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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0)화 (37/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12)

공주는 날 왜 날 버리냐며, 그러지 말라며 타티아나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 사슴 같은 눈망울을 보니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타티아나는 마지못한 척 앉으며 너털웃음을 지었고, 스칼렛은 피이, 따라 웃더니 속삭였다.

“혹시 나한테 많이 깼어?”

“아뇨. 뭐 이런 걸로요.”

그저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허무해졌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뒤늦게 궁금해진다.

“근데 소리가 대체 어디서 났길래…….”

속이 더부룩할 때 나는 소리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식도를 타고 입에서 뀨우, 날 수도 있고, 배에서도 뀨우우우, 날 수 있다.

물론 사람인 이상 이렇게 귀엽게는 안 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소리가 또 어디에서 날 수 있냐 하면…… 음.

타티아나는 역시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굳이 대답 안 하셔도 돼요.”

“그래도 될까? 올케는 사람이 참 상냥하네.”

“별말씀을요. 근데 말이에요. 공주 전하는 결혼한 지 꽤 되신 거 아닌가요?”

타티아나는 그 시점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결혼이라면 기드언과 타티아나보다 스칼렛이 원조였고 훨씬 더 강력했기 때문이다.

스칼렛 공주는 이웃 나라 고위 관리의 장남과 혼인하여 한때는 발터를 떠나 있었다.

이게 왜 화제가 되었냐 하면 그 이웃 나라와 발터는 20여 년 전 아주 큰 전쟁을 벌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타티아나의 친부는 바로 그곳에서 전공을 세우고 귀족이 됐다.

물론 종전도 했고 다 옛날 옛적 이야기라지만, 칼을 겨누었던 나라끼리 진실한 우방으로 거듭나는 거 본 적 있나?

타티아나가 알기론 대륙 역사상 단 한 건의 사례도 없었다.

한데 참 놀랍게도 스칼렛과 로버트는 국가 간 이해관계에 떠밀려 정략혼을 한 게 아니었다.

둘은 진짜로 서로에게 반해 연애해서 결혼했다. 상당한 논란을 무릅쓰고.

결혼을 이렇게 요란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건 남매가 마찬가지인가 보다.

스칼렛은 타티아나의 질문에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그리고 햇수를 세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 5년 됐지?”

“근데 결혼 생활을 5년씩이나 해도…… 그런 소리가 부군께 아직 부끄럽나요?”

타티아나는 정말로 궁금해서, 진짜로 알고 싶어서 물어보았다.

이 문제는 사람마다 의견이 갈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부끼리는 친구처럼 모든 것을 다 오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래도 이성적인 긴장감과 신비감을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왕족의 부부 관계란 게 대체로 냉정하고 사무적으로 흐르기 마련이지만…….

이런 건 그냥 생리 현상 아닐까? 생리 현상이라는 건 조절이 불가능한 영역이 아니냐는 말이다.

5년씩이나 살을 맞대고 살았는데,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까지 지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서로 없었던 일처럼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

아. 그럴 수준이 아니었나?

타티아나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스칼렛은 ‘어머, 얘 좀 봐’ 하더니 넌 이제 나보다 더 큰일 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올케는 벌써…… 터 버린 거야?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너무 다 내려놓은 거 아니니?”

“아뇨? 아니요. 아직 그런 적 없는데…….”

한때 기드언 앞에서 먹은 걸 게워 내느니 다시 꿀꺽 삼켜 버리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긴 하지만, 다행히 그런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결백을 주장하며 한발 빼자, 스칼렛은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이었다.

겪어 본 적 없으면 위로 따윈 집어치우라는 듯 아주 앙칼진 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남동생에게 시집온 타티아나가 걱정스러웠는지 별걸 다 당부했다.

“올케, 기드언은 좀 까칠해. 절대 그런 것까지 귀엽게 봐 주지 않아.”

“그런가요.”

“응, 경멸하는 표정을 지을지도 몰라. 그거 당하면 되게 기분 나쁘거든? 한 번 보고 나면 올케 쪽에서 먼저 이혼하고 싶어질 수도 있어.”

스칼렛은 정이 뚝 떨어진다는 듯 치를 떨었는데, 타티아나는 그 말이 별로 실감 나지 않았다.

그녀는 기드언과의 결혼 생활이 여러모로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환경이 변했는데도 딱히 불편한 게 없다.

심지어 그녀는 잠자리마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아직 쑥스러움까지는 극복하지 못했지만 기대감으로 두근거릴 때가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쌍방이 만들어 가는 관계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편안함이 느껴진다면, 한 번쯤은 이런 의심을 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혹시 나 혼자만 편한 것은 아닐까?

상대는 이 순간에도 죽을힘을 다해 날 맞춰 주고 있는 게 아닐까.

나의 이 편안함은 상대방이 불편을 감수한 대가가 아닐까.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결혼 생활에 있어 굉장히 세심한 부분들까지 배려하고 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무엇을 두고 남편이 까칠한 사람이라 말하는지는 알겠으나, 그게 치가 떨릴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타티아나가 속으로만 남편을 열심히 두둔하고 있을 때였다.

스칼렛은 갑자기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해 왔다.

“있잖아. 난 사실 로버트한테 아직 민낯을 보여 주지 않았어.”

타티아나는 헛, 하며 숨을 들이켰다.

“정말요? 한 번도?”

“응.”

“단 한 번도?”

“그렇다니까.”

“……두 분 따로 주무세요?”

사실은 ‘두 분 남이세요?’ 묻고 싶었는데 타티아나도 예의 차리느라 많이 순화했다.

스칼렛은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로버트가 잠귀가 어둡거든. 항상 내가 먼저 일어나는데, 졸리면 나도 다시 자. 화장한 채로.”

아니, 어떻게 5년 동안이나 저 귀찮은 짓을 해 왔지?

타티아나라면 저 짓을 하기 싫어서라도 각방을 쓰자고 했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스칼렛 공주가 대단하다 못해 좀 무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체 민낯이 뭐라고.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생긴 걸 어떡하라고.

“왜 그렇게까지……. 부군께서는 그러면 좋아하시나요?”

“아니. 어이없어서 웃지, 뭐.”

“…….”

“로버트는 내가 뭘 해도 그냥 예쁘다고만 해. 사실 이런 쪽에 많이 둔감하다? 화장법을 바꿔도 전혀 구분을 못 하더라고.”

스칼렛은 5년 동안 같이 산 남편을 이해하기 어려운 눈치였다.

‘어제 본 빨간색이랑 오늘 본 빨간색이 똑같은 건 줄 알더라. 올케,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야. 하늘 아래 같은 색조란 건 없는 거잖아? 그렇지?’ 하며 타티아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스칼렛은 ‘뭐야, 너도?’ 하며 경악했고 타티아나는 ‘어,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근데 그런 둔감한 사람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데요. 어차피 잘 모르신다면서요.”

“그냥 나 혼자만의 자존심이야. 남편한테 푹 퍼져 있는 모습 보이기 싫어. 아름답지 못한 건 용납할 수 없다고!”

“…….”

“어때. 이제 나한테 오늘 얼마나 큰일이 일어난 건지 알겠어?”

아니요, 아직 모르겠는데요. 공감이 어렵사옵니다.

그렇지만 타티아나는 괜히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그녀는 스칼렛 공주보다 훨씬 신혼인데, 남편 앞에서 너무 막 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잘 보이려는 노력이 조금 더 필요한 걸까?

그런데 생각하다 보니 또 의아해진다.

스칼렛 공주는 왜 여기까지 와서 본인이 치부라 여기는 얘기들을 털어놓고 있는 걸까.

아름답지 못한 건 용납할 수 없다며, 지금 사람을 차별하냐는 거다.

타티아나도 직접 꾸미는 데에 취미가 없을 뿐이지, 예쁜 걸 보고 듣는 건 좋아했다.

“그런데 왜 굳이 여기까지 도망을 오셨어요.”

“올케라면 나를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았어.”

“아아. 그런 거라면 잘 찾아오신 게 맞아요.”

타티아나는 검만 있으면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해도 소대 하나 정도는 거뜬히 막아 낼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브라우닝 경 혼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공주의 남편은 딱 봐도 문관 출신이었다.

타티아나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는 아마 저 문턱도 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깨 뽕이 차오르기 시작한 타티아나를 보며 키득거리던 스칼렛은 잠시 후,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고백했다.

“있잖아. 타티아나.”

“네?”

“나 사실 그냥 놀러 온 거야.”

“…….”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뜻밖의 말에 타티아나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스칼렛은 그걸 오해했는지 ‘좀 부담스럽나?’ 말하며 멋쩍어했다.

혹시 자기, 지금 딸 같은 며느리를 원한다는 시어머니처럼 보이냐며 밉살스러운 농담을 하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은 얼마나 순수한 호감의 표현인가.

그런데 이 말은 나이가 들수록 듣기 힘들다.

만약 듣게 되더라도 저 사람의 진짜 의도는 무엇인가, 자꾸만 재고 따지게 된다.

타티아나는 이 자리에서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

공주의 말을 그냥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고, 간직하고 싶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스칼렛 공주의 팔뚝을 검지로 쿡, 찔렀다.

뒤늦게 힘 조절을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스칼렛은 다행히 공격으로 오인하지 않고 까르르 웃어 줬다.

그 웃음을 듣고 있으려니, 유년 시절에나 느낄 수 있는 몽글몽글함이 피어나는 것 같다.

따사로운 분위기는 시녀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보는 사람들마저 흐뭇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 좋은 기류를 깨는 묵직한 소리가 있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자 스칼렛의 눈동자는 어지러이 흔들렸고, 경비병은 아뢰었다.

“비전하, 브라우닝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래?”

“갑작스러운 방문이 실례인 줄은 아나, 잠시 담소를 나눌 수 있는지 여쭤 달라 하십니다.”

타티아나는 바로 응답하지 않고 일단은 스칼렛부터 바라보았다.

공주는 혼비백산하더니 입 모양으로 정신없이 외치고 있었다.

‘세상에. 와 버렸어. 진짜 와 버렸다고! 타티아나, 어떡해? 응?’

타티아나도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일단 침착하세요.’

그러나 공주는 마음이 다급했는지 타티아나가 뭘 어떻게 하라고 일러 주기도 전에 창가의 커튼 뒤로 숨어들었다.

타티아나는 피식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커튼 밑으로 작은 발이 빼꼼하게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안 보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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