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2)
* * *
기드언은 참모들과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들은 차주 국무 회의 안건으로 무엇을 거론할지 논의하는 중이었고, 이건 상당히 중요한 작업이었다.
만약 기드언이 왕이었다면 그는 회의에서 결정만 내려 주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기드언은 왕위 후보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아우를 경계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뒤에는 왕후가 있다.
기드언은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과시해야만 했다.
시의적절한 화두를 던지는 자가 회의의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다.
관료들이 자연스레 그를 우두머리로 인식하는 순간, 왕좌는 가까워질 것이다.
그때, 테이블을 둘러싼 참모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 환풍구 틈을 통해 방 안에 침입하려 했기 때문이다.
기드언의 측근인 케이였고, 타티아나가 언젠가 눈여겨보았던 바로 그 실력자였다.
케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바닥에 매끄럽게 착지했다. 마치 야생에서 살아온 짐승 같은 움직임이었다.
참모들은 매번 놀라고 또 감탄해 마지않았으나, 기드언은 짧게 혀를 찼다.
“정복 입고 문으로 다녀. 도둑처럼 그러고 다니지 말고.”
애초부터 환기보다는 그런 비밀스러운 목적으로 열어 둔 통로이긴 했다.
그러나 지치지도 않고 매번 흠칫거리는 참모들 탓에 회의의 맥도 함께 끊기곤 했다.
케이는 기드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원래도 말수가 적은 사내였지만, 그가 문으로 다니라는 왕자의 명을 못 들은 체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사람들 눈에 띄어 봐야 좋을 거 없습니다.’
‘늦었어. 넌 이미 내 수족으로 노출됐다.’
‘그게 아니라……. 요즘 저랑 이상한 소문 도는 건 알고 계십니까?’
그는 그 소문이 꽤나 불편하다는 기색이었으나 기드언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렇게 몰래 숨어 다니다 눈에 띄면 그게 훨씬 더 이상해 보이는 거 모르나?’
‘…….’
‘그리고 네가 왜 불쾌해해. 왕자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기드언이 같잖지도 않다는 듯 냉소하자 케이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소문이 꺼림칙했는지 종종 저렇게 복면을 뒤집어쓴 채 창문이나 환풍구로 출입하곤 했다.
사실 그는 길로 다니는 것보다 길이 아닌 곳으로 다니는 게 익숙하고 편했다.
케이는 기드언 앞으로 다가와 꼬깃꼬깃한 종이 뭉치를 몇 장 내밀었다.
북부에서 갓 수집해 온 실황 정보들이었다.
기드언은 그걸 한동안 유심히 읽더니 그냥 네가 마무리까지 하라는 듯 지시했다.
“요약해.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게.”
그러자 케이는 무엄하게도 이 나라 왕자 앞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뭐가 됐든지 간에 말로 하는 것보단 몸으로 뛰는 쪽이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 앞에는 장사가 없고, 의뢰인이 시키면 그냥 하는 게 어둠의 세계의 법칙이었다.
“북부는 마물 때문에 소란스럽습니다. 예년보다 활개를 칠 거란 전망이 대부분입니다.”
“음.”
“참호를 쌓고 성벽을 올리는 등 나름대로 대비는 하고 있으나, 얼마만큼 효과가 있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 겨울엔 어려울 거란 불안감이 영지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습니다.”
“대공은 요즘 동향이 어떤데. 왕실에 도움을 청할 것 같아?”
“……거기까진 제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전하.”
케이가 아무리 유능한 첩보원이라 한들 남의 마음을 읽는 건 능력 밖의 일이었다.
기드언도 수하를 무능하다 나무라지 않았다.
북부는 예로부터 특수한 지역이었다.
인간이 마물을 뿌리 뽑지 못한 유일한 땅.
그 척박한 땅에서 변변한 식량도 없이 오랜 시간 싸워 온 북부 인간들은 자존심이 드높았다.
왕실은 때로는 그들을 방파제로 이용하고, 또 때로는 공국의 지위를 보장하겠노라 달콤히 회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만적인 정책에 북부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화답해 왔다. 몇 번의 민란으로.
게다가 북부는 기드언에게도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의 스승은 왕실의 뜻이 담긴 전갈을 그곳으로 가져가다가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그 후 왕실과 북부의 관계가 더욱 경색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아픈 손가락을 잘라 낼 수 없다면…….’
고쳐 써야지. 주인 말을 듣게 해야지. 그래서 이용해야 할 게 아닌가.
기드언은 참모들을 향해 말했다.
“차주 국무 회의 안건은 이것으로 한다.”
“……군사를 파견하자 하실 겁니까?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과연 북부에서 달가워할까요?”
“글쎄. 거기까진 알 수 없지.”
기드언은 일단 화두를 던져 보기로 했을 뿐이다. 북부를 어떤 온도로 대할 것인가는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발터의 왕이라면 반드시 제시해야 하는 정책 기조이기도 했다.
그는 왕이 되기로 결심하였으니, 바로 그 왕의 일을 하겠다는 거다.
그래야 귀족들도 그를 차기 왕으로 인식할 테니까.
“북부에서도 아직 가신들의 의견을 다 모으진 못했을 거다.”
“…….”
“그렇지만 겨울이 오면 모든 게 판명 나 있겠지.”
그러려면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겨울이 와야만 할 것이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기드언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먼 곳을 다녀온 케이에게 수고했다는 따뜻한 말 대신, 보석 주머니를 휙 하고 던져 주었다.
출장 보수이자 위험수당이었다.
동시에 회의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기드언은 집무실을 나와 타티아나에게로 향했다.
사전에 약속을 잡은 건 아니었다. 식사를 청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으며 늦은 밤 또한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시간에 방문하는 핑계를 찾자면, 유능한 정보원이 제때 보고서를 가져온 덕이라 하겠다.
회의가 일찍 끝나 일정이 붕 떠 버렸으니까.
하지만 핑계는 역시 핑계일 뿐, 기드언은 이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걸 본인도 잘 안다.
그는 타티아나와 결혼한 첫날부터 지금처럼 하고 싶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사전에 약속을 정하지 않고, 가고 싶을 때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도 타티아나 못지않게 절제하는 삶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감정에 취해 혼자만 들떠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려면 되도록 이성적이고 정제된 모습만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기드언은 타티아나와 살을 섞은 뒤, 자신의 고삐가 느슨해져 버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여인의 몸은 매일 밤, 그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안 그래도 흥분해 있는 사람에게 이런 소리나 내뱉으며 더욱 부채질을 하곤 했다.
‘전하도, 읏, 저처럼 좋아요?’
‘……그걸 진짜 몰라서 묻는 거예요?’
‘으응, 난 가끔 전하를 잘 모르겠어요.’
‘그럼 계속 궁금해해요. ……절대로 안 알려 줄 거니까.’
기드언은 느슨해지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부여잡고, 어떻게든 조여 보고자 노력했지만 가끔은 무력해졌다.
그의 발걸음은 결국 이렇게 그녀를 향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 외문을 지나 타티아나의 방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기드언은 조금씩 눈썹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중문을 지나 마지막 관문 앞에 섰을 땐 그의 참모들도 눈을 휘둥그레 떠야만 했다.
문틈으로는 전에 없이 소란스럽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왕자비와 시녀들 사이에 절대 오가서는 안 되는 대화가 섞여 있었다.
“좀 더 조여 봐.”
“비전하, 흐윽.”
“내 손가락을 꽉 문다고 생각해.”
“……아, 안 돼요!”
그러자 타티아나가 마치 어린아이를 꼬드기듯 상냥하게 속살거렸다. 앙탈을 부리는 상대에게 웃음까지 흘려 가면서.
“아이, 뭐가 안 돼, 할 수 있잖아.”
“아파요…….”
“그치. 안 아프다면 거짓말이지.”
“……너무, 흑, 나쁘세요.”
“그래도 좀 있으면 기분 좋아질 거야.”
사람들은 지금 저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들 귀에는 흘러나오는 대화가 너무나 이상하고 낯 뜨겁게 들렸던 탓이었다. 마치 침대 위에서나 주고받을 법한 밀어처럼.
왕실 여인들이 시녀들과 빠져들곤 했다는 위험한 사랑놀이처럼.
순식간에 얼어붙은 참모들은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 기드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왕자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 얼굴들마저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누, 눈이…… 빙글 돌아 있는데?’
그들은 감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지금 왕자의 눈이 어느 정도로 돌아 있었냐 하면, 그들은 만약 여동생이 저런 눈깔…… 아니, 저런 눈빛의 사내를 집에 데려온다면 그 결혼만큼은 결사적으로 말리고 싶었다.
언뜻 차분해 보이지만 결코 정상적인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기드언은 눈치를 보고 있는 참모들을 향해 고요히 말했다.
“안에 알리지 말고 일단 열어.”
“…….”
“뭐해. 안 들려?”
주춤거리는 부관들 사이에서 앞으로 나선 건 케이였다.
그는 사람들이 당혹스러워하는 와중에도 홀로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달칵, 내려 보더니 기드언을 바라보았다.
“안에서 걸어 잠갔습니다.”
“부숴, 그럼.”
케이는 검집째로 문손잡이를 내리쳤다.
쾅! 쾅!
고작 두어 번의 가격이 전부였다.
왕자비의 방문은 더 이상 제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나 버렸다.
하지만 기드언은 그 정도로도 성에 차지 않는 듯, 새카만 구둣발로 남은 잔해를 걷어차며 눈앞에서 완전히 치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