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8)
타티아나는 웃다가 삐져나온 건지 슬퍼서 삐져나온 건지 본인도 모를 눈물을 콕, 콕 찍어 닦았다.
기드언이 뒤늦게 손수건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사양하며 물었다.
“바쁠 텐데 어떻게 왔어요?”
“아내가 처음으로 주관하는 행사인데 와 봐야죠. 그런데 내가 설마 그 행사에 초대받지 못할 줄은 몰랐네요.”
기드언은 아주 우아하게 미소 지었는데 타티아나는 어쩐지 그 미소에 뒤끝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데 초대받지 못한 건 기드언만이 아니었다. 바이칼 왕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발터에 있는 남자는 단 한 명도 이번 파티의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이 파티의 또 다른 기획자인 스칼렛 공주는 그에 대해 처음에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 번씩 여자들끼리 노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다니까. 그럴 때 고급 정보들도 더 많이 나오고.’
하지만 타티아나는 의문스러웠다.
사사롭게 놀자는 게 아니라 좋은 취지의 사회적 행사 아닌가?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좋을 것 같은데.
타티아나가 끝끝내 미심쩍은 표정을 버리지 못하자 결국 스칼렛 공주는 또 다른 이유를 한 가지 더 털어놓았다.
‘하아, 우리 올케 순진해서 어떡하니? 언니가 좋은 거 하나 알려 줄게’ 하는 표정이었다.
‘올케. 부부가 왜 둘인 줄 알아?’
‘모르겠는데요.’
‘한 사람이 정신 나간 짓을 하면 다른 한 사람이 말리라고 두 명인 거야. 옆에서 말려 줄 사람이 없잖아? 그때 비로소 지갑이 열려.’
아아. 그렇게 깊은 뜻이.
타티아나는 평상시 기혼 선배들의 말을 적당히 걸러 듣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깊게 감명받았다.
그리고 공주가 정말로 무섭게 느껴졌다.
남의 사재를 어떻게 탈탈 털어 볼까 궁리를 하고 있으면서 본인은 진심으로 신나 있다는 점이 그랬다.
하지만 초대받지 못한 남편들 중 누군가는 지금쯤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아, 이 여자가 무턱대고 서명하기 전에 우리 가족 얼굴을 한 번쯤은 떠올려야 할 텐데’ 생각하며 몹시도 심란한 밤을 보낸 이가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과연 그곳에서 어떤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갈까 궁금해할 수도 있다.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그냥 아내랑 같이 다니는 걸 좋아하는 남자도 있을 수 있다.
기드언도 아내 일에서 열외로 밀려난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해 더는 가타부타 아쉬운 소리를 덧대지 않았다.
대신 집무실에서부터 들고 온 목걸이를 그녀에게 직접 걸어 주었다.
그 중심에는 반짝이는 보석이 새파란 장미 모양으로 세공되어 있다.
블룸 가의 상징이었다.
“선물이에요?”
“네, 응원 겸.”
“이게 응원까지 필요한 일이에요? 갑자기 부담스럽네요.”
“그럴 것까지야.”
기드언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고개를 살짝 뒤로 빼며 목걸이가 잘 어울리는지 확인했다. 다소 관조적으로 느껴지는 시선이다.
하지만 그는 확인을 끝마친 후에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체리 같은 입술에는 오늘따라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다.
삼켜 버리고 싶은 욕구가 들었으나, 공들여 한 화장을 다 지워 놓으면 안 되겠거니 하는 생각도 든다.
기드언은 그녀의 턱을 옆으로 휙, 돌리고는 뺨 어중간한 자리에 입을 촉 맞추었다.
타티아나는 볼을 감싸 쥐며 물었다.
“이것도 응원?”
“아뇨, 이건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죠.”
기드언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고 타티아나는 잘게 웃었다.
사람이 일하러 나갈 때 배웅을 받고 싶은 마음은 이래서인가.
갑자기 우리 집 가장이 된 기분이었다.
괜히 힘내고 싶어졌다.
* * *
자선 경매 파티는 시작부터 성황이었다.
발터 귀족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유층만을 대상으로 한 행사였고, 초대장의 수량은 한정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뒤에서는 무수한 청탁도 오간 모양이었다.
왕자비와 공주가 중심이 된 파티였다.
이 파티에 참석할 자격을 얻는 것이 그들이 곧 발터의 유력 귀족이라는 증명이었다.
타티아나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연회장을 넓게 한 번 둘러보았다.
내부 곳곳에도 그녀의 목걸이처럼 블룸 가의 상징이 장식되어 있다.
파란 장미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비싼 꽃이 아닐까?
자연적으로는 피어날 수 없고, 화훼 기술자들은 아직도 개량에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그야말로 동화 속, 신비의 꽃이었지만 그 때문에 불가능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같은 이유로 블룸 가의 문양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해석이 뒤따른다.
현 국왕인 아인슬러 3세.
그는 20여 년 전 신생 백작가의 탄생을 축하하며 이 문양을 친히 하사했었다.
한데 그게 정말 순수한 축하였을까?
아인슬러 가의 상징은 붉은 장미였다.
그런데 그 정점에 서 있는 국왕이 발터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남자에게 불가능의 상징을 하사하다니.
어떤 면에서는 견제의 의미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타티아나는 적어도 심통은 좀 섞여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타티아나의 어머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아나?
물론 대다수는 그 대단함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한 성격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까지 아는 이는 드물다.
타티아나의 어머니는 블룸 백작과의 결혼식에서 국왕과 하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든 꽃을 파란빛으로 바꿔 버렸다.
뒤에서 제멋대로 떠드는 사람들의 입을 잠재우고, 마법을 통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것이다.
그러니 어떤 누군가가 이 꽃을 조롱할지라도, 딸인 그녀는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게 아닐까?
타티아나에게 파란 장미는 절대로 불가능의 상징이 아니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의지의 상징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타티아나는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파티가 시작되기 전, 가볍게 담소를 나눌 만한 대상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어온 이는 발터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 왕후였다.
“연회장 안에 블룸의 향이 가득하군요.”
어머, 우아하셔라.
너무나 시적인 인사에 타티아나는 일단 감탄부터 하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동안 알게 모르게 그녀도 기드언의 영향을 받았나?
타티아나는 이 인사를 해석하기 위해 굳이 꼬아 듣기 시작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냥 빨간 장미를 염료로 물들인 거잖아. 사실은 아인슬러의 향이라는 말이 하고 싶으신 건가?’
아. 피곤했다.
아인슬러 가 사람들은 어떻게 이 짓을 매일 하고 사는 것인가.
타티아나는 첫 손님부터 쉽지 않다고 생각하며 화답했다.
왕후처럼 우아하진 못하지만 투박하고 진솔한 언어로.
“이렇게 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해요.”
“며느리와 딸이 합심하여 좋은 일을 하는데 당연히 와 봐야지요. 초대장이 없어도 왔을 거랍니다.”
“…….”
아. 이번 건 좀 많이 어려웠다. 어디 통역 없나?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게 부부라더니, 타티아나는 벌써 기드언의 존재가 그리워졌다.
‘혹시 초대장을 왜 보냈냐고 비꼬는 건가?’
에이, 설마 사람이 그 정도로 꼬였을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
언제부턴가 이 문제에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
게다가 타티아나는 왕후에게 초대장을 보내기 전에 실제로 고민을 하긴 했다.
왕실 어른이니 참석 유무를 떠나 일단은 보내는 게 도리였다.
다만 왕후가 속으로는 아니꼽게 생각하지 않을까, 트집을 잡진 않으려나 우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남의 속도 모르고 스칼렛은 이것도 신나 했다.
‘왕후 폐하는 올 거야. 분명히 올 거야. 그런데 속으로는 되게 짜증 날 걸?’
‘……왜 짜증이 나죠?’
나는 왕후 폐하를 짜증 나게 하고 싶지 않은데?
잘 지내긴 틀린 것 같았지만, 굳이 나서서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기드언 좋은 일 해 주긴 싫을 거 아니야. 올케라면 와서 막 자리를 빛내 주고 싶겠냐고.’
‘…….’
‘근데 안 오면 자기만 옹졸해 보이잖아. 아마 와서 얼굴만 비추고 갈 텐데 속으로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다 마음에 안 들 거야.’
타티아나는 시누의 말을 되새기며 왕후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풋내기 앞에서 그리 쉽게 감정을 노출한다면 그건 한 나라의 왕후가 아니었다.
도리어 왕후는 타티아나에게 이런저런 덕담을 하기 시작했다.
“블룸 부부가 이 모습을 보았으면 참 자랑스러워했을 테지요.”
“과찬이세요. 부모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늘 부족해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건 타티아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는데, 대놓고 ‘응, 그렇긴 하지’라고 말하기엔 왕후도 미안한 감이 있었나.
왕후는 또 칭찬 비스름한 답을 하며 이상한 화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비는 검에 많은 소질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겸양도 지나치면 흉이 된답니다.”
“…….”
“바이칼에게도 그런 검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왕족이라면 누구나 강한 검이 필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가장 강한 검이라고들 하지요.”
“…….”
“여러모로 참 아쉬워요.”
타티아나는 머쓱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자 왕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왕후의 말은 발터 신민이라면 누구나 익히 아는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가장 강한 검을 얻은 자가 발터의 왕이 될지어다.’
바이칼이 왕족이라 할지라도 저 문장을 그에게 함부로 갖다 대는 건 위험했다.
아니, 오히려 왕족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검을 아쉬워하는 이유가 왕이 되기 위해서라는 뜻이 될 테니.
한데 상당히 민감한 발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같은 문장을 두고도 전혀 다르게 반응했던 기드언이 떠올라서였다.
그는 나를 따르는 자가 결국 가장 강한 검이 될 것이라 말하며 ‘짐이 곧 왕이다’와 같은 태도를 보여 주었다.
설마 저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냐는 듯, 무척이나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왕후 폐하는 그 말이 되게 신경 쓰이시나 보네.’
기드언이 옆에 있었더라면 감각이 하나같이 낡았다고 빈정거려 주었을 텐데.
혹은 ‘따르는 기사가 없다는 말을 길게도 하네’ 중얼거렸을지도 모르지.
비슷한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타티아나는 또 그런 말을 시어머니 면전에 대놓고는 못하겠다.
또 한 번 남편의 빈자리를 느끼며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