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1)
발터 왕자비의 하루는 언제나 물구나무서기와 스트레칭으로 시작된다.
시녀들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이 상황에 익숙해져 버렸다.
훗날 타티아나가 물구나무서기를 거르는 날이 도래하여 위아래가 뒤바뀐 왕자비의 얼굴을 알현할 수 없게 된다면, 시녀들은 생각할 것이다.
‘비전하께서 죽을병에 걸리신 것이 분명하다.’
그녀들은 이제 타티아나가 방에서 뭘 하든 원래 저런 사람이려니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도리어 이 상황이 낯설게 느껴진 건 타티아나였다.
뮐러 가 하녀들은 그녀가 이쯤 하면 언제나 자리를 피해 주었기 때문이다.
남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어 봤자 관심 없는 사람에겐 지루하기만 할 것이다.
그런데 뭐, 좋은 구경을 하겠다고 매번 저렇게 옆에 와 있는 걸까?
타티아나는 참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펫 위에 착지했다.
이제 팔굽혀펴기를 할 차례였다.
타티아나가 바닥에 엎드리며 자세를 잡았을 때였다. 시녀 중 누군가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전진했다.
일전에 크게 홍역을 치렀던 코니였다.
“비전하, 등에 올라탈까요?”
“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그럼 비전하는 그때 저한테 왜 그러셨을까요?
코니는 왕실 비화로 길이 남을 만한 그 사건이 본인에게 벌어졌을 때, 정말 큰일이 난 줄 알았다.
세상이 무너지면 이런 기분이려나, 우리 가족들은 앞으로 괜찮을까 심란해서 잠도 설쳤다.
그러나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왕자비는 그녀에게 웃어 주기까지 했다. 너무 상냥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래 때린 놈은 기억 못 하고 맞은 놈만 잠을 못 자는 거다.
도리어 타티아나는 현재 이 상황이 훨씬 더 이상하다는 눈빛이었다.
“이렇게 적극적인 사람인지 몰랐는데.”
타티아나는 시녀들을 쭉 한 번 살펴보았다.
코니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나만 아니면 돼’ 하는 태도로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녀들도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나만 아니면 돼’ 하는 삶의 태도는 정말로 딱 그 순간만 면피하게 해 준다.
세상에는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나. 내 이웃이 곤경에 처했을 때 힘을 보태지 않았더니, 본인이 부당한 일을 겪을 땐 목소리를 내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물론 시녀들은 거기까지도 다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정말로 딱 이 순간만 면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당장 오늘 누구의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왕실에서 내일 일을 생각한다는 건 사치였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시녀들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게 아니었고, 누구 목을 막 함부로 베고 이럴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일전에 좀 짓궂은 장난을 건 게 다였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끝까지 긴가민가했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괜찮아, 코니. 나, 아무래도 당분간은 허리를 좀 아껴 써야지 싶어.”
“…….”
“이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남편과 함께하는 밤놀이는 허리에 적잖은 부담을 주었다. 부부들은 다 이렇게 밤마다 본인의 유연성과 체력을 시험하며 사는 건가?
알고 보니 다들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나 모르는 곳에서 자기들끼리만 이런 엄청난 운동을 하고 있었잖아.
그래서 일반인들이 낮에는 그렇게 비실비실하고 나약했나 보다. 밤에 가진 체력을 다 써서.
이렇다 할 비교군이랄 게 없었던 타티아나는 기드언에게 다들 우리처럼 하는 거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른다고, ‘나도 티티가 처음이에요’ 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왜였는지 혼자 오랜 시간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한편 타티아나가 왜 갑자기 허리를 사리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던 시녀들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러나 모처럼 흥미진진한 화제를 꺼내 놓았던 타티아나는 다시금 팔굽혀펴기에 열중했다.
‘아. 막 재밌어질 뻔했는데. 이거 아쉽군.’
왕자비는 대체 어디까지 건강해지고 싶은 걸까. 타티아나의 운동 루틴은 보는 사람이 숨 막힐 정도로 규칙적이었으며 반복적이었다.
그걸 보고 있던 시녀들은 많이 심심해졌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아주 사적인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요즘 자꾸 아랫배가 나와.”
“그래, 많이 먹더라.”
“아냐, 그거 나잇살이야.”
동료들이 훈수를 두자 말을 꺼낸 시녀는 눈을 치켜떴다.
“……둘 다 가만 안 둬.”
딴에는 목소리를 낮춘 듯했으나, 타티아나는 전부 다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본인 할 일에만 열중했다.
사람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만약 그 목적이 오로지 미용에 국한되어 있다면 타티아나는 조언해 줄 게 딱히 없었다.
괜히 오지랖을 떨었다가는 질투와 미움을 사기 십상이라, 타티아나는 파티에서 비슷한 화제가 나와도 어지간하면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었다.
“난 허리가 너무 아파. 이것도 혹시 직업병일까?”
하지만 그 운동의 방향성이 건강을 향해 있다면, 타티아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너무 많았다.
이건 못 참지, 응?
팔굽혀펴기에 몰두하고 있던 타티아나는 스윽, 하고 시녀들 쪽을 바라보았다.
말을 꺼낸 시녀가 누구인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세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한참 전부터 눈에 보이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너…… 그거 척추측만증이란다.’
근데 내가 이걸 알려 줘도 되겠니?
타티아나는 잠시 고민했다. 의도가 좋다 한들 남의 신체에 대해 언급하는 건 무례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타티아나는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면서까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왕자비가 무려 엎어져 있는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것도 할 말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자 시녀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타티아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내뱉었다.
“너 말이야. 짝다리 짚고 서 있지 마.”
앞에 나올 말, 뒤에 나올 말을 너무 다 잘라서였을까. 타티아나의 의도를 오해한 시녀는 어어어, 하더니 고개를 조아렸다.
왕자비가 자신의 불손한 자세를 지적했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이, 그런 얘기가 아니라…….”
타티아나는 오늘의 운동을 중단하고 카펫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말이 길어질 것 같아 팔짱도 꼈다.
“그렇게 몸의 중심을 한쪽으로 두면 척추가 비뚤어진단 말이야. 골반이 이렇게, 이렇게 틀어져. 너 앉을 때 다리도 꼬지?”
“…….”
“그거 심해지면 어느 날 갑자기 못 일어난다? 진짜야.”
“…….”
“죽어도 못 고치겠으면 내일부턴 차라리 반대쪽 짝다리를 짚어.”
타티아나는 옜다, 모르겠다 하는 사람처럼 응급 처방을 내렸다.
하지만 저게 말처럼 쉬울까? 아예 오른손잡이한테 가서 내일부턴 왼손잡이로 살라고 하지, 왜?
하지만 타티아나는 실제로 오른손잡이로 태어나서 양손잡이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누가 반문을 제기해 봐야 콧방귀도 안 뀔 것이다.
그녀는 자기 앞을 탁탁 치며 시녀에게 이리 가까이 와 보라고 신호를 주었다. 아무래도 더 조용하고 은밀하게 얘기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몸이라는 건 사적 영역이었다.
남의 신체에 대해 언급할 땐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러워진다 해도 과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신호에는 다른 시녀들도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늘 과묵하게 운동에 집중하거나,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굴던 타티아나가 갑자기 대화를 주도하는 게 그들은 재미있었다.
“이 정도면 이미 상당히 아플 텐데? 아니야?”
“……막 찌릿찌릿 바늘로 찌르는 것 같습니다.”
타티아나는 허어, 이거 큰일 났군, 하며 탄식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한숨을 다 쉬고 나면 뭔가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거라 기대했으나…….
“너 오늘 휴가야. 얼른 의사한테 가 봐.”
너무 별거 없어서 실망하고 말았다.
타티아나는 그 분위기에 전혀 개의치 않고 원론적인 말을 이어 갈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한순간에 나아지는 방법 같은 건 없어.”
“……그렇습니까.”
“그럼. 습관이란 건 원래 다 자기 몸에 각인되는 거야. 몇십 년 동안 반복한 걸 어떻게 몸이 한 번에 잊니.”
“…….”
“그런 건 1년간 찌운 살을 고작 일주일 만에 빼겠다는 말이랑 똑같은 거야. 아주 도둑놈 심보라고 할 수 있지.”
“…….”
“……표정들이 왜 이러지. 너희도 여름 오면 그러니?”
시녀들은 떨떠름한 눈빛을 하며 꼭 뮐러 가 하녀들처럼 반응했다.
‘저흰 그냥 가만히 듣고 있었을 뿐인데 왜 혼을 내시죠? 심지어 나, 지금 굉장히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데?’
전혀 누굴 나무랄 의도가 아니었던 타티아나는 머쓱해하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괜히 흠,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금 정론을 이어 갔다.
눈앞에 있는 시녀는 지금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타티아나의 눈에는 그러했다.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마주한 거니까.
거기에 대고 한순간에 달라지진 않을 테니 실망하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 보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여유를 갖고 접근하자는 거였다.
사람이 운동과 병원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쭈뼛거리며 망설여서는 안 된다.
진정한 체육인들은 언제나 신입을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다. 격하게.
“바로 낫진 않겠지만 똑바로 앉으려고 노력하고 운동만 꾸준히 해 줘도 훨씬 나아져. 그건 장담할게.”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니까. 원래 우리가 몸으로 겪는 고충은 대부분 운동으로 극복이 돼.”
근육이 붙기 시작하면 그게 다 허리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타티아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본인의 소중한 11자 복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사람은 결국 다 이 코어 힘으로 살아가는 거야.”
버티면서, 악으로 깡으로, 응?
“근육이 미래다, 이런 말도 모르니.”
“죄송해요, 비전하. 처음 들었어요.”
“응, 그럴 수 있어. 방금 지어낸 거야.”
타티아나는 키득거렸고, 시녀들은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본인에게 익숙한 화제를 언급할 땐 누구나 그게 티가 나기 마련이다.
시녀들의 눈에는 타티아나도 그래 보였다.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다.
그 솔직하고 꾸밈없는 표정이 귀여운 나머지, 보는 사람이 다 흐뭇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왕자비를 마냥 귀엽게 여겨서는 안 됐다.
타티아나는 이미 그 심각성이 중증에 달해 있는 운동 중독자였다. 그리고 운동 중독자란 해맑게 웃으면서 얼마든지 사악한 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전혀 할 만하지 않은 걸 시키면서 ‘어때? 참 쉽지?’ 따위의 소리를 천연덕스럽게 내뱉는다는 거다.
시녀들은 우린 그저 너무 즐거워하시길래 맞장구를 좀 쳐 준 것뿐이다, 라고 생각하겠지만…… 원래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다.
그녀들은 내일 일은 물론이거니와 오늘 일어날 일도 알지 못한 채, 타티아나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워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