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3)
두 남자 사이에 오가는 눈빛을 본 타티아나는 황당해졌다. 그리고 서서히 격양되고 말았다.
꼭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빠와 관련해서.
그녀는 기드언에게 따져 물었다.
“지금 뭐예요? 둘이 왜 그러는데?”
“…….”
“이 사람 누구냐고요. 친위대원 아니잖아요.”
타티아나는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병영에 드나들었다.
그녀는 그때 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 정도의 실력자가 발터에 나타났다는 소문 또한 듣지 못했다.
이게 얼마나 괴이한 일인지 아나?
검술계와 마법계에는 어느 날 갑자기 천재가 등장할 수 없다.
마법의 경우에는 진입 장벽부터 높았고, 검술 또한 자신을 끌어 줄 수 있는 스승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소문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홀로 산기슭에 파묻혀 한 10년 수행하더니 고수가 되어 나타날 수도 있지 않냐고?
그딴 건 애들 보는 동화책에서나 가능한 얘기였다.
면벽 수행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경지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케이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스승들이 존재할 것이 분명했다.
타티아나가 생각했을 때 그중 하나는 자신의 아빠였다.
그녀는 계속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상한 의혹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혹시 우리 아빠 아들…… 밖에서 낳아 온, 뭐, 그런 거야?”
두 남자는 동시에 말문이 턱 하고 막혀 버렸다.
케이는 또다시 기드언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기드언은 실소하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도 몰라. 내 아내 한 번씩 왜 이럴까.’
결국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가진 이상한 의혹이 확신으로 굳어지기 전에 해명에 나섰다.
“티티. 스승께서는…….”
그는 습관적으로 블룸 경을 스승이라 호칭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돌아가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제 다른 호칭을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기드언은 다시금 입을 뗐다.
“장인어른은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에 있을 때도 틈만 나면 가족 얘기를 했습니다. 자잘한 이야기들이라 다 기억은 못 하지만, 그때마다 즐거운 얼굴이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요.”
“…….”
“딸인 당신이 이런 의심을 가지면 안 되죠.”
블룸 경이 들었으면 억울하여 땅속에서 눈물을 흘릴 법한 이야기였다.
기드언은 ‘알아들었으면 아버지께 사과드려라’ 하는 듯한 눈초리를 보냈다.
뒤늦게 이성을 찾은 타티아나도 민망했는지 우물쭈물 변명했다.
“아니, 나는…… 분위기가 좀 이상하니까. 그래서 누군데요.”
“누구긴요. 장인어른이 예전에 거둔 제자입니다. 제자라고 말하기도 좀 뭐하네요.”
“왜요?”
“그 정도로 길게 가르친 적이 없으니까요. 가끔씩 봐 주면서 몇 번 상대해 준 게 다일 겁니다.”
기드언은 그런데도 타티아나가 그걸 용케도 알아챘구나, 싶어서 놀라웠다.
그녀는 검술에 반쯤 미쳐 있었고, 그중에서도 부친의 검술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사람이지만 이런 상황은 그의 예상 범위 밖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는 눈치였다.
“난 이 사람에 대해 전혀 들은 적이 없는데?”
타티아나가 알기로 친부가 살아생전 가르친 사람은 기드언과 자신, 왕실 친위대가 다였다.
그중 검을 사사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밀접한 관계는 다섯 손가락 안으로 꼽을 수 있었다.
물론 딸이 아버지의 사회생활을 전부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 정도의 재목을 보고도 말 한마디 흘린 적이 없다니.
그러자 기드언은 그녀의 의문에 짧게 답했다.
“케이는 성이 없습니다.”
“……아아.”
발터에서 성이 없다는 건, 보통은 둘 중에 하나다.
밝힐 수 없을 만큼 비밀스럽고 사연 많은 인생을 살았거나, 아주 천한 신분이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블룸 경이 양지에서 가르치기에는 껄끄러웠을 것이다.
왕실에 소속된 훈련 교관은 아무나 사적으로 교육해서는 안 되는 직책이었다.
타티아나는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케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아까와는 또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흐음, 아빠 제자란 말이지?’
그것만으로도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한데, 그는 블룸 가의 검술을 아주 변칙적으로 응용해 보였다.
본인의 특성에 맞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 것이다.
여느 기사들과는 다른 점이 많은 사내.
정체를 특정할 수 없는 걸음걸이.
그가 펼쳐 보인 기술들은 교본에 나오는 정석 검술이 아니었다. 가히 생존 검술이라 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초록 눈을 빛내며 케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너, 내 스승이 되라.’
그러나 차마 이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사제 관계로 규정짓기에는 실력의 우열 또한 분명치 않았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스승이라지만, 승부를 보기도 전에 숙이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검을 겨룰 수 있는 기회는 꼭 갖고 싶었다. 배울 점이 많은 상대인 것만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체기에 빠져 있는 검술가에게 그런 존재는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는 호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눈을 치켜뜨며 너 누구냐고 추궁하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까 검으로만 인사했네. 다시 제대로 인사할게. 타티아나 블룸이야.”
“……예, 비전하의 존함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타티아나가 저 끝에서 끌어 올린 상냥함이 무색하게도 케이의 답변은 건조했다.
그는 이 상황이 몹시도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고, 기드언은 서서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비가 이제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케이의 어깨와 팔뚝, 허벅지 등을 슬쩍 훑어본 타티아나는 말했다.
“전완근이…… 참 좋네.”
“…….”
이건 기사들이 최선을 다해 대련에 임해 준 상대에게 충분히 건넬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타티아나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거의 최고 수준의 찬사이기도 했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기드언의 표정은 결국 완전히 비딱해지고 말았다.
땀을 흘렸으니 좀 씻어야겠다는 타티아나를 방까지 바래다준 뒤, 기드언은 집무실로 향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 케이에게 지시했다.
내일부터 타티아나의 대련 상대 겸 호위로 붙으라고.
타티아나는 이제 친위대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기드언의 행보에 뮐러 가와의 충돌이 예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흥미를 자극하는 상대가 있다면 그녀도 남의 검술을 관음하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굳이 기사단까지 찾아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케이가 곁에서 호위한다면, 기드언도 그녀의 안전에 관해서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기드언은 케이에게 이 지시가 뜻하는 바를 설명했고, 케이도 그를 이해하고 수긍했다.
그러니 이제 이렇게 마무리가 된 것인데…….
한 번 비딱해져 버린 그의 기분은 좀처럼 되돌아오지 않았다.
기드언은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다른 한 손 검지로는 책상을 두드리며 케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소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비가 날 왜 좋아하는 줄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기드언은 픽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잘나서야.”
“…….”
아내가 자기를 좋아한다 확신하고, 또 그 이유가 본인이 잘나서라니.
얼핏 들으면 아주 대단한 자존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내뱉는 기드언의 표정은 어딘가 조금 자조적이었다.
“난 비의 부친이 유일하게 인정하고 아낀 제자거든. 그건 내 비에게는 꽤 중요한 부분일 거야.”
“…….”
“그래서 비도 나를 인정하고 사내로 받아들이는 거지.”
타티아나에게 그녀 자신보다 약한 상대는 보호의 대상이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성은 더더욱 될 수 없으리라.
기드언이 지금껏 그녀에게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은 눈길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그가 강하기 때문이었다.
블룸의 제자였고 블룸이 인정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그 유일무이한 위치가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이제 내가 왜 짜증이 나 있는지 알겠어?”
“…….”
케이는 자신은 이 상황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결과를 바란 적도 없다.
억울하기까지 한 노릇이었으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가 무엇을 신경 쓰고 있는지만큼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드언은 그걸 보고도 부족하다 여겼는지 경고하듯 나직하게 덧붙였다.
“내 비의 마음을 흔들지 마라.”
“…….”
“미리 말해 두지만, 둘이 놀아나기라도 한다면 난 너만 죽일 거야. 혹여 비가 먼저 시작했더라도 결과는 똑같다.”
“…….”
“그러니까 잘 처신하라고.”
“예, 전하. 명심하겠습니다.”
기드언은 탐탁지 않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이쯤 해 두기로 했다.
그도 케이에 대한 타티아나의 호기심이 이성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심사가 검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라 그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리고 모처럼 해볼 만한 상대를 만나서 둘 다 신난 건 잘 알겠는데, 피 볼 때까지는 하지 마. 대련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으면 중단하라고.”
“예.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비가 다치면 난 그때도 너만 죽일 거야. 누가 먼저 시작했건 간에. 알았어?”
“…….”
눈을 내리깔고 있던 케이는 그 말에 힐긋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든 저러든 간에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