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17)
* * *
기드언은 참모들과 정보원을 불러 모았다. 성을 비운 사이 그간 일어났던 일에 대해 보고 받기 위해서였다.
그가 가장 중점적으로 관심을 두는 곳은 역시 왕후와 이복 아우의 동태였다.
“왕후 폐하와 수도 방위군 대장이 한 차례 접촉했습니다. 장소는 왕후궁 후원, 정오에 방문하여 1시간여 후에 궁을 나왔습니다.”
“바이칼은. 그도 동석했나?”
“아닙니다. 2왕자 전하는 본인 처소에 계셨습니다.”
기드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부왕은 수도 방위군 대장 자리에 2왕자의 외숙부를 임명함으로써 여간 골치 아픈 선물을 준 게 아니었다.
군부 인물과 왕후가 인척 관계이다 보니 사사건건 거슬리지 않는 게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심기를 까칠하게 만들 만한 사안들은 아직도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전하. 왕후 폐하와 뮐러 공작도 한 차례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래?”
“예. 왕후의 시동이 뮐러 가에 방문했습니다. 이튿날, 공작이 왕후 폐하를 알현한 것으로 보아 왕후 측에서 시동을 통해 먼저 만남을 제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뮐러 공작은 근 1년 사이, 왕후와 이런 식으로 꾸준히 유대 관계를 쌓고 있었다.
기드언이 타티아나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나를 도우라, 넌지시 말한 이후로도.
“내 제안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나 보네.”
기드언이 입꼬리를 비틀며 조소하자 참모 하나는 조심스레 간언했다.
“조금 더 두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후 폐하의 부름을 무시할 수 있는 귀족은 발터에 없습니다.”
옳은 말이었다.
공작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달려갔는지,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마지못해 부름에 응했는지 기드언은 아직 모른다.
그러나 만약 이게 공작이 의도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기드언 측에 넌지시 언질을 줘야 했던 게 아닐까?
마침 기드언은 성을 비운 참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진 독대는 상호 간에 오해의 여지를 남기기 쉬웠다.
물론 기드언도 공작에게 그 정도의 약삭빠른 처세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사실은 이게 오해라는 생각부터가 들지 않는다.
참모들은 그 뒤로도 각기 맡은 분야에 대해 왕자에게 상세한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어느덧 보고의 끝자락에는 타티아나의 존재가 등장했다.
“전하께서 성을 비우신 동안 비전하께서 병영에 가신 적이 있습니다.”
“음.”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없는 동안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가 자신의 인간관계 하나하나까지 통제하려 들고, 그녀를 뒤에서 감시하는 음습한 남자는 아닐 거라고.
안타깝지만 기드언은 그런 남자가 맞았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본인의 수족 하나는 붙여 두었다는 것이다.
안전상의 사유라는 그럴듯한 명분이 있었으나, 그 이유가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게다가 아주 쟁쟁한 실력자를 붙여 놓아 그녀의 눈을 속이기까지 했으니, 이건 계획범죄나 마찬가지였다.
케이는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 나갔다.
“친위대 부대장이자 훈련 교관인 사무엘 샘슨이라는 자와 짧게 환담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관사로 들어가 뮐러 공작과 만나셨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기드언은 서서히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왜 그랬대?’ 하는 표정이었으나, 케이는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그건 본인 아내한테 가서 물어볼 일이지, 남이 대답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데?”
“듣지 못했습니다. 관사 가까이로는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기드언이 싸늘한 눈초리를 보냈으나, 케이는 담담히 말했다.
“호위 거리를 너무 좁히면 비전하께서는 틀림없이 알아채실 겁니다.”
“…….”
“전하께서도 비전하의 실력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건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다.
기드언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잘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마뜩잖은 기분을 지울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케이는 잠시 보고를 이대로 끝낼까 말까 고민했다. 지금만으로도 왕자의 표정이 충분히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무는 임무였다.
그는 결국 자신이 곁에서 보고 느낀 바를 첨언했다.
“그 뒤로 평소와 크게 다른 행동은 없으셨습니다만……. 묘하게 울적해 보이셨습니다.”
“어떤 부분이.”
“수련장에서 검을 앞에 놓고 날이 질 때까지 계속 앉아만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거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타티아나에게 있어 그 이상의 확실한 신호는 없었다.
기드언은 하, 혀를 차고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소를 흘리다 입을 뗐는데, 혼잣말인지 부관들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소리였다.
“난 역시 뮐러 공작이 거슬려.”
“…….”
“참 많이.”
기드언은 이 문제가 언젠가는 수면 위로 떠오르리란 걸 알고 있었다.
국정 수행에 있어서든, 타티아나와의 결혼 생활에 있어서든.
뮐러 공작은 그에게 목 안에 걸려 있는 가시와도 같았다.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시시때때로 참을 수 없이 거슬리고 무시할 수 없는 존재.
공작이 왕후와 손을 잡고 세를 형성하기 시작하면 기드언은 여러모로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부관들을 바라보았다.
“이 사안은 해결하는 데에는 아마 세 가지 방법 정도가 있을 거야. 첫 번째는 공작과 완전히 손을 잡아서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거지.”
기드언은 이미 공작에게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 적이 있다.
돌아오는 반응은 시원치 않았으나, 그렇다면 보다 매력적인 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된다.
상대가 혹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정도의 보상을 약속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나 부관들은 하나같이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왕자는 내키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드언은 부관들의 표정을 보며 픽 웃더니 곧바로 다른 안을 제시했다.
“또 다른 방법은 이참에 공작을 왕후와 엮어서 같이 보내 버리는 거지.”
기드언은 많은 귀족들의 약점을 잡고 있었다. 거의 취미 생활에 가까울 정도로 틈만 나면 증거를 수집해 왔다.
공작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왕실이 한 가문을 몰락시키려 들 때 걸고넘어지는 대표적인 분야는 조세와 횡령 혐의였다.
“친위대 예산 운용 내역과 뮐러 가 영지 세수분은 계속 조사하고 있지?”
“예, 전하. 문제는 분명 있습니다. 더 나올 여지도 무궁무진합니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부관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공작은 숙청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왕후까지 엮는 건 어렵다는 뜻이었다.
왕족들은 본래 꼬리 자르기에 아주 능한 자들이었다. 설령 그들이 실제로 긴밀한 관계에 있다 해도 그 책임이 왕족에게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걸 뻔히 알면서도 눈감을 수밖에 없다.
그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족의 힘이었다.
하지만 기드언이 지금 염려하고 있는 건 그게 아니었다.
“조서야 꾸미기 나름이고 증거는 만들면 된다.”
“…….”
“내가 궁금한 건 내 비에게서 뮐러 가의 이름을 지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야.”
혼인 서약과 함께 타티아나와 뮐러 공작 사이에 있던 서류 관계는 완전히 청산됐다.
타티아나 블룸 아인슬러.
그녀의 이름자에 더 이상 뮐러 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 작업을 차질 없이 완수하기 위해 기드언은 오랜 시간 숨죽여야만 했다.
그의 수족들을 제외하고, 기드언이 타티아나에게 청혼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었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나머지 당사자인 타티아나마저 모르지 않았나?
심지어 그녀는 아직도 그의 마음을 잘은 모르는 눈치다.
그러나 서류가 깨끗해졌다 한들 사교계 인사들의 입방아를 피해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없는 얘기도 만들어 내 트집을 잡는 종자들이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타티아나가 뮐러 가의 보호 아래 있었다는 과거를 지우기란 불가능했다.
타티아나마저도 그랬다.
그녀는 아직도 뮐러 공작을 양부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속앓이를 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제 기드언이 고려할 수 있는 방안은 세 번째뿐이었다.
가장 깔끔하고 손쉬운 방법이다.
왕후와 친위대가 규합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타티아나의 이름이 불미스럽게 거론되지 않을 만한 방안.
“사고사로 위장할 방법을 생각해 놔.”
참모들은 일제히 낯빛을 굳혔다.
그중 하나가 긴장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공작을 처리하실 겁니까?”
“생각만 해 놓으라고, 생각만. 대비책은 있어야 할 거 아닌가.”
“…….”
“나머지는 더 지켜본 뒤에 결정하겠다. 공작과 왕후가 접선하는 걸 놓치지 마라.”
“예, 전하.”
얼추 회의를 마무리한 뒤 기드언은 부관들을 등진 채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부관들은 아무도 섣불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들은 오늘의 이 대화가 상당한 파란을 불러일으킬 거란 예감을 지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얼마 전 탄생한 한 쌍의 신혼부부.
그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격정적인 키스와 함께 해후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은 이렇게 생각했었다. 아주 완벽한 하루라고.
하지만 한 사람이 평온한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또 한 사람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다.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라 할지라도 서로의 머릿속을 완벽하게 들여다보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내가 이제 이 사람을 어느 정도 알았다고 자만한다면, 그런 시각을 경계해야 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상대의 일면은 불쑥불쑥, 시시각각 모습을 드러낸다.
때로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간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을 것이다.
어떠한 난관도 없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생각이 드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문제는 어디에선가 불거지고 있을지 모른다.
바로 그때를 조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