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6)
그걸 여기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관들은 하나같이 귀를 기울였다.
1왕자가 본인의 개인적인 감정을 늘어놓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드언은 그런 부관들을 보며 참 어처구니없지 않냐는 듯 말했다.
“하마터면 내 비가 제수씨가 될 뻔했잖아.”
“…….”
아, 그때 그 사건을 얘기하는 거였나.
비록 기드언은 웃고 있었으나, 부관들은 이번에는 하나같이 왕자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들은 기드언이 타티아나의 방문을 부수었을 때, 눈이 빙글 돌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자가 눈을 희번덕거렸던 건 사실 그날이 처음이 아니다.
때는 작년 이 무렵.
타티아나와 몇몇 귀족 아가씨들의 데뷔탕트가 예정되어 있는 날이었다.
타티아나는 그날 부상을 연유로 불참을 당일 통보해 왔다.
그 사실을 파티장에서 알게 된 기드언이 어찌나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었는지, 부관들은 왕자가 타티아나와 사전에 약속이라도 잡은 줄 알았다.
꼭 바람맞은 사내와 같은 반응이었던 것이다.
왕자는 여기엔 더 볼일이 없다는 듯 그대로 연회장을 나섰지만, 진짜 사건은 이후에 일어났다.
왕후는 뮐러 부부에게 수양딸의 안부를 묻는답시고 이런 농담을 했다.
‘좋은 청년과 연을 맺어 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쉬우시겠지만 다음 해로 미루셔야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왕후 폐하.’
‘호오, 기왕 미루는 김에 한두 해 더 기다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우리 바이칼도 조만간 혼처를 정해야 할 테지요.’
‘……세상에. 말씀만으로 가문의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기드언은 그 화기애애한 환담을 스칼렛 공주에게 전해 듣고서 기어코 눈이 돌아 버렸다.
만약 그 혼담이 진지하게 급물살을 탔다면, 그는 타티아나를 어디 먼 산기슭에다가 납치해다 놓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드언은 왕후나 뮐러 가에 찾아가서 내 걸 건드리지 말라고 행패를 부릴 수 없었다.
그는 그간 자신이 타티아나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감쪽같이 숨겨 왔다.
그가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 왕후가 진짜로 움직일 테니까.
왕후는 기드언을 물먹이겠다는 심보 하나만으로도 친아들과 타티아나의 결혼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아, 네 약점이 이거였구나? 얘가 갖고 싶은 거지? 그런데 어쩌나, 못 가질 텐데?’ 하면서.
다행히 시간은 기드언의 편이었다.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성인이었으나 바이칼은 아직도 성인식을 치르기 전이었다. 그리고 왕실은 조혼 풍습을 없애기 위해 결혼법을 뜯어고친 바 있다.
왕족이 먼저 나서서 그 법에 예외를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몹시 열 받지만 딱 1년만 기다리면 기드언이 이기는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 되었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때 그 결혼법이 여럿 살렸다.
시간이 흘러 본인이 점찍은 여자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 기드언은 이제 그녀의 양부모와 식사를 앞두고 있다.
성장을 끝마친 그는 마지막 옷매무새를 시종에게 맡기며 부관들에게 물었다.
“해묵은 과거는 훌훌 털고 가는 게 옳다고 생각하나?”
부관들은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저 질문이 단순히 파티장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국한된 것이라면 이렇게 너스레를 떨 수도 있겠지.
‘예, 전하, 그 정도는 그냥 결혼 전에 있는 소소한 사건으로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지나면 다 추억이 됩니다.’
그러나 뮐러 공작과 왕후의 사이는 그게 다가 아니지 않은가.
“……글쎄요. 전하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늘 미적지근한 태도로 일관하던 기드언은 의외로 명쾌하게 대답했다.
“기회를 줘야지.”
“…….”
“썩은 밧줄이 아니라 내 동아줄을 잡을 수 있게.”
“…….”
“처가에 이 정도는 베풀어도 되잖아.”
그러나 그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게다가 속으로는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처가는 무슨.’
기드언은 마음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애써 삼켰다. 그리고 타티아나를 에스코트하러 가기 위해 집무실을 나섰다.
타티아나와 기드언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뮐러 가 사람들을 마주했다.
분위기는 조금 건조했다.
뮐러 부인과 아들은 얼어붙어 있었고, 공작 또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심하며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표면적인 분위기로만 따지자면 왕후와 함께한 식사 자리가 되레 더 나았다.
그땐 가식적일지언정 웃음소리도 났고, 대화도 간간이 오갔으니까.
기드언은 타티아나에게 이제 만족하냐고, 네가 원한 게 이런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여기 있는 어떤 누구보다 감흥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자, 좀 어이가 없어져 버렸다.
‘네가 다 모아 놨으면서, 네가 제일 말이 없으면 어떡해?’
쑥스러운 건가, 아니면 갑자기 새침데기가 된 건가. 본인이 뮐러 가와 기드언 사이의 가교인 건 사실이니, 서로 안부라도 묻든가, 정 할 말이 없으면 날씨 이야기라도 해야 할 텐데.
타티아나는 포크로 샐러드만 들쑤시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갑자기 낯을 가리는 사람처럼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자, 어쩔 수 없이 나선 건 기드언이었다.
그는 그녀를 대신하여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었다.
“비가 경과 부인께 고마운 게 많았던 모양입니다.”
“아, 별말씀을요.”
“진작부터 이런 자리를 갖고 싶다고 졸랐는데 너무 늦었군요. 다 내가 바빴던 탓이니 비에게는 서운한 마음을 가지지 마십시오.”
타티아나는 음식을 깨작거리다가 기드언을 빤히 바라보았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되게 귀찮아하는 것 같더니 말이 아주 술술 나와서였다.
‘당신, 오늘 애쓴다?’
타티아나가 킥, 하며 입술을 씰룩이자 기드언도 그 표정을 읽었다.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꼭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웃겨?’
타티아나는 실제로 지금 좀 재미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와 말 한 마디 없이도 대화가 통한다는 게 신기해서였다.
두 사람이 눈빛으로 미소를 주고받는 가운데, 뮐러 부인은 왕자의 인사치레에 뒤늦게 화답했다.
“아, 아닙니다, 전하. 서운하다니요. 저희는 정말로 초대해 주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 말에 기드언은 다시 한번 타티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거 봐. 이 사람들, 갑자기 불러서 놀랐잖아. 이 사람들도 자기들이 내 장인 장모라고는 생각 안 해.’
기드언의 생각은 반쯤은 옳았으며, 또 반쯤은 틀렸다.
만약 뮐러 부부가 타티아나의 친부모였다 해도 기드언을 대하는 태도는 여기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왕자란 원래 어느 집안으로 장가를 가든 어렵고 불편한 사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드언과 타티아나가 서로에게 흘리는 웃음과 눈빛 언어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놓는 데 크게 기여했다.
뮐러 부부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에 임했고, 나중에는 타티아나에게 근황을 묻기도 했다.
“비전하, 성에서는 지낼 만하신지요.”
“네, 다 좋아요. 전하가 정말로 잘 해 주세요.”
타티아나는 입으로는 뮐러 부인에게 대답하고 눈으로는 기드언을 바라보았다.
‘어때. 나도 당신만큼 잘하지? 나도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는 해요.’
기드언은 그게 귀여워서 그래, 네가 만족했다면 됐어, 속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비전하는 요즘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시는지요.”
“어……. 그냥 예전이랑 똑같아요.”
상당히 불분명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그 답변을 구체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뮐러 가 사람들은 타티아나가 여기서도 벌레를 잡고, 종종 막대기를 휘두르고 땀 흘리며 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게 탐탁지 않았나. 아니면 걱정스러웠나.
뮐러 공작은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더니 속내라도 털어놓듯 기드언에게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결혼이라, 사실 저흰 처음에 많이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예, 전하. 친위대장인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여기사의 길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물리적 한계도 너무 명백하고요.”
“…….”
“어떻게 해도 제 아비의 자리까지 오르는 건…… 불가능했을 겁니다.”
기드언은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갑자기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원래 남의 말을 좀 꼬아 듣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왕실 언어라는 게 늘 함의가 있고, 그 이면에 칼날을 품고 있을 때가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긴 습관이었다.
그런데 내가 오늘따라 유독 심하게 꼬였나?
기드언은 뮐러 경의 말이 상당히 고깝게 느껴졌다.
타티아나가 이제 검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처럼 들려서였다.
그는 이 결혼으로 타티아나의 날개를 꺾으려 한 게 아닌데 말이다.
믿는 사람이 몇 없고, 아직도 사교계에서는 이런저런 추측들이 오가는 모양이지만 그는 정말로 타티아나가 좋아서 결혼한 거였다.
거북하게 들리는 부분은 그것 말고도 또 있었다.
타티아나는 여성 검술가로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진작에 넘어섰다.
입단 시험에 통과해 친위대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기사들 중에도 타티아나의 맞수가 될 수 있는 상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타티아나를 그리 기쁘게 해 주지 못하겠지.
전투는 신사적인 운동 경기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는 체급과 성별을 나누어 싸우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물리적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뮐러 경의 말은 옳았다.
아무리 기드언이라도 그 자체를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불쾌한 건…… 왜 지금 그런 말을 해서 내 비를 속상하게 하냐는 거다.
타티아나는 이미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나도 얘한테 그런 말은 함부로 못 해. 그런데 왜 네가 그딴 소릴 해.’
기드언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얼른 타티아나의 기색을 살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너무나도 덤덤한 얼굴이었다.
저런 말에 인이 박여서인가. 그녀는 뭐, 그렇긴 하지, 숫제 인정이라도 하듯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기드언은 희한하게…… 더 배알이 뒤틀리고 말았다.
발끈하지 않는 건 그렇다 치고 뭐 듣기 좋은 노래라고 고개를 끄덕이나.
기드언은 살짝살짝 짜증이 올라와서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고 답도 간단했다.
그는 그냥 이 짜증을 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