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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51)화 (45/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6)

* * *

타티아나와 스칼렛은 얼굴에 무언가를 덕지덕지 붙인 채로 카펫 위에 누워 있었다.

피부에 좋다는 녹색 채소들을 잔뜩 조합해서 빻은 결과물이었다.

타티아나는 스칼렛 공주가 이제껏 자신이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라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얼굴에 초록색 건더기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인간은 평등했다.

둘 다 공평하고 사이좋게 개구리가 된 것 같았다.

그 우스꽝스럽고도 귀여운 모습에 시녀들은 숨죽이며 키득거렸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지금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몹시 비통하기만 했다.

“아……. 분해.”

타티아나가 괴로워하며 머리를 감싸 쥐자 스칼렛은 그녀의 가슴께를 토닥여 주었다.

타티아나의 배 위에는 뜨끈하게 열을 가한 돌멩이와 담요가 올려져 있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칼렛은 킥 웃으며 물었다.

“아니, 그게 분하기까지 해?”

타티아나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자 채소 건더기 일부는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져 버렸다.

이자벨은 우묵한 그릇에서 건더기를 한 움큼 떠 얼굴에 붙여 주며 그녀를 다시금 흠결 없는 개구리로 만들어 주었다.

타티아나는 오늘 케이와 지난번 못다 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그를 꺾고 승자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훈련도 해 왔다.

그녀가 그간 머릿속으로 얼마나 많은 가상 대결을 펼쳐 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타티아나는 이미 상상 속에서만큼은 케이의 등짝을 검집으로 수천 번 후려 팼다. 그 정도로 진심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람.

그녀는 한창 기세가 끓어올랐을 때 대련을 중단해야만 했다.

월경을 할 날짜가 아닌데 갑자기 아래에서 뭔가 꺼림칙하고 낯익은 감각이…….

그 불쾌하고도 축축한 온도는 겪어 본 사람들만 안다.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그래도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타티아나는 케이에게 못 볼 꼴을 보일까 봐 황급히 자리를 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한데 오늘은 안 되겠어. 내가 컨디션이 조금만 좋았어도……. 하아, 진짜. 아무튼 다음에 봐.’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 여겼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꼭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패배자의 변명 같았다.

타티아나는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나는 절대 도망간 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외간 남자한테 이 속사정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것도 참 웃겼다.

무엇보다 케이가 별로 안 듣고 싶어 할 것 같았다.

그것마저 분했다.

“하아, 너무 창피해. 진짜 짜증 나.”

스칼렛은 놀러 왔다가 전에 없이 저기압인 타티아나의 옆구리를 찔러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

타티아나는 처음에는 입을 다물고 있으려 했다. 그러나 스칼렛이 깔깔거릴지언정 제법 진지하게 들어 주자 이제는 도리어 조금 더 공감받고 싶어졌다.

“공주 전하는 제 맘을 잘 모르시겠지만, 이게 어느 정도의 기분이냐 하면…….”

“…….”

“음. 결혼식 날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잔뜩 힘주고 나갔는데 식장에 가 보니 남편이 나보다 예쁠 때랑 비슷한 기분? 누가 딱히 잘못한 건 아니죠? 근데 억울하기도 하고 좀 고까워.”

타티아나는 말해 놓고 어어, 이건 좀 다른 얘기인가? 좀 더 그럴듯한 예시 없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칼렛은 예상외로 너무 심하게 공감해 버리고 말았다.

“어머, 그게 뭐야. 너무 열 받아. 진짜 짜증 나.”

스칼렛이 부르르 떨며 몸을 일으키자 그녀의 얼굴에서도 뭔가가 툭 하며 떨어졌다.

이자벨은 채소 건더기를 스푼으로 톡, 톡 얹으며 스칼렛도 다시금 예쁜 개구리로 만들어 줬다.

스칼렛은 뒤늦게 진정하며 자리에 누웠으나 그새 뭔가가 또 의아해진 모양이었다.

타티아나가 예로 든 상황이 너무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올케는 그런 적이…… 아아.”

“……뭐예요, 그 아아, 는?”

“장난, 장난. 타티아나가 훨씬 예뻤어. 결혼식 날 신부보다 예쁜 사람이 어디 있니.”

아니, 그 어려운 걸 기드언 전하가 해냈다니까요?

타티아나는 입에 발린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라서 그냥 웃어 주었다.

그러다 얼굴에 붙인 거 떨어지니까 그만들 좀 웃으시라고 이자벨에게 혼이 났다.

그마저도 재미있어서 스칼렛과 타티아나는 계속 키득거렸다.

엄마 말 참 안 듣는 꼬마 두 명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떠들다 보니 타티아나는 어느덧 공주에게 너무 많은 얘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내탕금에 대한 고민까지도 아주 자연스럽게 꺼내 놓게 되었다.

스칼렛이 시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을 좀 가리는 게 좋을지도 모르는데.

태생부터 뼛속까지 왕족인 사람에게 너무 어설픈 모습을 보이면 흉잡힐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타티아나는 언제부턴가 스칼렛을 스스럼없이 대하게 됐다.

스칼렛이 먼저 허물없는 태도를 보여서인지, 이게 바로 남을 꼬여 내서 비밀을 탈탈 털어먹는 사교계 여왕의 능력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스칼렛은 빈민가에 학교를 세울까 고려 중이라는 타티아나의 말에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반응해 줬다.

“좋다, 좋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응!”

“……별로 깊게 생각 안 하고 대답하는 거 같은데.”

대답이 나오기까지 5초도 안 걸린 것 같다.

타티아나는 이쯤에서 기드언을 찾아가 당신 누나, 정말 도움이 되는 거 맞냐고 묻고 싶어졌다.

그러나 스칼렛은 그 뒤로도 모든 것이 전광석화였다.

타티아나가 기드언이 이런 점을 우려하더라, 설명하자 거기에 대해서도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냐, 아냐. 걘 꼭 시작도 하기 전에 이렇게 한 번씩 사람 기분을 잡치게 하더라.”

“…….”

“철저한 건 좋은데 좀 과해.”

그건 얼마 전 기드언이 자신의 누이에 대해 내린 평가와 전혀 다르면서도 또 비슷했다.

타티아나는 솔직한 심정으로다가 당신 집안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그렇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공주와 기드언도 성격이 센 사람들이었지만 나머지도 개성이 강한 건 마찬가지였다.

친아들을 앞세워 국정에 개입하고 있는 왕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권력 투쟁에 내던져진 바이칼 왕자.

바람 앞의 등불처럼 본인의 생명줄과 권력을 위태롭게 부여잡고 있는 국왕.

한 집안에 이렇게 사연 복잡한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왕가라고 생각하니 또 그런가 보다 하게 된다.

자고로 옛 현인들이 사연 많은 집에는 시집가는 게 아니랬는데, 역시 조금 더 새겨들었어야 했나…….

타티아나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면서도 일단은 기드언을 두둔했다.

“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니까요. 기드언 전하는 그냥 저한테 알려 주고 싶어서…….”

그러나 그녀는 금세 말끝을 흐렸다.

도와주려는 사람 앞에서 어쩐지 남편 편을 드는 모양새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칼렛은 ‘어머? 편드네? 별꼴이야’ 하며 눈을 흘겼다. 그리고 키득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있잖아. 우리, 자선 경매 파티를 열자. 일을 벌이려면 기금을 모아야지.”

“……예산은 부족하지 않은데요. 저 돈 많아요.”

내탕금도 그러했지만 타티아나는 개인 사재도 넉넉했다.

모양 빠지게 귀족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우스웠던 걸까? 아니면 그녀의 재산이 공주에게는 너무 귀여워 보였나.

스칼렛은 아하하, 카랑카랑 웃더니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곱게 눈을 접었다.

꼭 순진한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눈빛이라, 타티아나는 공주가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연상의 언니처럼 느껴졌다.

“돈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원래 이런 식으로 한배를 타게 만드는 거야. 경매 행사도 귀부인들한테는 자존심 싸움이거든. 경쟁을 붙이면 지기 싫어서라도 큰 거 하나씩 꺼내 놓을 수밖에 없어.”

“그런가요.”

“그럼. 그리고 일단 발을 담그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안 좋은 말 얹기 어려울걸?”

“…….”

“자기 아내가 좋은 일 하면서 자존심 좀 세우겠다는데 어떤 남편이 뭐라고 하겠니.”

스칼렛은 내가 재미있는 거 하나 더 알려 주겠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세상에는 일터에서 깨지는 것보다 가정에서 깨지는 걸 두려워하는 남편들도 많아.”

깨진다기보다는 사람 피를 말린다고 해야 하나?

내가 유독 거기에 특화되어 있는 부인들을 몇 명 알고 있지.

스칼렛은 그때부터 초대장을 돌릴 부인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읊기 시작하더니 시녀들에게 받아 적으라 지시했다.

공주는 확실히 파티에 놀러 나오는 사람은 아니었다.

각 가문 돌아가는 사정을 너무 훤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수다를 빙자하여 타티아나에게 그걸 조금씩 들려주었는데, 그중에는 어떻게 저런 것까지 다 아는 건가 싶을 정도의 내밀한 이야기도 많았다.

타티아나는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좀…… 대단하신 것 같아요.”

어느 부인이 어떤 그림을 갖고 있고, 그 그림이 사실은 도난품 경매에 나왔던 물건이라는 사실을 왜 알고 있나?

그걸 문제 삼기 시작하면 한 방에 보내 버릴 순 없겠지만, 귀찮게는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공주는 해맑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 좀 무서웠다.

“아예 왕후 폐하처럼 앞에 나서서 국정을 보시는 건 어떠세요.”

기드언을 남편으로 둔 입장이라 입 밖으로 얘기할 순 없지만 이 정도면 승계 전선에 뛰어들어도 무리가 없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스칼렛은 그건 또 싫었는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 난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예?”

“…….”

“저기요.”

타티아나는 정색했다.

고작 여기 놀러 오는데도 입이 떡 벌어지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공주가 할 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 사실 난 괜찮은데, 로버트가 수줍음이 많아. 그냥 조용히 살고 싶대.”

“아아. 아아……?”

타티아나는 긍정할 뻔했다가 또다시 정색했다.

아니, 저기요. 당신들 국제결혼 했잖아.

아인슬러 가와 브라우닝 가는 역사적으론 원수나 다름없잖아.

당신 시아버님은 외교적으로 아주 강경 노선을 걸었던 우리 발터 왕국의…….

근데 뭐? 조용히 살고 싶어? 으으응?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렇게 살긴 이미 틀린 것 같으세요’ 하고 말하는 대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자식 세대의 뜻이 꼭 부모 세대와 일치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이 배경을 무릅쓰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충분히 힘겨운 길을 걸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타티아나는 좀 딱한 마음마저 들려 했으나, 스칼렛은 여전히 즐거운 기색이었다. 오히려 본격적으로 파티 준비에 돌입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스칼렛은 걸리적거렸는지 얼굴에 뒤집어쓴 녹색 진액을 자기 손으로 털어 내 버렸다.

그리고 채소 건더기가 바닥에 후둑, 후두둑 떨어지자 이자벨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너무 말 안 듣는 거 아니냐는 듯, 고뇌가 어려 있는 눈이었다.

타티아나는 저 한숨과 고뇌를 덜어 주기 위해 옆에 놓인 수건으로 얌전히 본인의 얼굴을 닦았다.

그러고는 공주의 옆에 꾸물꾸물 달라붙어 머리를 한데 모으고 빈 종이를 함께 채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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