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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3)화 (40/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15)

* * *

친위대 부대장, 사무엘 샘슨은 오랜만에 왕자비를 알현할 영광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영광스러워하지 않았다.

‘하아, 또 왔어…….’ 중얼거리며 노골적으로 머리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놓고 그런 얼굴을 하면 나도 매일 오는 수가 있어요.”

타티아나가 협박하자 샘슨 경은 갑자기 막 턱짓을 했다. 말하기 부담스러우니까 시녀들 좀 눈치껏 치워 달라는 뜻이었다.

타티아나는 이자벨과 코니에게 산책이라도 하면서 좀 쉬라고 말해 두고는 잔디에 풀썩 주저앉았다.

샘슨 경은 그녀를 따라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근데 왜 왔어? 누구 쓸 만한 놈 있나 보러 온 거야?”

왕족이 자신의 호위를 직접 지목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딱히 그걸 위해 온 건 아니었으나 타티아나는 일단 눈앞을 쭈욱 한 번 훑어보았다.

“…….”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 병영에서 자신과 어깨를 견줄 만한 수준의 상대를 그리 쉽게 찾지는 못했다. 거의 다 아는 사람들이었고, 그 외에 특별히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얼굴은 없다.

미적지근한 반응에서 많은 걸 느꼈는지 샘슨 경은 한숨을 쉬었다.

친위대 부대장으로서의 한탄이자,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네가 봐도 신선한 애가 없지. 아, 진짜 큰일이야.”

“뭐가.”

“요즘 애들은 하나같이 근성이 없더라고. 애들이 다 썩은 생선 눈깔을 하고 있어.”

“저기요, 아저씨. 그런 소리 함부로 하면 그 요즘 애들한테 욕먹어요.”

아무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해도, 요즘 친구들에게는 꼰대 소리 한다는 만능 방패가 있어요.

하지만 타티아나도 그 요즘 친구들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웃다가 뒤늦게 용건을 꺼냈다.

“양부께서는 뭐하고 계세요.”

“대장? 뭐, 똑같지. 관사 안에 계셔.”

“좀 불러 주실래요? 그냥 내가 들어가는 게 낫나?”

그러자 샘슨 경은 질겁하며 눈을 흘겼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애 보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다.

“난 네가 참 편한데 말이야.”

“응.”

“이럴 때 보면 너도 결국 간부의 딸이구나 싶어.”

“…….”

“네가 눈앞에서 사라져 줘야 쟤네들도 숨을 쉬지, 대장님까지 끌고 나오면 어떡해. 애들 불쌍하지도 않아?”

왕자비 전하가 왕림하셨는데 여기에 계급이 까마득한 대장까지 행차하면, 훈련병들은 오늘 최악의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타티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피시시 웃었다.

겉으로는 ‘요즘 애들’ 운운하더니, 속으로는 후배들을 아끼고 챙긴다는 게 느껴져서였다.

타티아나도 기사들이 상관 앞에선 자세부터 눈빛 하나하나까지 달라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기사들을 고생시키려는 마음이었던 건 아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양부와 단둘이 얘기를 나눈다고 생각하니 아주 살짝 부담을 느껴서였나 보다.

하나 후배들을 아끼는 훈련 교관의 저 따뜻한 마음씨를 당사자들은 모르더라도 타티아나는 알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샘슨 경에게 손을 흔들었고, 시녀들에게는 따라오지 말라 명했다.

그러고는 관사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환기를 시킨 건 언제일까.

친위대장이 머무는 방은 매캐한 공기로 가득했다.

파이프를 물고 있던 뮐러 경은 타티아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전하, 여기까진 어떻게…….”

“저 혼자 왔어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버지.”

타티아나는 뮐러 경의 등 뒤로 가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틈새로 햇빛과 상쾌한 공기가 밀려 들어오자 타티아나는 좀 살 것 같았다.

그러나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돌아섰을 때 그녀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호박색 술병을 발견했다.

명색이 왕실 친위대 수장의 방인데,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다.

사실은 군율 위반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뮐러 가에 있을 때도 비슷한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양부는 그녀의 친부가 돌아가신 뒤, 정신적으로 많이 고통스러워해서.

가끔은 그 정신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 사람처럼.

타티아나가 아무런 내색 없이 책상 앞으로 가 싱긋 웃자, 뮐러 공작은 푹 파묻히듯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그녀가 요구한 대로 결혼 전, 자신의 수양딸을 대할 때처럼 편안하게 물었다.

“어쩐 일이냐. 네 양부, 이빨 빠진 꼴 구경하려고 왔어?”

지난번 식사 때, ‘양부께선 현장에서 뛰실 나이가 아녜요.’ 하던 타티아나의 발언을 비꼬는 것이다.

타티아나는 멈칫했지만, 정말로 그게 신경 쓰여서 오기는 했다.

본인의 몸 하나만 믿고 살아온 기사에게 신체 능력이 쇠퇴한다는 건 얼마나 씁쓸한 일일까.

그녀도 내세울 거라곤 몸으로 터득한 검술이 전부라서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곤란한 상황을 모면한답시고 기사들이 가장 싫어할 만한 얘기를 양부에게 한 것 같아 좀 미안했다.

“기분 많이 상하셨어요?”

“뭐, 사실 아니냐. 이젠 퇴물이지.”

정말 많이 상하셨나 보다.

그녀는 숙연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가 조심스럽게 변명했다.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기드언 전하가 갑자기 이상한 데 흥미를 느끼시는 것 같길래, 저도 말을 자르느라 그런 거예요.”

“…….”

“제가 어떻게 발터 친위대장을 이기겠어요.”

그러나 겸양도 지나치면 눈총을 사는 법이다.

뮐러 공작은 피식 웃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녀를 가늠하듯 바라보았다.

“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

타티아나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예의상 추켜세운 말에 양부가 너무 민감한 질문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검술가로서, 서로의 실력만을 놓고 냉정하게 물어온다면 그녀도 입에 발린 소리 같은 건 더 이상 할 수 없어진다.

그거야말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타티아나는 어떻게 해도 양부에게 질 자신이 없었다.

뮐러 공작은 곤란해하는 그녀의 침묵에서 답을 읽은 듯했다.

그는 타티아나를 보며 비식거렸는데, 그의 눈은 지금 그녀에게서 또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작은 옛 친우의 이름을 거론했다.

“넌 네 아비를 참 많이 닮았어.”

“…….”

“요즘도 블룸이 남긴 그 검술서를 부여잡고 지내는 게냐.”

타티아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저 질문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겠다.

한 톨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친부가 이룩한 경지는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그걸 곁에서 엿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일하게 가 보고 싶었던 이상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 봐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한때 마력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으나, 어머니는 말하곤 했다.

마법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은 또 있을 거라고.

마찬가지로 검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보다 적합한 검술을 연구하고 만들어 가면 된다.

하지만 침묵을 지키는 타티아나를 보며 뮐러 공작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라는 것인지, 안타깝다는 것인지 모를 길고 피로한 숨소리였다.

“타티아나.”

“…….”

“넌 나나 네 아비처럼 살지 말거라.”

쇳소리와 같은 목소리에 타티아나는 고개를 들어 뮐러 공작을 바라보았다.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공작의 노란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실핏줄이 선 눈동자를 마주하자 속이 답답해져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술병의 주둥이를 잡고 소파 뒤에 감춰 두었다.

“아버지, 술 줄이세요.”

“왜, 근무 태만으로 경질될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거냐.”

뮐러 공작은 피식 웃었으나,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몸에 안 좋으니까요. 원래 마법사나 검사는 평균 수명이 짧다고들 하잖아요. 제 친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고요.”

“…….”

“그런데 전 사람들의 통념이나 통계를 깨는 사례가 좋아요. 그러니까 양부께선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얘기한 타티아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공작을 등진 채 문가를 향해 걸어갔다.

서서히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공작의 음성은 기어이 그녀의 발길을 붙잡았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오늘따라 몹시 고통스럽게 들렸다.

“타티아나. 네 아비는 검을 잡다 죽은 거야.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테지.”

“…….”

양부는 망가졌다.

친우가 죽은 뒤로 종종 저렇게 술에 취한 채 악몽 속에 살고 있다는 걸 타티아나에게 들키곤 했다.

발터가 사랑하던 기사의 죽음은 이렇게나 많은 사람의 일상 속에 상흔을 남긴 것이다.

기드언도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나.

늘 과거 속에서 산 것은 아니나 잊을 수는 없었다고.

‘네 아비는 검을 잡다 죽은 거야…….’

타티아나는 귓가를 어지러이 맴도는 말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그 소리를 떨쳐 내듯 고개를 여러 번 흔들었다.

비록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남아 있었으나, 다시금 문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담담하고 올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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