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7)
* * *
뮐러 공작은 마차를 타고 등청하다 사고를 당했다.
아주 멀쩡했던 교각 하나가 때맞추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기드언 부하들의 작품이었다.
언젠가 타티아나가 이렇게 물었던가.
‘전하는 제가 전하를 필요로 할 때요. 저에게 오시다 교각이 무너지면 그게 제 탓이라고 하실 건가요?’
미안하지만 그 멀쩡한 다리를 부수는 놈은 바로 기드언이었다.
만약 원망의 대상을 찾는다면 그녀는 그를 탓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일까? 이번 사고에 사망자는 없었다.
공작 또한 팔이 부러지는 정도의 부상에 그쳤을 뿐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경고가 되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기드언은 딱히 공작을 봐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다.
감히 그의 면전에서 블룸의 이름을 들먹이며 왕후의 뒤에 선 괘씸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작이 이쯤에서 승계 분쟁에서 발을 빼고 중앙 정계에서 물러난다면 참작해 줄 생각도 있다.
갑자기 마음이 넉넉해져서가 아니라 타티아나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한데 기드언이 개미 눈물만큼의 자비를 고민할 때, 공작은 매우 불쾌한 답을 보내왔다.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왕후가 움직이고 있었다.
“전하, 왕후궁에서 친위대장에게 기사 서약을 요구할 생각인가 봅니다. 바이칼 전하에게 말입니다.”
“기사 서약?”
“예, 친위대 내에서는 이미 소문이 한 차례 돈 것 같습니다. 기사들 간에도 말이 많습니다.”
하, 혀를 차며 짧게 웃은 기드언은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부관에게 농담처럼 말했다.
“내 경고가 너무 신사적이었나 봐.”
“…….”
“아니면 너무 어렵게 말해서 못 알아들었나?”
수십 년간 공작 위에 있던 사람이 그걸 못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기드언도 그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답변을 매번 이딴 식으로 하니 기분이 더러웠을 뿐이다.
기사 서약. 검을 든 자가 주군에게 바치는 맹세.
모든 권력이 왕에게 집중된 이래 유명무실화되긴 하였으나 아직도 서약을 바치는 기사들은 간혹 존재했다.
다만 그 서약의 대상이 왕, 아니면 자기 여자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물론 왕실에 충성하는 자들일지라도 마음속으로 숭배하고 존경하는 이 하나쯤은 따로 있을 게 분명하다.
사람이라면 아마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해석될 소지가 있었다.
요즘 같은 경우에는 특히 그랬다.
왕실 친위대 대장은 한 명의 기사라 할지라도 절대 개인이 될 수 없다.
공작이 국왕과 기드언을 제쳐 두고 바이칼에게 서약을 바친다면, 사람들은 친위대 전체가 2왕자를 따른다고 여길 것이다.
꽤나 심각한 문제였지만 기드언은 비식거리며 조소했다.
‘어째 들고나오는 게 하나같이…….’
왕후는 머리 하나는 참 잘 굴러갔다.
그러나 기드언은 그녀의 감각이 다소 낡았다고 생각했다.
지난번 아침 문안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고루한 건 마찬가지였다.
밤마다 옛 문헌이라도 들춰 보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발터 귀족 중에 기사 서약에 얽힌 역사와 상징성을 모르는 이가 없다는 건 문제였다.
“이번 건은 사전에 막아야 해. 반드시.”
“……예, 전하.”
“내 아우의 외숙부가 이미 수도 방위군 대장 자리에 앉아 있다. 이 흐름을 끊지 못하면 내가 왕후에게 군사적으로 밀린다는 인상을 주게 돼.”
이제 경고에서 끝낼 수 있는 선은 넘어섰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간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 묵혀 온 갈등이라는 것만이 유일하게 확실한 부분이었다.
기드언은 케이에게 더 과격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을 찾아보라 일렀고, 부관들에게는 뮐러 가가 저지른 부정의 증거를 더 많이 확보하라 지시했다.
한 귀족 가문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보낼 수 있을 만큼의 방대한 자료를.
이미 20년 전 기록까지 들춰 보고 있는 부관들은 왕자의 명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케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난색을 표했다.
“전하, 아시겠지만 완벽히 사고로 위장할 수는 없습니다.”
어제까지는 튼튼해 보였던 다리가 하필이면 공작이 지나갈 때 무너졌다면, 그걸 단순히 사고라고 생각하는 이는 몇이나 있을까?
다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것이다. 속으로만 배후를 추측해 가며.
기드언은 계속해 보라는 듯 턱을 까닥였고 케이는 말을 이었다.
“공작은 여느 귀족들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호위를 거느리고 다닙니다. 공작 저에 배치된 인원도 상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진입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공작은 이번 일로 더욱 몸을 사리고 호위를 강화할 게 분명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기드언은 부러 비아냥거리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네 밑에 있는 놈들이 그럴 만한 실력이 안 되는 건 아니고?”
왕자의 불신 어린 말에도 케이는 동요하지 않고 답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담담한 태도와는 달리 상당히 무섭고 냉정한 이야기였다.
“죽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숫자가 만만치 않은 만큼 저희 쪽도 죽을 수 있습니다.”
“…….”
“죽는 것은 괜찮습니다. 문제는 아주 불행히도 우리 쪽에 생존자가 남아 생포될 경우입니다.”
“…….”
“그러면 전하께 불리한 증거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저 전하께 그 가능성을 말씀드리려 한 것입니다.”
기드언은 입가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서 오랜 시간 몸으로 직접 뛰어온 수하의 말은 타당했다.
어차피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리고 기드언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결말은 부관들이 수집하고 꾸민 자료로 왕후를 엮는 거였다.
당연히 쉽진 않을 것이나 적어도 흙탕물 몇 방울 정도는 튀길 수 있겠지.
큰 타격이 못 될지라도 저쪽에 더러운 걸 묻혀서 몸을 사리는 꼴을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하나 그러기 전에 저쪽에서 먼저 일을 벌인다면……. 고심하던 기드언은 다시금 케이에게 말했다.
“네 말도 타당하나 그 불리한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게 바로 네 임무고 실력이다.”
“…….”
“자료가 더 확보될 때까지는 계속 시도해. 뒤에서 쓸데없는 짓을 꾸미고 다니지 못하게 압박하란 말이다.”
“……예, 전하.”
케이는 무거운 얼굴로 답하고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혹시 아직도 지시할 게 남아 있는 걸까. 부관들은 생각에 잠긴 왕자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더 떨어지지 않을까 하여 자리를 뜨지 않고 방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 고요함을 깬 건 왕자도 부관들도 아니었다. 회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시종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보석함을 내밀자, 기드언은 무언가 깨달은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은 그에게 있어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었다.
오늘 밤, 아주 특별한 행사가 성에서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타티아나는 그의 누이와 작당 모의를 하는 사람처럼 몇 날 며칠을 쑥덕이더니 자선 파티의 주최자가 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불행한 일이지만 기드언은 그 파티의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내가 주인공인 행사에 뒷짐만 지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 할 게 없으면 꽃이라도 보내는 게 도리였고 그는 꽃과는 별개로 그녀와 잘 어울리는 목걸이 또한 선물하기로 했다.
그런데…….
“너무 늦어 버렸나.”
“아닙니다. 아직 방에 계시는 걸 확인하고 온 참입니다. 이제 준비를 마치고 연회장으로 가실 듯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기드언은 한 손에 목걸이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무실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은 평소와 다름없는 듯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어딘가 묘하게 서두르는 기색이 묻어난다.
남겨진 수하들은 그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속으로는 참 오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내의 중요한 일정을 잊지 않고 회의 중에 자리를 뜨는 왕자라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되게 다감하고 가정적인 남자인 줄 알겠다.
사실 그 남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내의 양부를 이렇게 담글까, 저렇게 담글까, 궁리 중이었는데.
어떤 모습이 진짜 왕자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나, 수하들은 아직도 가끔은 저런 모습이 낯설었다.
밖에서는 여러 사람 피 말리는 인간들도 집에 가면 애처가라더니.
저 정도면 이중인격자가 아닌가 싶었다.
치장을 끝마친 타티아나는 방을 나선 뒤 한참을 걷다가 기드언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복도 끝에 기대 서 있던 기드언은 타티아나를 보고는 몸을 바로 세웠다.
하늘색 눈동자는 타티아나의 머리 장식, 화장, 의상을 하나하나 훑어 내렸다.
자신을 감상하는 세밀한 시선을 느끼며 타티아나는 조금씩 궁금해졌다.
‘오늘은 또 뭐라고 말하려나?’
그의 성격상, 예쁘단 소리가 아무 때나 나오진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타티아나도 알고 있다.
그는 밖이거나 보는 눈이 많을 땐 낯간지러운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밤에 둘만 있을 땐, 또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는 침대 위에서 본인도 의식하지 못했을 때 예쁘단 말을 혼잣말처럼 흘리곤 했다.
아주 무심코, 가득 찬 물잔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듯.
그럴 때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인 건 사실이었다.
더 비밀스럽고 의미 있는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열과 성을 다해 꾸민 날엔 타티아나도 장소와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무한대의 찬사를 듣고 싶다.
그게 어렵다면 고생했다는 소리라도 들어야겠다.
기드언은 늘씬한 전신을 앞에서 확인한 후, 타티아나의 어깨를 잡고 핑그르르 돌려세웠다.
그러자 지난 파티에서보다 훨씬 더 깊게 파인 드레스와 과감하게 노출한 그녀의 등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 가장 자신 있는 부위가 등이라고 했었나.
기드언은 눈썹을 찌푸리며 이마를 매만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늘따라 자신감이…… 굉장하네요.”
여자 옷은 진짜 왜 이렇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에 타티아나는 거의 흐느끼듯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
기대하던 말은 아니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단 웃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