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5)
“양부모님이랑 오라버니를 여기 초대해도 되나요?”
“……뮐러 부부?”
기드언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리고 그가 미간을 좀 좁히는 것만으로도 타티아나는 주춤했다.
손장난을 하고 난 뒤 사람이 묘하게 말랑말랑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그녀는 한발 물러서며 다른 안을 제시했다.
“저 혼자 공작 저에 다녀와도 되고요.”
“왜, 그 집에 뭐 놓고 왔어요?”
놓고 오긴 뭘 놓고 오나. 애초에 그 집엔 타티아나의 물건이랄 게 없었다.
모기 채로 쓰던 검 한 자루와 어머니의 저서만 몇 권 있었을 뿐이었다.
모기 채는 내다 버렸지만, 마법서만큼은 아주 소중하게 챙겨 왔다.
“왜라뇨. 혼인식 후에 제대로 인사를 못 했으니까 그렇죠.”
“…….”
“지난번에 어머님도 파티에서 그러셨잖아요. 나중에 식사 한번 같이 할 기회가 있으면 영광일 거라고…….”
뮐러 부부와 대화를 나눈 것은 찰나였지만, 기드언도 그런 말을 듣기는 했다. 별로 새겨듣지 않았을 뿐이지.
너무 대충 들은 나머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편 그에게서 흔쾌히 대답이 나오지 않자 타티아나는 좀 의아해졌다.
그녀가 생각할 땐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딱히 누가 문제 삼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밖에 나갈 때마다 허락을 받아야 하는 불쌍한 여자인 양 괜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한텐 친정이라고 할 만한 곳이 거기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그에겐 전혀 안 불쌍했나 보였나 보다.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말에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가 대체 왜 네 친정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혹시 모르고 있을까 봐 얘기하는 건데…….”
“…….”
“뮐러 가와의 법적 관계는 결혼 전에 완전히 정리되었습니다.”
“…….”
“네 호적 내가 파 왔다고.”
“……제가 이제 아인슬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기드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인슬러로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전부 다 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아인슬러 가의 여인으로 살아라’ 이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성 하나 갖다 붙인다고 한순간에 그녀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넌 블룸이야’ 같은 빤한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그런 류의 얘기를 당분간 좀 자제할 생각이었다.
가문의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그녀에게 생각보다 큰 것 같아서.
“아무튼 뮐러는 아니죠.”
“…….”
“거기랑은 남이잖아. 처음부터 그랬고.”
“…….”
“그새 정들었어요?”
3년이란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하지만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더라도 ‘그새’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한 감이 있다.
기드언도 짧은 기간이었노라 주장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도 주워들은 게 있어서, 타티아나가 공작가에 정을 붙였을 리가 없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그녀는 뮐러 가에 특별한 유대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냥 제 도리는 하고 싶다는 거예요. 이유야 어찌 됐든 먹여 주고 재워 준 은혜가 있으니까.”
“…….”
“지금 설마 싫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죠?”
“…….”
뭐야, 진짜 싫은가 본데?
그가 부정하지 않자 타티아나는 황당해졌다. 그래서 갑자기 한참 지난 사건을 들춰내 버렸다.
“나도 왕후 폐하랑 밥 먹었잖아요!”
타티아나는 그 자리에서 안 들어도 될 기분 나쁜 말까지 들어야 했다.
기드언도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사과도 했다.
다만 억울한 부분은 좀 있다.
그도 그 밥을 먹고 싶어서 먹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사자인 타티아나보다도 그 상황을 훨씬 더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왕후가 그쯤에서 멈추었으니 망정이지, 조금 더 선을 넘어왔더라면 기드언은 실수인 척 식탁을 발로 걷어차 버렸을 것이다.
타티아나도 그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눈만 가늘게 뜬 채 말이 없는 기드언을 보며 그녀는 승기를 잡은 기분 또한 느꼈다.
역시 과거사 공격에는 당해 낼 자가 없나 보다.
하나 순간의 말싸움을 이기겠다고 지난 일까지 들추는 건 너무 치사한 게 아닐까?
그런 건 기사도 정신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치졸한 승리 따위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이런 방법을 절대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응, 일단 오늘까지만 하고.
“시댁 식구들이랑 밥을 한 번 먹었으면 당연히 친정 식구들이랑도 먹어야죠. 요즘엔 가족 행사도 번갈아 가면서 한대요. 이번 해에 시댁 먼저 갔으면 다음 해엔 친정 먼저.”
“그래요?”
“네.”
“뭐, 합리적이네.”
상대에게 선순위를 양보하는 건 기본적으로 배려다.
그러나 그게 법칙으로 고착되는 순간, 누군가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며 고마움을 잊고, 누군가는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이건 널 계산적으로 대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도록 우리, 사전에 경계하자는 거겠지.
그러나 기드언은 갑자기 피식피식 웃더니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근데 누가 그런 소릴 하는데.”
“티 파티에서 친구들이요.”
“아. 친구들이랑 식사하는 거 보류.”
“왜요?!”
기드언이 생각할 땐 너 한 번, 나 한 번, 나 한 번, 너 한 번, 그 순서 외우다가 예민해져서 더 싸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알기로는 타티아나도 저걸 다 기억하고 외울 사람이 아니었다.
결혼기념일이나 안 까먹으면 다행이지, 자기 생일은 기억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기드언은 순서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가급적이면 양쪽 다 안 만나고 싶을 뿐인 거였다.
그의 기준엔 양쪽 모두 가족이 아니라서.
왕후는 그냥 사람 자체가 싫었고, 뮐러 가는 처가로까지 대우해 줄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으로 뭔가를 요구하는데, 그 요청을 묵살하고 싶지는 않다.
왕자로서 친위대 대장과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서, 기드언은 싱긋 웃으며 이딴 식으로 말하고 말았다.
“아무튼 그거면 된다는 거죠?”
“…….”
“그래요, 어디 한번 해 봐요, 식사.”
아름다운 미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의 말투에 타티아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싫다는 얘기죠? ……지금 그거 협박처럼 들려요. 상당히 무섭다고요.”
“협박이라뇨. 그럴 리가요.”
그는 내 비의 소중한 사람들과 식사할 생각을 하니 몹시도 설렌다고 말하며 아까보다 더 활짝 미소 지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 * *
해는 중천에 떴고, 시각은 어느덧 정오였다.
시종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기드언에게 다가와 아뢰었다.
“전하, 이제 슬슬 일어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비는?”
“준비 다 마치셨답니다.”
기드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몹시도 선선한 태도였으나 사람들은 엊그제부터 계속 왕자의 기분과 심중을 살피게 됐다.
‘뮐러 일가와 자리를 한번 마련하도록 해.’
‘뮐러 가요?’
‘어. 내 비께서 가족이 그리운 모양이야.’
기드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지시했지만, 이건 수하들에게도 의외로운 일정이었다.
왕족들은 아무나 성으로 불러와 만날 수 있지만, 또 아무나와 이유 없이 만나진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아내의 과거 후견인을 어떻게 ‘아무나’라고 칭할 수 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드언과 왕실 친위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감 같은 게 존재했다.
기드언은 현재 자신의 가장 가까운 호위로 신원 불상의 사내를 두고 있었다.
친위대 소속 기사가 아니라는 거다.
왕자로서 처리해야 할 공무가 있을 때도 친위대의 힘을 빌리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투명인간과도 같은 취급이었고, 이러한 관계가 시작된 건 아마도 블룸 경이 순직한 후였을 것이다.
항간에서는 이를 두고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했다.
‘전하께서도 상처가 크신 게지. 제법 돈독한 사제지간이 아니었나.’
소중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연상시키는 상징물만 봐도 마음이 복잡한 법이다.
그립고 씁쓸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추측에 의구심을 품는 이들의 수도 상당했다.
귀족들의 눈에 1왕자는 그렇게까지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측근이 죽었을 때 슬퍼하기보단 이것 참, 일이 어렵게 되었군, 혀를 찰 사람에 가까웠다.
‘……난 친위대에 실망하신 걸로 보이네만. 더는 실력을 믿을 수 없게 된 거지. 전하는 본래 자기 사람 하나는 까다롭게 고르시잖나.’
이렇게 무성한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왕자와 친위대 사이의 거리 두기는 계속되어 왔다.
한데 일을 하러 온 사람에게 일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고 본인들이 홀대받는다 여기게 된다. 그리고 살길을 찾아 다른 곳에 줄을 대기 마련이다.
뮐러 공작은 1, 2년 사이 왕후 측과 은밀히 접촉하고 있었다.
한배를 탔다고 말하기까지는 어려웠다. 그런 정도의 증거는 기드언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이 상황을 계속 나 몰라라 방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왕위 승계에는 정통성만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군사를 장악해야 수월히 왕좌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 몇 달 전, 국왕은 바이칼 왕자의 외숙부를 수도 방위군 대장으로 임명했다.
악재였다.
이 사건은 기드언의 승계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게 분명했다.
이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기드언은 친위대장의 수양딸에게 과감히 청혼했다.
그건 귀족들에게 이러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1왕자가 왕실 친위대에게 다시금 손을 내밀고 있다고.
상당히 설득력 있는 추론이나, 기드언은 성혼식을 치른 후에도 이렇다 할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친위대 문제가 부관들 사이에서 언급되어도 ‘그러게. 그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며 미온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입고 갈 옷 좀 내놔 보라며 시종에게 손을 내미는 지금도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시종이 건넨 외투에 한쪽 팔을 꿰며 기드언은 아주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부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난 말이야.”
“…….”
“사실 뮐러 공작에 대해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