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장. 부부 싸움은 칼로 (11)
익숙한 목소리가 출입을 허락하자, 그녀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바이칼 왕자와 나눈 대화로 인해 다소 격양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눈앞의 상대가 대놓고 알려 줬기 때문이다.
“비전하께서는 또 내게 뭘 따지러 오셨을까.”
“…….”
“아비가 얼마나 다쳤는지 구경하러 온 건 아닐 테고.”
그녀는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무안해지고 말았다.
타티아나가 머쓱해하자 공작은 낮게 웃으며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차라도 한 잔 내어 주랴’ 하는 물음이 뒤를 이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어제 파티가 무척 재미있었던 모양이지. 네 어머니가 다녀와서는 입이 닳도록 자랑했단다.”
“그러셨나요.”
“그래, 왕후 폐하께서도 네 검을 칭찬했다고, 널 눈여겨보시는 것 같다며 좋아라 하더구나.”
“……왕후 폐하야 뭐. 그냥 덕담 삼아 하신 말씀이겠죠. 제가 가진 장기가 그것밖엔 없잖아요.”
타티아나는 사람들이 결혼 생활은 어떻냐고 물을 때마다 손가락으로 횟수를 꼽으며 먼 산을 바라보곤 한다.
그러나 사실 이건 장난 섞인 반응일 뿐, 그녀는 이보다 훨씬 오랜 시간 인사말처럼 들어온 말이 따로 있다.
사람들은 그녀와 처음 대면하든, 오랜만에 마주치든 대체로 검을 화제 삼곤 했다.
그들도 마땅히 꺼낼 만한 얘기가 그것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정체성을 가장 넓게 포괄할 수 있는 단어가 검 말고 또 있을까.
그러니 타티아나도 거기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의도를 헤아릴 생각은 없었다.
칭찬도 견제도 비아냥도 모두 흘려들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어차피 수천 번도 넘게 반복된 상황이었고, 그녀도 자기 자신을 검과 떼어 놓고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뮐러 공작은 왕후의 말에서 대체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그는 비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봐야 검술이란 것도 결국 사람 죽이는 기술에 지나지 않거늘…….”
“…….”
타티아나는 멈칫하다가 공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자조적인 표정으로 ‘왜?’ 하며 되물을 뿐이었다. 내 말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으면 하라는 듯.
일순간이지만 타티아나는 가슴속에 아주 미세한 생채기가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역시 본인과 검을 분리하기가 힘들어서.
검이 늘 정의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모두가 대의를 품고 검을 잡는 것도 아니고, 엄밀히 따지자면 사람을 도륙하는 기술인 것도 맞다.
하나 기사들에겐 정말 그게 다인가?
친위대장이 그렇게 말하면 저 밖에서 훈련하고 있는 기사들은 뭐가 되나.
반감이 들었으나 타티아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 화제에서 얼른 빠져나오고 싶다는 듯 말을 돌렸다.
“이 앞에서 2왕자 전하를 뵈었어요. 저한테 기사 서약에 대해 말씀하시던데요.”
공작은 타티아나가 감정을 절제하는 태도로 한발 물러서자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왕후 폐하께서는 내게 바이칼 전하께 서약을 바치라 했지. 그런데 바이칼 전하는 날 찾아와서 그걸 받지 않겠다, 말하고 계시는구나.”
그럼 나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냐?
바이칼 전하는 왕후 폐하의 뜻을 어디까지 꺾을 수 있을까?
네 눈에는 누구의 의지가 더 강해 보이는데?
모르겠구나.
이 아비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바이칼 전하의 인생은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란다.
뮐러 공작은 타티아나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털어놓는 목소리에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에 한동안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도 친위대가 어떠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안다.
왕후가 지금 뭘 이용하고 싶어 하는지도 알겠다.
이건 너무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고약한 계획이었다.
“아버지, 그거 하실 거예요?”
“글쎄.”
“그러시면 안 돼요. 아버지는 친위대장이잖아요. 그거 귀족들한테 잘못된 오해를 심어 줄 거예요.”
왕후가 왕실 친위대의 수장에게 정말로 기사 서약을 받아 낼 수 있을까?
기드언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이 일은 이제껏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해 온 귀족들에게도 반감을 사기 딱 좋았다. 여태까지의 관행을 거스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왕후도 난관을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성공보다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게 진짜 실패일까?
이 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뇌리에 바이칼이 또 하나의 왕위 후보로 각인된다면, 왕후로서는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 거였다.
논쟁거리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왕후 측은 잃을 게 없는 시도였다.
타티아나는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싶었으나 공작은 되물었다.
그녀를 너무나 얼떨떨하게 만드는 물음이었다.
“잘못된 오해?”
“오해죠, 그럼.”
“어째서?”
“…….”
“넌 내가 기드언 전하를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아버지?”
타티아나는 당연히 그래야죠, 그럼 아니냐고 묻고 싶었는데, 공작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한쪽 입가에는 비뚜름한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블룸이 그랬으니 나도 그래야 한다는 거냐?”
“그런 뜻은…….”
“네 친부가 대단한 기사였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의 뜻조차도 기사단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부대장이 승계가 유력한 장자에게 힘을 실어 주는 데에 이견을 제시한 단원이 존재하긴 했나?
게다가 이제는…….
“저는 1왕자비예요. 공작님도…… 제 아버지시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의 남편과 반대 진영에 설 생각이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를 아버지라 일컫는 자신의 목소리에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공작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날 끝까지 아버지라 불러 주는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그럼요. 제가 공작 저에서 산 시간이 어디 가나요?”
“넌 네 친부를 닮아서 너무 착해. 블룸도 항상 그랬지.”
타티아나는 죽은 사람을 추억하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공작이 위험한 결정을 내릴까 봐, 혹시라도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까 봐 서둘러 말을 이었다.
“기드언 전하께 힘을 보태 주세요. 전하께서도 지난번 식사 자리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
“그런데도 고민할 여지가 있나요?”
타티아나가 생각할 때, 기드언은 왕좌에 오를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정통성 면에서도 그러했지만, 능력 면에서도 아쉽다는 평가가 뒤따라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 왕자가 공작에게 에둘러나마 함께할 것을 제의했다.
그 제안에 굳이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남아 있는 것인지 타티아나는 모르겠다.
그의 반대편을 선택해 가면서까지 취할 이득이 있는지는 더욱더 모르겠다.
그러나 뮐러 공작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타티아나. 기드언 전하는 나에게 손을 내민 게 아니란다.”
“……그러면요?”
“전하는 너한테 손을 내민 거야. 네게 청혼할 때부터.”
“…….”
“너만 쏙 빼내려고.”
나한테서. 자기 것을 찾아가려고.
생각에 잠겨 있던 공작은 본인의 말에 점점 확신을 얻는 듯했다.
타티아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깃들었고, 그는 당부라도 하듯 말했다.
“너도 조심하려무나.”
“…….”
“전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말라는 뜻이다.”
타티아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마주하다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공작의 말은 오랜 시간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하의 모든 행동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 왕족은 결국 자신만의 검을 원하게 되어 있다고.
타티아나가 관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케이는 곧바로 뒤따라 붙었다.
아까 전 자신도 함께 들어가겠노라, 청하기까지 했으니 그리 먼 곳에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지 도통 모르겠다.
평소라면 호기심을 갖고 ‘어떻게 은신한 거야?’ 물었을 테지만 타티아나는 그럴 기운도, 정신도 없었다.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아서 본인도 모르게 한숨만 푹푹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참을 그러고 있던 타티아나는 병영을 빠져나오더니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케이도 얼굴을 찌푸리며 발을 멈추었다.
타티아나는 그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말했다.
“있잖아.”
“예, 전하.”
“나 좀 상대해 줄래?”
케이는 한참 동안 저게 무슨 뜻일까 고민했다. 그러다 마침내 답을 유추해 냈다.
“대련…… 말씀이십니까?”
“그럼, 대련이지.”
“…….”
“말동무라도 해 줄 거야?”
케이는 말동무라는 단어만으로도 벌써 힘겨웠는지 난감한 눈치였다.
타티아나도 애초에 그런 방면으로는 기대한 적이 없었다.
붙어 다닌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말수가 적은 사내라는 걸 알아채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먼저 입을 열 때도 간혹 있었지만, 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란 건 하나같이 죄다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다.
말동무로 갖다 쓰기에는 더럽게 재미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점이야말로 재미있는 게 아닐까?
타티아나는 이 심란한 기분을 어찌하지 못하고 케이를 연무장으로 끌고 가 희생양으로 삼았다.
마음이 복잡하고 정신적으로 피로할 때.
그때는 몸을 정신보다 더 피곤하게 만들면 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아, 이러다 죽겠구나’ 싶으면 그 이후론 아무 생각이 안 난다.
반대로 푹 자거나 음식을 섭취하며 배를 채우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래도 계속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괴롭힌다고?
그건 아직 죽을 만큼 운동 안 한 거다.
아니면 덜 먹은 거니, 조금 더 열심히 먹자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인간이 이토록 단순한 동물이라는 게, 우리의 고민이 신체 리듬 앞에서는 그 위력을 잃는다는 게 때로는 황당하게 느껴진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메커니즘을 인지하고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고등한 존재라는 증명이 아닐까?
먹고, 자고, 땀 흘리고.
비록 그 방식이 너무나 짐승을 닮아 비루해 보일지라도, 인간은 자신의 기분을 보다 이상적인 방향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
타티아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팡, 팡 소리를 내 가며 검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기세로 케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케이는 어느 순간부터인지 몸에 힘을 빼고 소극적인 태도로 방어에만 임했다.
그는 아는 것이다. 그녀가 지금 이성적으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걸.
타티아나는 곧 슬그머니 검 끝을 아래로 내리더니 시무룩하게 사과했다.
“미안.”
“…….”
“내 검에 지금 감정이 실려 있네.”