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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1)화 (28/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3)

“…….”

“…….”

왕자의 일행과 왕자비의 시녀들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가 이렇게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서로 막 애틋함을 느끼고 그러지는 않았다.

그들은 문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허전함을 느꼈고 서서히 황당해졌으며 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장막이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서로의 민낯이 너무 날것 같아서.

시녀들은 다 조금씩 땀을 흘리고 있었다. 화장도 많이 지워졌다.

처음엔 그저 왕자비와 같이 놀 생각으로 하하호호 시작했는데, 운동이 전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타티아나는 그 중심에 서서 ‘뽐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등’을 만들어 준다며 누군가의 날개뼈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있었다.

기드언의 무리는 자신들이 너무 이상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은 사건 현장이 아니었다.

왕자비와 시녀들은 몹시도 건전한 시간을 보내다 시커먼 사내들에게 방해받은 거였다.

그러나 이걸 두고 그들의 머릿속만 유독 지저분했다고 탓하기란 어려웠다.

시녀들과 위험하고 은밀한 놀이에 빠진 왕실 여인의 사례는 실제로도 많았기 때문이다.

왕족들의 부부 사이는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으로 흘러가기 쉬웠다.

권력, 정치, 인척 등 얽혀 있는 게 너무나 많아서.

그런 그들이 침대에서만 알콩달콩 사이가 좋았을 리 없었다.

그 정신적, 신체적 공허감을 배우자가 아닌 다른 상대에게서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왕실이 아닌 곳에도 많다.

그리고 그들은 사건 현장에서조차 참으로 당당하게 얘기하겠지.

네가 먼저 날 외롭게 하지 않았냐고.

하지만 타티아나는 남들이 어디까지 생각했는지 알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지금 안 해도 좋을 자책까지 하고 있었다.

‘오는 걸 전혀 몰랐네?’

평소라면 기드언이 외문을 지나기도 전에 알아챘을 것이나, 운동 친구들이 생겨서 좀 들떴었나 보다.

하지만 그녀가 운동 친구라고 여겼던 시녀들은 수치스럽다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배신이었다.

‘뭐야. 왜 부끄러워해? 운동이 창피해?’

타티아나의 원망은 고스란히 기드언에게로 향했다.

“왜 갑자기 방문을 부수고 그래요?”

역시 구조물은 다 제거하고 보는 편이신가? 그렇다면 전쟁인가?

왕자의 참모들은 왕자가 여기에 뭐라고 답할지 참 궁금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 파악은 물론이거니와 입장 정리까지 끝낸 기드언은 별로 고민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문이 안 열리더라고.”

“…….”

“고장이 났었나 봅니다, 비.”

“……그래도 일단 노크를 해 보지 그랬어요. 사람들 놀랐잖아요.”

“했는데 안에서 못 들은 겁니다. 뭐 하느라 사람이 오는 것도 몰라요?”

타티아나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긴 한데, 그가 정말로 노크를 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였다.

그녀는 누가 문손잡이를 세게 내리치는 소리만 두어 번 들었을 뿐이었다.

이건 처음부터 작살을 내고야 말겠다고 작정했을 때 나오는 소리였다.

타티아나는 시녀들을 바라보았으나,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인기척을 시녀들이라고 들었을 리 없었다.

결국 타티아나는 의문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묻는 말에나 순순히 대답하기로 했다.

“그냥 운동하고 있었죠, 뭐.”

그러자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뺨에 손부채질을 해 주며 물었다.

“방에서 무슨 운동을 어떻게 했길래 땀이 이렇게 많이 났어요.”

“오늘 하루도 진실했다는 증거죠.”

“아아.”

“전 땀이 나지 않는 운동은 거짓이라고 생각해요.”

먹으면서 살 뺀다, 아픈 이를 단번에 일으키는 기적, 이런 자극적인 문구로 발터의 신민들을 미혹하는 자, 다 내 눈앞에 데려와 봐요.

일단 나한테 한번 팔아 보라고요. 근데 내가 해 봤는데 만약에 아니면…… 진짜 가만 안 둬.

쉽게 얻은 건 쉽게 사라져 버려요.

그 진실을 교묘히 가린 채 사탕발림만 늘어놓는 자들, 그거 다 물질주의가 낳은 괴물이라는 데에 제 오른쪽 손모가지를 걸겠어요.

난 왼손도 쓸 수 있으니까.

타티아나는 본인의 소신을 가감 없이 밝혔다.

하지만 저 건강한 소신을 1시간 내내 배경음악처럼 들어야 했던 시녀들은 약간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타티아나의 운동 코스는 초심자 맞춤형이라는 본인의 말과는 달리 혹독했다.

그냥 살짝 찍어만 먹어 봤을 뿐인데, 시녀들에게는 충분히 매웠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말이 그저 귀엽게 들리는지 기드언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네 말이 다 옳다는 듯 중간중간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기드언마저도 타티아나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빼앗아 오고 싶은 속내는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그는 타티아나의 손목을 잡아끌며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자신이 부숴 놓은 문을 힐긋 바라보며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새로 하나 달아 놔. 튼튼한 걸로.”

“…….”

“너무 쉽게 부서지는군. 성이 이래서야 되나.”

목재 문이 건장한 사내들의 완력을 버텨 내기란 불가능했다.

그건 마탑의 힘을 빌리지 않는 이상, 어떤 문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사시에 어느 정도의 시간은 벌어 주어야 안에서도 대비를 하든, 도망을 치든 할 게 아닌가.

기드언의 지시는 몹시도 상식적이었다.

다만 그 정상적인 발상이 문을 부수라 명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약간, 아주 약간 기괴할 뿐이었다.

침실로 들어온 기드언은 침대 위에 길게 누웠다.

그가 침대 맡을 탁, 탁 두드리자 타티아나도 그를 따라 위로 올라왔다.

너무 희한한 방식으로 등장해서 놀라긴 했는데, 예정에 없이 그의 얼굴을 보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뒤늦게 궁금해졌다.

“근데 전하. 여긴 갑자기 왜 오셨어요?”

하지만 기드언은 그녀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아무런 용건이 없었고, 여기에 오는 내내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는 예전에도 타티아나에게 비슷한 질문을 들었던 적이 있다.

언제였는지 날짜도 정확하다.

그날은 블룸 경의 장례식이 있었던 날이니까.

귀족들과 친위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승을 매장한 뒤, 그는 타티아나를 따라 블룸 가까지 쫓아갔다.

‘여긴 왜 오셨어요.’

‘왜라니.’

‘…….’

‘오면 안 돼?’

그때 그녀는 힘없이 미소 지으며 이렇게 답했었다.

‘올 이유가 없잖아요. 이제는.’

‘왜…… 이유가 없어?’

‘……그만 가세요.’

참 우스운 일이지만 첫 만남을 제외하고 그들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그걸 타티아나가 기억하는지, 못하는지는 그도 잘 모르겠다.

그녀는 그 무렵 많이 불안정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네가 그 질문을 나한테 또 하네?

미안하지만 이젠 쫓아낼 수 없을 텐데?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

“이유가 없으면 오면 안 돼요? 여긴 타티아나 집이 아니라 내 성이에요.”

어머? 유치하게 나오네?

타티아나는 별것도 아닌 질문에 기드언이 왜 이렇게 비딱하게 반응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의 말엔 틀림이 없었다. 이곳은 왕자궁이었다.

그가 이 안에서 어디로 행보하든, 그걸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말이다.

그가 혹시라도 이 건물의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쩨쩨하게 나올 생각이라면, 타티아나도 할 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절반은 저 쓰라면서요. 전하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요.”

“…….”

“그렇다면 이건 우리의 공동 명의가 아닐까요?”

하지만 공동 명의를 주장하는 타티아나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그녀도 후견인 지정과 그 청산 절차를 다 거쳐 봐서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법적 서류였다. 백날 우겨 봐야 말은 종이 한 장을 못 이긴다.

그리고 그 종이가 1만 장이 모여도 왕족 앞에선 한갓 휴지 조각이다.

“왕실 소유인 거 알아요. 그냥 농담해 본 거지, 욕심낸 건 절대 아녜요.”

기드언은 그녀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어디서 이렇게 때가 탄 농담을 배워 왔을까, 출처가 궁금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가져요. 명의가 필요하면 내가 없는 서류라도 만들어다 줄 테니까…… 전부 다 가지라고.”

“아니, 그냥 농담이었는데요. 굳이 이렇게까지 해…… 주신다면 감사해요.”

타티아나는 정 그렇게 나오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빙긋 웃었고, 기드언은 결국 얼굴을 가린 채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도 안다. 그녀는 검으로 이루는 성취 외에 다른 것엔 관심이 없다.

왕실이 블룸 가에 하사한 땅과 재산 목록은 이미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더 높은 작위를 제외하고, 줄 수 있는 건 거의 다 퍼 줬다는 거다.

한데 그녀는 성인이 된 후에도 전혀 급할 게 없다는 태도로 뭉개고만 있었다.

그 재산을 얼른 찾아 주고 싶어 성혼식을 올리기 전에 서류 작업부터 착수한 건 기드언이었다.

그러니 이 상황 또한 타티아나에게는 소소한 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걸 다 알면서도 기드언은 다 주겠노라 약속하고 싶어졌다.

이런 자잘한 것으로나마 환심을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싶어서.

이 정도로 안달이 나 있다는 걸 들키면 그녀는 그를 시시하게 느낄지도 모르는데.

몸을 섞은 뒤로는 자신의 고삐를 조이며 속도를 조절하는 게 쉽지 않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옷자락을 휙 걷어 올렸다.

허락조차 구하지 않는 손길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으나, 허리를 주무르며 속삭이는 목소리는 그저 상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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