔 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기드언에서 타티아나로.
새파랗게 어린 왕자비는 왕후에게 얼마나 손쉬운 먹잇감으로 보일까?
사교계 경력이 일천한 데다 검밖에 모르고 살아온 천둥벌거숭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내가 비를 너무 심심하게 두었군요. 비는 근황이 어떻습니까. 성은 지낼 만합니까?”
“예, 왕후 폐하께서 마음 써 주신 덕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왕후는 괜한 소리는 접어 두라는 듯 손사래를 치더니 입을 가린 채 또다시 호호, 웃었다.
저게 바로 사교계 여왕의 웃음소리인가 보다.
흉내를 내 보라고 해도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아 타티아나는 상당히 감명 깊게 보았다.
“마음을 쓰긴요. 명색이 국혼인데,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왕실 어른으로서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습니다. 이리도 젊고 창창한데, 뭐가 그리 급하셨습니까. 왕실 여인의 삶이란 고독하거늘.”
기드언의 표정은 그때부터 약간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타티아나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는 누가 자신의 결혼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군소리를 붙이는 걸 싫어했다.
그게 결혼의 또 다른 당사자인 타티아나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왕후가 한 마디를 더 내뱉자, 기드언의 표정은 완전히 싸늘해지고 말았다.
“1, 2년 여유를 부렸다면, 혹여 우리 바이칼과 부부의 연이 맺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타티아나는 자신처럼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어 자리만 지키고 있는 바이칼 아인슬러 왕자를 바라보았다.
기드언의 이복동생은 깡마른 체격이었지만, 왕실 피가 어디 안 간다는 걸 증명하듯 상당한 미남자였다.
다만, 그는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타티아나보다도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것 같았다.
어머니와 이복형의 기가 이렇게나 센데, 보통 사람이라면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기드언은 왕후의 말이 무척 거슬린 모양이었다.
그는 이걸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듯 자신의 아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싸늘하게 웃으며 한 자 한 자 짓씹듯이 말했다.
“제 비는, 아시다시피 블룸의 피를 이어받아서…….”
“…….”
“어지간한 남자는 사내로도 안 봅니다.”
기드언이 그 말을 하며 바이칼을 훑어보는 이유란 뻔했다.
저런 부실한 놈은 경쟁 상대 축에도 못 낀다는 뜻이었다.
타티아나는 가만히 있다가 소낙비를 제대로 얻어맞은 2왕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뻔했다.
그리고 자기 자식 건드리는 건, 제아무리 왕후여도 참기 힘들었던 모양이지?
기품 있게 웃고 있던 왕후의 얼굴도 그때 즈음해서 기드언과 마찬가지로 싸늘해졌다.
“음식이 식겠습니다. 일단 다들 들지요.”
타티아나는 ‘예, 왕후 폐하’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냅킨을 펼치던 왕후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혹여 식사 예법이나 왕실 예절이 어려우면, 언제든 이 늙은이에게 물어보세요, 비.”
“…….”
“완벽히 익히긴 어려운 환경이었겠지요. 블룸 부부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주긴 힘들었을 테니.”
기드언과 왕후의 말을 곧잘 해석하던 타티아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만큼은 동시통역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도 귀족이라서, 또 바보가 아니라서 한 번 곱씹은 후에는 바로 이해했다.
저건 평민 출신인 그녀의 부모를 돌려 까는 말이었다.
너, 가정교육 제대로 못 받지 않았냐고.
‘왕족들의 기 싸움이란 참으로 유치하구나.’
그러나 타티아나는 불쾌한 감정이 드는 것을 모른 체하기 어려웠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왕후도 결국 자기 자식을 걸고넘어지니 발끈해서 저렇게 나오는 게 아닌가.
타티아나도 부모 욕만큼은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배배 꼬인 말로 남을 공격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니라 순간 되받아칠 만한 말 자체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이 분야의 권위자가 다시 한번 등장했다.
기드언은 시의적절하게 대화에 끼어들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는 역사 속 위인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블룸 부인께서는 발터 역사에 길이 남을 마법사이자, 고대 비문을 최초로 해석해 낸 학자였죠. 현 마탑주는 그녀와 같은 수재는 세상에 두 번 다시 나오기 어려울 거라 탄식한 바 있습니다. 고리타분한 예법서 정도야 작위 증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다 외웠을 겁니다.”
“…….”
“블룸 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사람들은 대부분 뛰어난 검술가로서의 블룸 경만 기억하지만, 그는 사실 유능한 책략가이자 전술가였습니다. 고작 천인장의 자리에서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잖습니까.”
“…….”
“원래 검술도 상대의 수를 읽는 싸움이기 때문에, 머리가 나쁘면 하기 힘듭니다. 아, 어머님과 아우님은 검술을 잘 모르시니, 쉬이 공감하기 어렵겠군요.”
기드언은 우리 부부만 아는 얘기를 해서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왕후와 바이칼 왕자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민망하기도 하고 눈치 없이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기도 해서 입안을 깨물었다.
기드언은 그런 그녀에게도 싱긋 웃어 주었다. ‘먹어요, 건포도는 안 먹어도 돼요’ 덧붙이며.
식사를 마친 뒤,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다 좀 걷지 않겠냐는 기드언의 말에 따라 사람들을 뒤로한 채 걸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기분은 비슷했다.
좀 뻘쭘하고 상대에게 미안했다고나 할까.
그들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기, 전하.”
“많이 불쾌했습니까?”
타티아나는 실제로 살짝 불쾌해질 뻔했었다.
아직도 부모님은 그녀의 세상, 그 자체라서.
하지만 기드언이 자신보다 훨씬 더 불쾌해하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그 감정은 깨끗이 사라진 상태였다.
남은 건 거들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것과 곤란했을 텐데 편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마음 정도일까.
타티아나는 쑥스러워서 그것까진 전하지 못하고, 괜한 말을 중얼거렸다.
“먹다 체한 것 같긴 해요.”
“게워 내고 싶으면 얼른 해요.”
기드언은 등이라도 두드려 줄 것처럼 손바닥을 들어 올렸지만, 타티아나는 질색하며 어깨를 돌렸다.
토사물을 몰래 꿀꺽 삼키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앞에서 먹은 걸 토해 낼 순 없었다.
그런 개망신은 어릴 때 보여 주었던 눈물의 칼춤으로 족했다.
기드언은 거부 의사를 충분히 이해했는지, 아니면 그녀가 괜찮다는 걸 느꼈는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던 종전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여느 때와 같은 그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타티아나는 오늘에 와서야 기드언을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타티아나에게는 대체로 친절하지만, 순간순간 예민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파티를 즐기지 않으며, 참모들과도 불필요한 대화는 나누지 않는 눈치다.
가끔은 그게 의아했는데, 왕후와 식사를 해 보니 이유를 알겠다.
매번 저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른 언어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니 얼마나 피곤하고 짜증 날까?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럴 바엔 차라리 웃통 벗고 거하게 치고받고 싸우는 편이 낫지 싶다.
“제가 거들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네요.”
“별말씀을.”
기드언은 흥,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고, 타티아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덧붙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도 전하랑 왕후 폐하처럼 말하는 법을 배워 볼까 봐요.”
계속 여유 만만한 표정을 하고 있던 기드언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싫다는 기색이었다.
“그런 거 배우지 말아요. 뭐, 좋은 거라고 그걸 따라 합니까?”
“왕후 폐하가 또 부르면 어떡해요. 그때도 전 가만히 있어요? 전 검 없이는 못 싸운단 말이에요.”
“이쯤 해 놨으니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안 부를 겁니다. 이번엔 그냥 탐색차 부른 거예요.”
“그래도 부르면?”
“그땐 진짜로 만성 빈혈이라고 하죠, 뭐.”
타티아나는 건장한 그의 몸을 아침처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드언이 이해했다는 듯 말을 바꿨다.
“만성 말고 급성으로 합시다.”
타티아나는 키득키득 웃었고, 길이 끝나 갈 때쯤엔 기드언도 기분이 좋아진 듯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왕자궁 앞이었다.
집무실로 가기 전, 기드언은 타티아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파티에서 봐요, 티티.”
타티아나는 그가 놀리듯이 ‘티티’라고 부르는데도 처음으로 심통을 내지 않았다.
기분 탓일까. 그의 말처럼 이번엔 정말로 좀 친해진 것 같다.
그도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타티아나의 보랏빛 머리칼을 건드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너무 예쁘게 하고 올 필요는 없고.”
“……전하나 잘하세요. 저 기죽이지 말고.”
“내가?”
“예식 날에도 혼자 멋이란 멋은 다 부려 놓고. 저 그날 들러리 됐잖아요.”
타티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쌩하니 자기 방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저게 오늘따라 자꾸만 고개를 내미는 민망하고 부끄러운 기분 때문이라는 걸 기드언은 알지 못했다.
그는 홀로 남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너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건데.’
그리고 그날 너 들러리 아니었어. ……예뻤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한참 뒤에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