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9)
묘하게 불편한 분위기가 풀어진 건 뮐러 부인이 두 사람 주위를 맴돌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시댁 식구를 만났으면 친정 식구도 만나야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양쪽 다 피곤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나면 어느 날 불현듯 친정집이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더니 이것도 비슷한 건가?
파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기부터 쪽 빨리는 기분이었다.
왕후는 그런 파티 새내기를 반쯤 등지며 공작 부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나, 뮐러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셨군요.”
“예, 왕후 폐하. 이렇게 또 한 번 뵙게 되어 영광이랍니다.”
“다 우리 비 덕분에 허락된 기회지요. 그런데 부군 때문에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뮐러 부인은 그 말에 착잡하다는 듯, 그러나 또 어쩌겠냐는 듯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지요.”
“아무쪼록 공작의 쾌차를 빌겠습니다. 그래야 왕실을 위해 또 큰일을 해 주실 거 아닙니까.”
타티아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쾌차?’
혹시 자신이 지금 저 대화에서 놓친 맥락이 있는 건가.
그녀는 눈을 굴리며 상황을 되짚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왕후는 그 뒤로도 공작 부인과 의례적인 안부를 조금 더 나누었다. 그리고 자리를 뜨며 두 사람을 배려해 주듯 말했다.
“두 분, 이제 말씀들 나누시지요. 더는 모녀간의 정다운 조우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타티아나는 왕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머, 끝인사마저 우아하셔라, 생각했다.
그러고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곧바로 공작 부인을 응시했다.
뮐러 부인은 그래도 과거 수양딸 쪽이 왕후보다는 편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타티아나에게 안부를 묻는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자연스러웠다.
“비전하, 잘 지내셨지요? 이렇게 또 얼굴을 보니 반가움이 크네요. 그래도 한때는 매일같이 보았는데…….”
“예, 그러게요. ……근데 어머니. 양부께서 혹시 몸이 어디 안 좋으신가요?”
타티아나는 걱정 반, 의아함 반을 담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녀의 질문을 듣는 공작 부인도 몹시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
“등청하는 길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크게 다친 건 아니고, 팔이 조금…….”
공작 부인은 타티아나에게 뮐러 경의 건강과 근황에 대해 간략히 전해 주었다.
심각한 얼굴로 듣고 있던 타티아나는 공작 저에 방문하는 건 무리겠지만, 나중에 시간을 내서 관사에 꼭 한 번 가 보겠다고 말했다.
공작 부인은 손사래를 치긴 했으나 내심으론 반기는 눈치였다.
양부도 좋아할 거라고 타티아나에게 넌지시 말해 주었다.
글쎄. 좋아하실까?
타티아나는 솔직히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의아했다.
‘왜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해 줬지?’
기사가 부상을 입는 게 뭐 그리 특별한 일이겠느냐만 이건 그와 다른 차원의 사고였다.
설령 훈련 중 가벼운 부상을 당했다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녀에게 언질을 주었어야 할 텐데.
시녀들은 대체 그간 뭘 하고 있었나? 평소에는 온갖 잡다한 사교계 소문들을 다 물어다 주면서.
그러나 연회장 상황은 타티아나가 오랜 시간 의문에 빠져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귀빈들이 객석을 채우자 사회자는 눈치껏 개회를 알렸다.
타티아나는 이 파티의 주최자로서 축사를 해야만 했다.
한때 연회장의 석조 기둥 53을 자처했던 타티아나 블룸.
그녀는 어쩌다 이 자리까지 서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이러고 있나?
내가 이러려고 결혼을 했나?
인생 참 뜻한 대로 되지 않는다 생각하며 그녀는 연단 위에 올라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밤새 준비한 말을 조곤조곤, 또박또박 읊었다.
어차피 축사라는 건 다 비슷하다.
왕실의 무궁무진한 영광과 안녕을 한 번 빌어 주고, 이 행사의 취지도 살짝 짚어 주고, 마지막으로 이 좋은 일에 뜻을 모아 준 여러분들은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하며 다정한 사람들인지 열과 성을 다해 한껏 치켜세워 주고…….
사실 별 내용 없다는 뜻이다.
타티아나가 진짜로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은 축사가 아니라 경매품 소개였다.
귀빈들은 이 행사를 위해 자신들의 소장품을 한두 개씩 턱, 턱 인심 좋게 내놓았다.
온갖 서사가 얽힌 주얼리와 명화들이 앞다투어 연회장에 도착했다.
파티의 주최자인 타티아나도 당연히 무언가를 내놓아야만 했다.
한데 그녀는 품목을 선정할 때부터 난관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돈은 있었으나 희귀한 물품을 수집하는 취미는 없었기 때문이다.
상류사회에 진입하려면 사치스럽거나 독특한 취미 한 가지씩은 있어야 한다더니, 이래서였나 보다.
타티아나가 가진 의미 있는 물건이라곤 모친이 살아생전 남긴 마법서들 정도였다.
그녀의 시선에는 어떤 보석보다 가치 있는 책들이었으나, 그걸 사람들이 얼마나 알아줄지는 미지수이다.
‘아무도 제 물건에 관심이 없으면 어떡하죠?’
스칼렛 공주는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답했다.
‘올케가 직접 사람들 앞에서 잘 설명하면 되지. 이게 어떤 책인지.’
‘……글쎄요. 자신 없는데.’
저도 어렸을 땐 하녀들에게 운동이 얼마나 가치 있고 즐거운 행위인지를 설명하곤 했어요.
검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우리의 보잘것없는 자아를 어떤 비범한 경지에 가져다 놓을 수 있는지, 그 순간이 얼마나 황홀한지에 대해 떠들곤 했다고요.
하지만 백날 설명해 봐야 그건 사람들의 귀에 와닿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그때 저는 깨달았지요.
진짜 좋은 건, 자기 마음을 떨리게 하는 건 절대 설명의 영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을요.
그건 본능이고 그냥 자연스러운 거예요.
타티아나가 시무룩하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법서를 만지작거리자 스칼렛은 귀여워서 그랬는지, 딱해서 그랬는지 이렇게 말해 주었다.
‘걱정 마. 왕자비의 소장품인데 설마 유찰되겠니? 혹시 진짜 아무도 관심이 없으면 내가 사 줄게. 이 언니 돈 많아.’
‘……진짜죠? 저 전하만 믿고 파티 날까지 발 뻗고 잘 거예요.’
약속했다? 우리 친구다? 배신하기 없다?
‘근데 타티아나도 나 배신한 적 있지 않아? 로버트한테 나 팔아넘겼잖아. 난 올케를 철석같이 믿었는데.’
‘……에이, 팔아넘기다니. 공주 전하도 참, 그게 언제 적 얘긴데.’
타티아나가 의뭉을 떨자 스칼렛 공주는 기막혀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공모자가 되어 주기로 약속했다.
이제 믿는 구석이 생겼으니 나머지는 사회자에게 맡기고 그의 입을 빌려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첫 번째 경매품이자 본인의 소장품을 사람들에게 직접 소개하기로 했다.
파티의 주최자로서 벌이는 일종의 이벤트였다.
꼭 주최자가 아니더라도 본인 기부품에 애착과 자부심이 깊은 사람들이 종종 택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어……. 이 책은 제 모친이자 마법사셨던 고(故) 엔야 블룸 백작 부인의 마법서입니다. 저술 활동을 처음으로 시작하시고 3년 후쯤에 집필하신 초기 저서인데요. 발터에 총 세 권이 있고요. 하나는 왕립 아카데미 부속 도서관에, 다른 하나는 마탑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둘은 필사본이고 이게 친필 원본이에요.”
마탑과 왕실은 그 책을 거의 국가 보물처럼 취급하고 있으나, 사실 이 안의 내용은 별로 새로울 게 없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아는 기초 이론이었다.
하지만 블룸 부인은 그 이론을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마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언어로 풀어 적었다.
이 안에는 사람들이 그간 진입 장벽이라 여겨 온 용어들이 단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갓 마력에 눈을 뜬 꼬마 마법사들을 위한 대마법사의 배려였다.
타티아나는 손때가 탄 책의 표지를 넘기며 말했다.
“초본이다 보니 다른 두 권에 비해 보관 상태가 썩 좋지는 않은데요, 그래도 필사본과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 책의 서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요.”
“…….”
“내 딸 타티아나 블룸에게. 그리고 발터의 어린 친구들에게.”
내 응원과 사랑을 담아.
귀빈들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입찰 종이에 금액을 적기 위해서였다.
타티아나는 진짜 좋은 건, 사람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건 설명이나 설득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일견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오늘 같은 경우에는 또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유명해지면 뭘 해도 사람들이 열광한다는 것이다.
대마법사가 자신의 딸에게 헌정하듯 기술한 마법서라니. 그런데 그 딸은 왕자비가 되었다지?
내용은 모르겠지만 일단 이건 사야 했다.
타티아나는 분주해진 사람들을 보며 일순간 당황했다.
‘아니, 내 말 안 끝났는데?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발터의 훌륭하신 귀족 여러분, 저는 아직 자랑할 게 산더미처럼 남아 있어요.’
이 책의 십구 페이지와 삼십삼 페이지, 사십육 페이지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아직 얘길 못 했단 말이야…….
타티아나는 더는 기회가 없을까 봐 서둘러 책장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귀빈들한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갑자기 대마법사가 등장하고, 저 책이 발터에 단 세 권뿐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이미 모든 상황은 끝난 거였다.
귀빈들은 정신없이 흘려 적은 입찰 종이를 근처의 시녀들에게 내밀었다.
타티아나가 허탈하게 웃자, 눈이 마주친 스칼렛은 윙크를 보냈다.
그러면서 그녀도 두 번 접은 종이를 아주 새침하게 곁에 있는 시녀에게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