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2장. 실전 돌입 전 필수 예제 (10)
타티아나는 원래도 한 번씩 엉뚱한 농담을 즐겨 하곤 했다.
그런데 이건 매사가 가벼운 사람의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매사가 진지한 사람의 특징일 확률이 높다.
그들은 그들이 느끼는 삶과 세상의 무게가 가볍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그 무게감을 고스란히 느끼는 건 바라지 않기 때문에 한 번씩 가벼운 말로 주위를 환기하려 든다.
그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에이, 유치해, 가벼워, 치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가 바로 내공이 부족한 하수다.
기드언은 이 모든 걸 알고, 그녀의 농담에 가끔은 한숨과 냉소가 숨어 있다는 것까지도 감지하곤 했다.
그럼에도 웃어 주었다. 실제로 재미있을 때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오늘만큼은 도무지 그녀의 의도를 읽을 수 없어, 그도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갑자기 혼후 순결 얘기는 왜 나오는 건가.
저 이상한 개념은 또 어디서 들었을까. 이것도 파티인가?
기드언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떴고 타티아나도 그를 따라 눈매를 가느다랗게 만들었다. 그리고 괜스레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가 급하진 않으시고요?”
“비는…… 벌써 아기가 갖고 싶습니까?”
두 사람은 결혼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물론 기간이 가장 중한 것은 아니나, 기드언은 네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은살 때문에 울툭불툭한 그녀의 손마디를 조용히 훑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기드언의 예상처럼 타티아나는 그의 질문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진 못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검 때문이었다.
검술가들의 전성기는 짧다.
성에서 양육을 책임진다 한들 산모가 아이를 열 달 동안 품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불변이었다.
그 열 달의 무게는 검술가들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 후의 신체 변화가 어떤 폭풍을 몰고 올지는 모르는 일이고.
물론 피임법은 나날이 발달하고 있으며, 마탑에서는 그를 위한 약도 만든다.
그러나 이곳은 자손과 핏줄을 중시하는 왕실이었다.
타티아나가 우리, 당분간은 알콩달콩 둘만의 신혼을 즐겨 볼까요? 당당히 요구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타티아나가 이 상황을 확실히 피하고 싶었다면, 그녀는 기드언의 면전에서 국혼을 거절했어야 한다.
그게 여의치 않았다면 밤을 틈타 발터 국경 밖으로 도주라도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 소란을 다 감수하고 검으로 꼭 이루고 싶은 게 있느냐, 이룰 수 있겠느냐, 근데 그게 뭔데? 묻는다면……
그녀도 이젠 잘 모르겠다.
왜 검을 잡았는지 시작할 때의 마음이 잘 기억나지 않고, 여기까지인가 보다, 한계를 절감하며 정체기에 빠진 지가 너무 오래돼서.
한데도 쓰지 않는 마차에 기름칠을 하는 사람처럼 타티아나는 운동을 쉬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아직도 늘 검술 생각뿐이다.
어쩌면 당연한 거다.
아무리 별거 중이고 이혼 조정 기간에 접어든 지 오래라지만, 검은 그녀의 전남편인데 미련이 없을 수 있겠나.
타티아나는 이런 고민과 미래에 대한 설계를 기드언과 나누고 싶었다.
잠시 파티에서 스쳐 지나가는 귀부인들이 아니라 남편과.
두 사람의 앞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고 떠들어 본들 그 자리에 배우자가 없다면 그건 사실 공허한 수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결혼의 당사자가 등판하지 않은 채 이루어진 설계는 백 명의 훈수가 있어 봐야 아무짝에도 의미 없다.
그런 설계는 부실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솔직하게 툭 내뱉고 나니 이런 생각도 든다.
전남편에게 질척질척한 미련을 둔 채, 현 남편에게 ‘아이 생각 있어요?’ 묻는 이 상황, 과연 괜찮은가?
혹시 좀 뒷골 당기나? 그는 과연 뭐라고 답할까.
기드언은 한동안 침묵을 고수했다.
대체 파티에서 무슨 얘길 주워듣고 왔길래 이러는 건지 의아해서였다.
도통 영문을 모를 일이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아내가 이런 문제로 의논을 청해 왔을 땐 그 답이 어떻든지 간에 태도만큼은 진실해야 했다.
“비, 나는…….”
“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지켜야 할 존재를 더 만들고 싶지 않아요. 왕위에 오르기 전까진요.”
직역하자면 왕손을 갖는 건 미루겠다는 뜻이다.
지금 당장 또 한 번의 환경 변화를 겪는 건 타티아나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서로의 생각이 일치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녀는 어쩐지 미심쩍은 기분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마치 위험한 상황을 대비하는 사람의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전하께서는 본인이…… 왕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세요?”
타티아나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기드언은 즉답했다.
“아뇨.”
“…….”
그는 역시 기드언 아인슬러였다.
그런 결과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다는 듯한 대답에 타티아나는 걱정하던 마음이 푸시시, 식어 버렸다.
그러나 기드언 그 뒤에 분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아직 된 것도 아니죠.”
그러니 조금 더 분명히 해 두자는 거다.
변수를 줄이고 불확실성을 최소화해야 목표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으니까.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생각하는 바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고 상당 부분 동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뭔가 개운치 못한 표정이었다.
중요한 문제를 터놓고 얘기하긴 했는데, 그녀에게는 중요한 게 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정말로 혼후 순결 주의자인가?
부부가 꼭 아이를 낳기 위해서만 잠자리를 갖는 건 아닐 텐데?
설마 그는 진짜로 정숙한 남자였던 건가.
근데 왜 그런 사람이 밤마다 날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지?
타티아나는 요즘도 날이 어둑해지면 긴가민가하는 의혹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정공법을 쓰지 못하고 핵심을 비켜 나간 부분만 쑤석거렸다.
“전하는 그 소문이 신경 쓰이지도…… 됐어요.”
“무슨 소문?”
“아니에요, 잘못 말했어요.”
그녀는 차마 본인 입에 담기가 뭐한 내용이라 그냥 얼버무렸다.
그러나 기드언은 그녀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 소문이…… 성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거랑, 누이나 부관들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말고…… 혹시 또 있습니까?”
타티아나는 정말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얼어붙었다.
“세상에.”
“…….”
“뭐야. 다 아네?”
뭐야, 그러는 너도 다 아네?
두 사람은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듯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기드언은 뒤늦게 인상을 쓰며 부인했다.
“설마 비도 그걸 믿었습니까? 사실 아닙니다.”
물론 타티아나는 절대로 믿지 않았다.
그걸 믿었다면 오늘 스칼렛 공주랑 팔짱을 끼고 하하호호 신나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그렇지만 그녀는 기드언의 추궁하는 눈빛 때문에 괜히 죄를 지은 사람처럼 굴고 말았다.
과장되게 부인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이상하고 어색했다.
“아뇨 아뇨, 전 절대 믿지 않았죠, 전하.”
“…….”
“제가 그럴 리가요. 아이, 참. 다 알면서 괜히 그러시네요.”
“글쎄요. 뭐가요. 잘 모르겠는데.”
기드언은 얜 진짜 표정을 꾸며 내질 못하네, 생각하며 피식피식 웃었다.
타티아나도 열심히 부인할수록 그에게 말려드는 기분이라 반론을 포기했다. 대신, 그녀는 마음 한구석으로 내심 궁금하게 여겨 왔던 부분을 물어보았다.
“근데 전하는 그걸 왜 그냥 놔두셨어요? 사실도 아니라면서.”
그는 누가 비에 대해 함부로 떠들고 다니면 그 입을 찢어 놓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는 정작 자신의 소문 앞에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믿는 사람이 이상할 만큼 조잡한 얘기고, 내 나름대로는 편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뭐가요?”
“여자들이 말을 잘 안 걸더라고.”
“……세상에, 전하. 그건 소문이 아니라 살기 때문이에요.”
“아무튼 난 편했다고.”
하지만 기드언도 그 소문이 타티아나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미리미리 입을 다 찢어 놓을걸. 너무 안일했지 싶다.
그런데 그 순간, 기드언은 갑자기 머리에서 불빛이 깜빡깜빡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고, 그의 입가에서는 서서히 진득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비로소 이 상황을 즐길 수 있게 된 자의 미소였다.
그도 이제는 뭔가를 눈치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티티.”
“…….”
“왜 갑자기 이런 얘기들을 해요?”
그녀가 오늘 꺼낸 화제들은 중구난방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교집합이 하나 존재했다.
잠자리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여전히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또 괜한 소리를 꾸역꾸역 늘어놓았다.
“아니, 뭐. 별로 좋은 소문이 아니잖아요. 침실 시녀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뭘 이상하게 생각해요.”
“매번 같이 자는데……. 이불도 늘 그대로고…….”
타티아나를 좀 놀려 주려던 기드언은 그 말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럼 내가 이불을 어떻게 만들어 줘야 만족할 거냐고 묻고 싶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밤을 기대하는 거예요?”
“기대하긴 내가 뭘 기대해요?”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놀리지 말아요. 나도 이런 얘기 먼저 꺼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어요.”
“그럼 어떻게 해요. 기분이 막 날아갈 것 같아서 몸이 가볍다고 솔직하게 얘기해?”
이미 다 얘기했네, 뭐.
타티아나는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눈을 피했다.
그러자 기드언은 희한하게 더 안달이 나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조금 더 달라붙어 속삭이며 물었다.
“티티.”
“…….”
“한 번만 솔직하게 대답해 봐요.”
“……뭐를요.”
“나랑 하고 싶어요?”
그가 채근하자 타티아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궁금해요.”
그러니 알고 싶어요,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맑았다.
하지만 그 답은 솔직할지언정 기드언이 원하던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이제껏 해 보지 못한 경험에 대한 호기심일 뿐인가.
그런 거라면 그가 아닌 어느 누구와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기드언은 일방적인 청혼으로 이 결혼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보다 확실한 징표를 갖고 싶었다.
그 징표는 말 몇 마디면 충분했다.
너도 나를 원한다고. 그저 떠밀리듯 이 상황까지 온 것은 아니라고.
적어도 우리의 첫날밤은 나만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원한 거라고.
그는 그 말을 듣기 위해 이 순간을 미루고 미루어 지금껏 기다려 온 거다.
기드언은 다시 한번 채근하듯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나랑 하고 싶은 게 맞죠? 티티.”
“네.”
“다른 사람 말고?”
이번에는 타티아나도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
“전하랑 하고 싶어요.”
기드언은 그녀의 뺨에 입을 몇 번 맞추고는 잠시만 기다리라, 말하며 침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