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2장. 실전 돌입 전 필수 예제 (7)
타티아나는 아주 야무지게 남편의 팔짱을 꼈다.
단순히 팔을 얽은 데 그치지 않고, 양팔로 꼬옥 끌어안으며 매달리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저 여자는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한순간도 떨어지기 싫은 줄 알겠다.
하지만 어젯밤 같이 웃던 그는 고작 하루 만에 마음이 바뀐 걸까?
기드언은 이 장난에 장단을 맞추어 주지 않고, 몹시도 오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혼자만 점잖아진 그로 인해 타티아나는 뻘쭘해지고 말았다.
“싫으세요?”
“그게 아니라…….”
팔짱이야 예식 날에도 껴 봤다.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때는 자세가 이렇게 깊지 않았다.
타티아나가 몸을 완전히 기대며 무게를 실어 온 탓에 그는 본의 아니게 어떤 굴곡을 느끼고 있었다.
어렴풋이도 아니고 몹시 선명하게.
“혹시 비가 나중에 불쾌하게 여길까 봐 말하는 건데…….”
“네.”
“지금 닿아요.”
“잡았으니…… 살이 닿겠죠?”
“그게 아니라, 뭐가 느껴진다고.”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가슴께를 눈짓으로 가리키고는 벽 쪽을 노려보았다.
타티아나는 숨죽여 웃을 뿐이었다.
그는 설마 그녀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봐요. 이건 내 피부예요.
당신한테 느껴지면 나도 당연히 알지.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존재감이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막 크지 않을 텐데요?”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말이 기가 막혔는지 하아? 헛웃음을 짓다가 중얼거렸다.
“기사들이랑 어울리더니…….”
농담이 완전히 아저씨가 됐네.
어떤 새끼가 내 소녀 장사한테 이런 물을 들여 놨어?
하지만 기드언은 이 와중에도 타티아나의 말을 정정해 주며 그녀의 잘못된 자기 인식을 바로잡아 주었다.
원래 희한한 부분에서 친절할 때가 있는 남자였다.
“존재감, 있어요.”
“…….”
“충분히 느껴지니까 혹시 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고.”
“고맙네요.”
“아니, 이건 내가 고맙…… 뭐야, 이게.”
타티아나는 한쪽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키득거렸다. 잔망을 떨고 나니 부끄러워서였다.
지난밤에 뱉은 말도 있고 해서 그녀 나름대로는 용기를 내 본 것인데 뒤늦게 밀려오는 건 역시 민망함이었다.
기드언은 그녀가 다 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웃음을 멈출 때까지 지켜봐 주었다.
그러고는 한참 뒤 소담한 가슴에 파묻힌 팔을 빼 휑하니 드러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렇게 해요.”
겨우 자세 하나를 가지고 타티아나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아 오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겨우 자세 하나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건 있다.
‘내 거야.’
두 사람은 그렇게 긴 복도를 걸어 파티장에 나란히 입장했다.
국무 회의에마저 뜨문뜨문 참석한다는 국왕은 오늘 파티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를 제외한 모든 왕족들은 자리해 있었다.
타티아나는 그들에게 눈짓, 고갯짓으로 적당한 인사를 건네며 기드언과 함께 연단 위에 착석했다.
그리고 한 5분이나 지났을까?
그녀가 이 파티에 대해 처음으로 느낀 감상은 이러했다.
‘차라리 정면으로 살기를 맞는 게 낫겠다.’
살기는 용맹하게 맞서 싸울 수라도 있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얼굴이 뚫릴 지경이었다.
연회장의 석조 기둥이 되기를 소망하며 살아온 그녀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쯤은 다행인 것이 있다.
“전하랑 있으니까 진짜 아무도 말 걸 생각을 안 하네요.”
“너무 오래 있을 필요는 없고, 처음이니까 한 30분만 견뎌 봐요.”
기드언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 상황을 타티아나보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 바로 그였다.
그녀는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못 견딜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전하는 왜 이렇게 파티를 싫어하세요?”
그는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서늘한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신분이 왕자다.
심지어 뭐가 마음에 안 들면 살기를 흘리며 주변 공기를 음산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어떤 아가씨가 이제껏 파티에서 왕자에게 말을 걸 수 있었겠는가?
그런 용감한 여자가 있다면 타티아나는 가서 친구 하고 싶다.
한데 기드언의 대답은 생각보다 뭐, 별거 없었다.
“일단 너무 시끄럽고.”
“아, 네. 그렇긴 하죠.”
“온갖 향이 다 섞여서 머리가 아픕니다.”
“…….”
아아. 그랬구나. 전하께서…… 개코셨구나.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타티아나는 고개를 숙인 채 키득거렸다.
자신은 운동하느라 땀을 자주 흘리는 편이니, 더 꼼꼼히 씻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혹시라도 그가 불쾌한 냄새라도 맡게 되는 날엔 더없이 창피할 테니.
그렇게 타티아나가 연회장을 뒤덮은 장미를 감상하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여전히 얼굴을 뚫을 듯한 기세로 달라붙는 시선들 속에서 타티아나는 반가운 사람들을 발견했다.
티 파티에서 종종 교류했던 또래 친구들이었다.
한데 그녀들은 공작가 수양딸에서 왕자비로 급격히 신분이 상승한 타티아나가 멀게 느껴졌던 것일까? 아니면 파티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초 단위로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는 1왕자가 어려웠던 걸까.
확실하진 않지만 후자이지 싶다.
타티아나는 친구들이 연단 앞에서 머뭇거리자 기드언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인사하고 와도 돼요?”
“…….”
“저기, 내 친구들이에요.”
기드언은 또랑또랑 눈을 빛내고 있는 타티아나의 친구들을 무심한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타티아나는 그가 고개 한 번만 끄덕여 주면 족했다.
사실 그것도 필요 없고 얼른 인사하고 오면 그만이었다.
한데 기드언은 고개를 까딱이더니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갑시다.”
“…….”
“뭐해요. 인사하고 싶다며.”
그는 타티아나를 재촉하다가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아아’ 하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사전에 합의된 자세까지 재정비한 그들은 연단을 내려가 타티아나의 친구들 앞에 섰다.
타티아나는 손을 척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이야, 반가워요.”
“비전하,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영광입니다.”
타티아나의 말투도 어정쩡했지만, 왕자비를 대하는 그녀들의 태도도 예전과 달라진 건 마찬가지였다.
보는 눈이 많아 타티아나는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 달라 말하지는 못했다.
귀족 아가씨들이 병영에서 만난 샘슨처럼 털털하게 반응해 줄지도 미지수였고.
그렇지만 타티아나는 사교 모임에서 처음 만난 이 친구들을 꽤 좋아했다.
그때는 그녀가 친부모를 모두 잃은 지 겨우 반년이 지났을 때였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익숙지 않아 타티아나는 마치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는데, 세상에는 누가 심란해할 때 꼭 들쑤셔 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티아나는 첫 모임에서 어떤 이가 쏟은 홍차를 허벅지에 뒤집어썼다.
당연히 실수는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고의라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하긴. 언제나처럼 생각도 하기 전에 몸뚱어리가 먼저 반응했을 뿐이다.
타티아나는 화병에 있던 찬물을 자신의 허벅지에 휙 부어 버렸다. 그리고 남은 물은 빈 찻잔을 든 채 가증스럽게 눈을 깜빡이고 있는 상대방의 몸에 흩뿌렸다.
딱히 화가 나서 그런 건 아니었고…….
‘거기에도 튀었어요. 어디 한적한 데 가서 꼭 살펴보세요. 화상으로 생긴 흉터는 잘 안 지워지니까.’
이후 조용히 자리를 뜨면서 타티아나는 별일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좀 씁쓸했던 것 같기는 하다.
사람들이 날 달가워하지 않는구나, 역시 난 이런 자리에는 잘 어울리지 않나 보다 싶기도 했고.
그런데 이후 참여한 모임에서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히려 호의적이기까지 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친근한 태도를 보였던 게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이었다.
타티아나는 아직도 그때 일을 좀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마음은 표정으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관심 밖의 일엔 무심하다 못해 뚱할 때마저 있는데, 지금은 초록 눈망울이 막 몽글몽글했다.
누가 옆에서 툭, 치면 이슬 같은 물방울이 눈에서 떼굴떼굴 떨어질 것 같았다.
그걸 유심히 바라보던 기드언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앞으로도 내 비와 지금처럼 잘 지내 주었으면 좋겠군요.”
“…….”
“자주 와서 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해요.”
딱히 흠잡을 곳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기드언은 말을 끝맺고선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영 어색했고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내 친구한테 잘해 줄 일이 있어 봤어야 알지.’
하지만 기드언은 이걸로 오늘 본인의 몫을 다했다.
그의 파티장 체류 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길었으며, 부부의 자세마저 다정하기 이를 데 없다.
저건 왕자에게선 나올 수 없고, 나와서도 안 되는 자세였다.
심지어 그는 비의 친구들에게 다가가 친히 말까지 걸었다.
겨우 이 정도를 가지고도 귀족들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잉꼬부부였네?’
역시 가끔은 대중의 기대치를 낮춰 놓을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귀족들은 모두 이 전례 없는 광경을 ‘참 낯설다…….’ 생각하며 지켜보았다.
오직 스칼렛 공주만이 자기 남동생이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것에 와하하하,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