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2)
기드언은 내 비가 왜 저러냐고 묻는 시선으로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물론 그들은 답을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이야 알겠는데, 이제 우리도 믿겠는데, 너무 그렇게 빤히 보고 있으면 아무리 털털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민망하지 않겠냐는 거다.
하지만 시녀들은 모처럼 찾아온 이 달콤한 기류에 흠뻑 취하고만 싶었다.
이제야 좀 신혼부부를 보필하는 것 같았다.
‘역시 부부는 가끔은 떼어 놔야 돼. 사이가 훨씬 좋아졌잖아.’
‘근데 비전하가 운동하다 부끄러워하는 날이 다 오네.’
시녀들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열심히 내리눌렀다.
그녀들에겐 다행스럽게도 기드언은 시녀들의 표정 같은 것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밖으로 나간 타티아나를 쫓아 뒤늦게 발걸음을 옮겼다.
보름이나 사람을 홀로 두었으니 오늘처럼 일정이 없을 땐 되도록 시간을 할애하여 함께 있을 생각이었다.
그런 기드언의 뒤에 어느새 그림자처럼 케이가 따라붙었다.
두 남자가 수련장에 도착했을 때, 타티아나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는 중이었다.
기드언은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위험하게…….”
저러니까 데뷔탕트처럼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도 인대가 늘어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랑 결혼 1년 늦게 한 건 알고 있냐고 묻고 싶다.
물론 모르겠지. 굳이 말해 줄 생각도 없다.
기드언은 수련장 구석에 턱걸이용 기구를 하나 설치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티아나도 두 남자의 존재를 눈치챘다.
한데 그녀는 약간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드언 때문이 아니라 케이 때문이었다.
‘발걸음이 먼젓번이랑 다르네?’
그녀가 발소리만 듣고도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맞힐 수 있는 건, 당연하지만 사람마다 걷는 습관이 달라서이다.
보폭은 물론이거니와 체중, 어느 정도로 힘을 싣는가에 따라 소리 크기도 달라진다.
그런데 만약 그 발걸음이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면, 그건 여러 보법을 구사할 줄 안다는 뜻이었다.
이 세상에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집단은 기사, 살수, 도둑들뿐이었다.
물론 그들이라고 전부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그 안에서도 상당한 실력자들만이 가능한 경지였다.
타티아나는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에서 턱, 내려와 케이의 앞에 섰다.
타고난 것인지 햇빛을 자주 보지 않아서인지 창백한 낯빛.
약간 마른 듯하면서도 안이 옹골지게 꽉 차 있는 다부진 체형.
일반인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눈빛, 특유의 기.
‘참 궁금하단 말이지.’
그녀는 케이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가 범상치 않은 사내라는 걸 감지했다.
기드언이 아무나 옆에 달고 다닐 리는 없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해도 타티아나는 그가 수준급의 검사라는 걸 알아보았을 것이다.
결국 이 호기심과 약간의 호승심을 어찌하지 못하고 타티아나는 기드언을 빤히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내가 당신 부하에게 지금 실례를 좀 하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기드언은 그 무언의 눈빛을 해석해 냈다.
부부라서 가능했다기보단, 그도 그녀가 케이를 종종 눈여겨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드언은 한숨을 쉬며 맘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렇게 당사자의 의사 따위는 가뿐히 제쳐 두고, 왕자와 왕자비는 자기들끼리 의견 교환을 끝냈다.
타티아나가 검을 휘두른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케이 또한 믿을 수 없는 발검 속도로 타티아나의 검에 응수했다.
챙-! 하는 소리가 연무장 안에 울려 퍼졌고, 타티아나는 호오, 탄성을 내뱉으며 감탄했다.
‘엄청 빠르네!’
기사들끼리는 단 일격만으로도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는 힘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의 검사는 아니었다.
그건 체격만 봐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내들은 근육량을 높이는 게 상대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에 몸을 불리는 경우가 많다.
만약 그와 다른 길을 택했다면, 그 외에 앞세울 수 있는 장기가 있다는 거다.
그래서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싶냐고?
눈앞의 상대가 타티아나의 흥미를 너무 심하게 자극한다는 것이었다.
챙, 채챙, 챙-!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자세를 바꾸어 가며 검을 맞댔다.
너무나 현란하게,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기드언은 하아, 한숨을 쉬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그도 이제껏 본 적 없는 갖가지 기술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양쪽 모두에게서.
타티아나는 너무나 신이 난 기색이었다.
한 합, 한 합 주고받을 때마다 번쩍이는 검처럼 그녀의 초록 눈에서도 빛과 생기가 뿜어져 나왔다.
‘세상은 역시 넓구나. 이런 인재가 어디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왔지?’
케이는 분명 기사는 아니었다. 그건 장담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이런 검술을 구사하는 기사를 발터에서 본 적이 없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긴 하나 그의 검 뒤에는 무수한 배경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기사치고는 잡기술에 너무나 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그에게서 왕실 소속 기사들의 검술 또한 보인다는 거였다.
이건 어깨너머에서 몇 번 훔쳐보고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뭐지? 이 사람.’
타티아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모처럼 투지를 불태웠다.
제대로 한번 붙어 보고 싶어서. 이기고 싶어서.
하지만 상대는 수도 없이 단련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최전성기의 사내였다.
길게 끌면 체력적으로 불리해진다.
그녀는 여유 있는 척 입꼬리를 끌어 올리다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러나 케이 또한 이 대련에 진지해진 건 마찬가지였다. 봐주면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정말로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타티아나가 빠르게 승부를 보려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그도 자신의 숨겨진 기술들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타티아나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탄성을 내뱉었다.
사내가 그리는 검의 궤적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속도가 전혀 줄지 않는다.
쾌속이었다.
힘마저 좋다는 뜻이었다.
타티아나는 그의 검을 올려치지 않고, 밀어내듯 흘려보내며 잽싸게 몸을 피했다.
‘내가 이래서 함부로 증량을 안 하는 거야.’
타티아나는 자신보다 세밀하고 정확하게 검 끝을 놀리는 기사는 거의 보지 못했다.
민첩하게 틈을 파고들거나 상대의 공격을 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부 몸이 가벼워서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에게 없는 걸 추구하다가 본인만의 장점까지 잃어버리면 너무 애석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녀가 회심의 일격을 피한 뒤, 케이는 더욱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웃음기 없는 얼굴은 평소와 같았으나, 잿빛 눈에 투지가 엿보인다.
그도 이 순간만큼은 신분의 고하를 잊고, 진심을 다하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케이는 잔디를 박차고 타티아나를 향해 몸을 날렸고, 약점을 발견한 그녀의 눈은 일순간 반짝 빛났다.
‘옆이 비었어.’
언뜻 보면 허리를 내어 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다음 수를 읽었다.
상대는 작은 걸 내어 주고 큰 걸 취하겠다는 심산이다.
부상을 감수하고 적의 목을 베는 전략.
근데 그런 건 실전에서나 하는 거 아닐까?
‘이 사람 진심이네? 난 오늘 피 볼 생각 없는데?’
그렇다면 상대가 큰 걸 취하기 전에 그녀가 작은 것으로 승리하면 된다.
타티아나는 허리 부근에서 그의 옷자락을 베며 끝을 선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케이는 그 잠깐의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거의 회전하듯 몸을 비틀어 타티아나의 검을 피한 그는 다시금 뛰어올랐다.
그리고 넓은 검날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듯이 휘둘렀다.
저런 일격은 받아치면 검이 부러지거나, 손목이 부러진다. 아니면 둘 다 부러지거나.
타티아나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바닥을 구르며 그의 공격을 피했고, 케이의 검은 잔디밭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이제 얼른 다시 일어서서 그에게 검을 겨누어야 할 차례였다.
대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가 먼저 검을 회수하느냐, 내 검이 먼저 네 목 끝에 닿느냐의 싸움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타티아나는 바닥에 앉은 채 눈을 깜빡깜빡하기만 했다.
뒤통수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양,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기드언은 예상보다 훨씬 격렬한 대련에 이걸 언제쯤 중단시켜야 하나 기회만 엿보던 차였다.
그러던 중 타티아나가 바닥을 뒹굴자 그는 손가락을 움칠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것에 의아함과 걱정을 느꼈다.
“티티.”
“…….”
“비, 괜찮은 겁니까?”
“…….”
“왜 그래요. 설마 어디 다쳤어요?”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화들짝 몸을 떨며 잔디밭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 케이의 앞에 다가섰다.
눈빛과 표정이 오히려 대련을 할 때보다 더 심각해져 있었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얼굴을 더욱 가까이 들이밀며 케이에게 물었다.
“너 누구야.”
“……예?”
케이는 잠시 침묵하다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왕자비가 이리 묻는 의도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어서였다.
타티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검술이 섞여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기시감, 묘한 직감을 떨쳐 낼 수가 없다.
그녀는 방금 상대의 검에서 분명히 누군가를 보았다.
그것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을.
타티아나는 입술을 깨물고는 매서운 눈으로 케이를 추궁했다.
“네 검에서 우리 아빠가 보여.”
“…….”
“말해. 너 누구냐고.”
순간 그들을 둘러싼 아침 공기가 조용해졌다.
케이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기드언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냐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