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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55)화 (49/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10)

* * *

자선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타티아나는 경매를 통해 본인의 내탕금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를 거둬들였다.

낙찰에 실패하고도 체면 때문이었는지 별도의 기부금을 내어놓고 간 귀족들도 있었다.

‘발터에 이렇게 부자가 많은지 몰랐네요.’

타티아나는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스칼렛과 텅 빈 연회장에 남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원래 큰 행사를 치르고 나면 여운이 남아 자리를 쉬이 뜨기 힘든 법이다.

그러나 몽롱한 표정의 타티아나와 달리 스칼렛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계획이 서고 있는 듯했다.

‘이제 이 사람들 이름을 동판에 새기는 거야. 그래서 학교에 커다랗게 거는 거지. 아니다. 못 떼게 그냥 벽에다 새겨 버리자. 이 학교를 설립하는 데 고귀한 뜻을 함께해 주신…….’

‘…….’

‘타티아나. 이렇게 아차, 하는 순간 한배를 타게 되는 거야.’

스칼렛은 광기에 젖은 눈으로 사악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무서우니까 그만 얘기하세요, 공주 전하.’

타티아나는 마치 추위를 느끼는 사람처럼 몸을 떨었으나 속으로는 뿌듯했다.

너무 내색하면 애처럼 보일까 봐 들뜬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늦은 시각 귀가하니 침실에선 기드언이 뜬눈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늦었는데 왜 안 자고 있어요?”

기드언은 그 물음이 훨씬 더 이상하게 들리는 눈치였다.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렇게 말했으니까.

“같이 사는 여자가 집에 안 오면…… 기다리게 되지 않나요?”

“왜요? 걱정돼서?”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되지. 내가 옆에 없을 때 독이 든 음식이라도 집어 먹는 건 아닌가 염려되고.”

“…….”

“매일매일 비의 생사를 걱정하죠. 잘 지냈으면…… 하고 바랐죠.”

그의 말은 끝에 가서는 묘하게 과거형이었다.

타티아나는 그게 뭐야, 하며 얼굴을 괴이쩍게 찌푸렸다.

그러나 그가 왜 한 번씩 뜬금없이 독 있는 음식을 피하라고 말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기드언 오누이의 친모는 그들이 어릴 때 급사했다.

왕실은 평소 앓던 지병 때문이라 발표했는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독살설이 유력했다.

어쩌면 기드언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어지간한 독들에는 면역이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 자신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아주 대단한 기사가 될 거라고 상상해서, 독을 미량씩 섭취하여 내성을 키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걸 위해 마법사인 모친의 창고에 풀 방구리 쥐 드나들 듯하였으니, 그녀는 대체 얼마나 준비성이 뛰어난 새싹이었나.

나중에 그것 때문에 백작 저가 크게 한 번 뒤집힌 적이 있었지만, 때는 한참 늦어 있었다.

이래서 애 키울 땐 한눈팔면 안 된다는 소리가 있나 보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에게 난 쉽게 안 죽는다는 뜻으로 이 얘기를 해 줄까 말까 하다가 접어 두었다.

그녀도 남편이 늘 상냥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아서, 후폭풍이 좀 무서웠던 것이다.

불같이 화를 냈던 부모님이 뒤에서는 너무 속상해하며 울었다는 것도 이제는 잘 안다.

그녀는 쓸데없는 옛이야기를 하는 대신 침대에 파고들며 기드언의 팔을 와락 끌어안았다.

기드언은 흘러내리는 보랏빛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며 나직이 웃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행사가 잘 됐나 봐요. 그렇다고 전해 듣긴 했는데.”

“응, 나 오늘 돈 많이 벌었어요.”

어차피 다 쓸 곳이 있는 돈이었지만 타티아나는 주머니가 두둑해진 꼬마처럼 으스댔다.

기드언도 고스란히 다시 나갈 돈이라는 걸 잘 알면서 그녀에게 맞춰 줬다.

“좋겠네, 내 아내. 부자 돼서.”

“응,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 보여야 해요.”

“그럼 뭐 있어요?”

“응, 콩고물 조금 나눠 줄게.”

“조금?”

“응, 진짜 쪼끔.”

기드언은 말로 내뱉진 않았지만 그녀를 몹시도 귀여워하는 눈빛이었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꾸만 웃었다.

그리고 이불을 그녀의 어깨까지 덮어 주었다.

“고생했어요. 피곤할 텐데 그만 자요. 오늘 밤엔 안 괴롭힐게요.”

“……그건 괴롭히는 게 아닌데.”

한때 밤일을 앞두고 난 맷집이 약하니 살살 해 달라던 타티아나는 이제 그게 일방적이고 무자비한 행위가 아니라는 걸 안다.

물론 예전에도 그 정도는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었으나, 직접 체감한 뒤의 느낌은 또 달랐다.

육체적 쾌감이 먼저인가, 정신적 쾌감이 우선인가.

침대에서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무엇을 추구하기 위함인가, 어떤 영역이 더 상위에 있나.

그것까지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서로의 신체를 격렬히 탐하면서도 소중히 아끼는 이 모순적 행위가 열어 주는 세계도 분명히 있다는 거다.

타티아나는 그 육체적 감각과 통로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발칙하게 찔러본 뒤 분위기를 슬쩍 살피자, 기드언은 하? 웃으며 물었다.

“지금 그 말은 하고 싶다는…… 뜻이겠죠?”

“음.”

아마 그렇겠죠?

그녀는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기드언은 내내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을 흘리고 말았다.

귀여워, 하고.

아주 완벽한 하루였다. 이상적인 밤이었다.

공들인 행사를 성공적으로 끝마쳤고, 능력 있고 야무진 조력자 덕에 다음 절차도 순탄할 예정이다.

지난밤 기드언은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웠다.

그의 잘생긴 입에서는 평소엔 듣기 힘든 밀어가 쏟아져 나왔다.

생각할수록 재미있었는지 ‘근데 많이 벌어 놓고 왜 난 조금 줘요? 난 너한테 다 줄 수 있는데. 억울하네’ 하며 웃기도 했다.

하지만 이토록 흠잡을 데 없는 하루를 보내 놓고도 타티아나의 마음은 어딘가 무거웠다.

뮐러 공작 때문이었다.

그녀는 공작이 머무는 관사로 발걸음을 옮기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다치면 쾌유를 기원하는 게 보통의 수순이다.

조금 더 가까운 사이라면 병문안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그 상대가 양부라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공작을 찾아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이자, 어떤 면에서는 도리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타티아나는 언제부턴가 양부를 마주할 생각을 하면 숨통이 꽉 막힌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아마도 그와 나누는 대화가 자꾸만 과거를 맴돌며 친부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타티아나는 친부를 회상하는 걸 좋아했다.

기드언과도 종종 그 기억을 나누곤 했다.

그럴 때면 어디 한 군데 가슴 아린 구석 없이, ‘맞아,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추억에 젖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그늘은 있다. 아빠를 생각할 때면 기분 좋은 미소보다 억울함과 비애감이 앞설 때도 많다.

한데 뮐러 공작이 한 번씩 그 쓰라린 감정을 건드리고 자극해서.

그럴 때면 아직 상처가 덜 아물었다는 걸 느끼게 돼서.

간단히 말해, 누군가가 어둡고 힘든 감정을 토로하면 듣는 타티아나도 힘들다는 뜻이다.

갓 20살 넘은 아이가 어떻게 어른의 정신적 고통을 품나.

심지어 그녀는 그 사건 당사자의 친딸인데.

타티아나가 깊은 한숨을 쉬자 곁을 따르던 케이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비전하, 친위대장 관사로 가시는 겁니까?”

“응. 괜찮으신지만 보고 오려고. 잠깐만 기다려 줘.”

그러자 케이는 대답이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말이 없어서 그녀의 생각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려던 찰나, 그는 넌지시 물었다.

“제가 따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듣는 사람이 있으면 대화 내용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으나, 양부는 공석에선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의 집무실 어딘가에 있는 술병을 케이가 눈치챌까 봐 걱정스럽고 괜히 민망하기도 했다.

케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더니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그럼 바로 진입할 수 있는 창 쪽에 있겠습니다. 어차피 눈치채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타티아나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케이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호위에 진심인가 의아해서였다.

네 눈엔 내가 지금 우범지대에 가는 걸로 보이냐고 묻고 싶었다.

“네 실력은 나도 알아. 근데 너도 내 실력을 알잖아.”

“…….”

“네가 끼어들어야 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그건 내가 이미 제압당했단 뜻이겠지? 그런 실력의 상대라면 네가 도와주러 와도 어차피 늦어.”

“그래서 함께 들어가겠단 뜻입니다.”

“그래? 난 그 정도 실력의 상대는 이 성에 없단 뜻이었는데.”

그렇게 한 사람은 심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말장난을 하고 있을 때였다.

관사 부근까지 도달한 타티아나는 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지금 가깝고도 먼 사이의 남자가 뮐러 공작의 집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남편의 이복동생이자 그녀의 도련님인 바이칼 왕자였다.

“형수님이 여긴 어쩐 일로…….”

그건 그녀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바이칼은 검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왕족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녀처럼 심심해서 병영에 드나들 리는 없었다.

“양부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들어서요.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바이칼 전하께서는요?”

“아, 저도 뭐, 비슷합니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 상황이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바이칼도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변명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어머님이 최근에 뮐러 공작에게 제안하신 부분은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도 그 말을 하고자 온 겁니다.”

“……제안이요?”

“기사 서약 말입니다.”

타티아나는 눈동자를 위로 하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표정이 마치 화가 난 사람 같기도 했다.

물론 그녀는 정말 화가 나서 입을 다문 건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대꾸할 수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바이칼은 그 표정을 오해했는지 아까보다 훨씬 난처한 기색으로 이렇게 말했다.

“형수님과 형님은 믿지 않으실지 모르나, 저는 그 일을 바라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

“……역시 믿지 않으시는 거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고요.

하지만 타티아나는 섣불리 묻지도 못했다.

여기에서 말실수라도 하면 혹시 그게 또 다른 문제로 비화할까, 우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자신을 믿지 않는 거냐는 바이칼의 말도 옳았다.

바이칼은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타티아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가 얼른 그를 따라 맞인사하자 희미한 미소를 띄워 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껴 있다.

타티아나는 병영 밖으로 향하는 바이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이 다친 것도 어제 알았는데, 모르는 게 그것 말고도 또 있었다.

대체 나만 빼고 어제부터 다들 뭘 하는 걸까?

타티아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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